김민기. 그 이름을 들으면 70년대의 지난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김민기의 노래를 처음 만난 것은 77년,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그 당시 황모라는 친구 집에 잠시 기거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녀석과 나는 거실에서 레코드판을 뒤적이며 팝송을 듣고 있었는데, "너 이거 한번 들어 볼래?"라고 말하며 녀석이 레코드판 한 장을 나에게 들이 밀었다. 그 레코드판 겉에는 핼쑥한 젊은 남자의 얼굴이 크게 붙어 있었다. 무언가 음울한 분위기였다. 밝고 상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얼굴 위에는 김민기라는 글씨가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김민기? 처음 들어보는 가수였다.


"누구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물었다.

"형이 가져왔더라구 한번 들어봐, 좋더라 야."

그 형이라는 사람은 '야생초편지'의 저자이며 생태운동가인 지금의 황대권이었다. 잠시 후 김민기의 노래가 다소 좋지 않은 음질로 들리기 시작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며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며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친구 중에서


저음의, 음의 고저 없이 한 음으로 이어지는 첫 소절,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 등 그 당시 통키타 가수들의 낭만적이고 밝은 노래만 알고 있던 나는 진지하고 엄숙하고 무언가 메시지가 있는 것 같은 그의 노래에 한 순간 몰입되어 갔다.


몇 년 전부터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니 어린 내가 접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특히 '아침이슬'이란 곡은 그 당시 성숙치 못한 나의 음악성으로도 명곡이라고 단정 지었을 정도로 대단한 곡이었다. 경이로웠다. 또한 그러한 곡을 이십대 초반, 대학 저학년 때 만들었다는 사실에 예술, 특히 음악은 감성과 영감의 결정체라고 하지만, 도대체 그의 음악적, 사고의 능력의 폭은 얼마나 넓은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그의 노래를 배워 술자리에서 거나해지면 '아침이슬'을 한 곡조 불렀고 MT를 가는 경우 기타를 치며 시를 읊듯 '친구'를 불렀다. 금지곡이었지만 그 노래가 누구의 노래인지 검열관이 아니고는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 당시 김민기라는 개인에 대해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앨범 하나 덩그러니 내놓고 사라진 인물, 또한 노래 전부가 금지곡이 되어야 했던 인물, 도대체 그는 누구인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신비에 쌓인, 신화가 되어버린 인물이었다. 참 이상한 나라였다.


김민기를 다시 만난 것은 우습게도 군대에서다. 늙은 군인의 노래라는 제목의 군가풍의 노래였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년...'으로 시작되는 노래 말이다. 그 노래는 군대의 구전가요처럼 퍼져 있었다. 작사 작곡 미상이었다. 음담패설적이고 군대라는 조직체에 대해 조롱과 멸시를 보내는 구전가요가 사병들 사이에 회자된다는 것은 짬밥 좀 먹은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인데, 불행하게도 '늙은 군인의 노래'도 그 장르에 속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웃기는 군대였다.


그리고 우리 분대가 사격장 파견을 나갔을 때였다. 분대원 중에 말년병 하나가 있었다. 어느 날 내무반에 들어서는데, 그 말년병이 기타를 치며 부르는 노래가 나의 머리에 스파크를 일게 했다. 겨우 치는 기타 연주 실력이지만 그가 부르는 노래가 바로 김민기의 '강변에서'였던 것이다.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 마다...


말년병은 가사를 다 모르는지 여기서 중단 했다. 다시 기억을 더듬는 듯했지만 더 이상 찾지 못한 듯 다른 노래로 이어갔다. 나는 내 일을 하며 뒤를 이어 그 곡을 계속 속으로 불렀다.


역사는 다행히 퇴보하지 않았다. 민중의 저항은 역사를 진화시켰다. 야만이란 장벽이 점점 허물어져 가고 그동안 안보이던 세상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세상은 보다 넓어지고 있었다.


김민기의 모습도 그 중에 보였다. 베일에 싸였던 얼굴 없는 가수 김민기는 세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노래도 금지곡에서 해제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가수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다. 다행인줄 모른다. 그다운 행보였다. 그는 자신은 가수가 아니라고 한다. 하여튼, 그 이유에 대해선 지면 관계상 논하지는 않겠지만, 그는 연극 공연 기획으로 전환하여 십년 이상을 억눌려 왔던 예술에 대한 욕구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마치 정권의 태마송처럼 양희은이 부른 '상록수'가 매일 방송에서 흘러나왔다. '저들에 푸르른 꽃잎을 보라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 물론 작사 작곡은 김민기이다. 한 때 금지곡 중에서도 빨간딱지가 붙은 불온한 금지곡이었던 그 노래가 현재는 정부의 태마송이 되어 매일 전국에 울려 퍼지는 상황. 격세지감인지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하여튼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90년도 후반에 그는 4장의 앨범을 냈다. 1집에 실린 노래와 그 후 틈틈이, 타인의 이름으로 알게 모르게 발표하였던 주옥같은 노래들을 묶은 앨범이었다. 한국 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이다. 더욱 저음으로 변한 목소리, 다소 냉소적이며 음유하는 듯 한 목소리는 그가 가수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불리 게 한 이유임이 틀림이다.


몇 년 전 겨울 나는 둘째를 데리고 강원도 화천으로 그냥 하릴없이 드라이브를 간 적이 있었다. 늦은 오후였다. 강 건너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낮은 집들 굴뚝에서 '파란 실오라기' 피어오르고, 어디선가 송아지 우는 소리와 '백구'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때 김민기의 이 노래가 입가에 맴돌았다.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학교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오네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지을라 내다 보실라... -식구생각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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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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