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최동원 - 2

인물 2012. 6. 12. 08:18

1979년은 그에게 불행과 행운이 겹쳐지는 한해였다. 봄철 대학리그 중 복학생 박철순에게 일명 '빳다사건'이 일어났다. 그 당시에는 선배한테 빳다를 맞는 것은 일상이었기 때문에 팀이나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지 않았지만, 그 사건은 최동원의 증언에 의하면 정도가 조금 심했다고 한다. 하여 최동원은 팀을 이탈하여 몇 개월 태업을 한다. 연세대와 야구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그는 몇 개월 후 팀에 합류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최동원은 그 해 경기에 등판하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그의 어깨를 조금이나마 보호하는 계기가 되었다. 뜻하지 않은 태업은 정신적으론 힘들었지만 육체적으론 달콤한 휴식이었다.


1980년은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잠시 휴교령 등으로 대회에 차질이 있었지만 그래도 경기는 이루어졌다.


그 해에도 최동원은 꾸준히 각종 대회에 등판하여 완봉과 완투와 탈삼진 등을 낚았다. 78년의 살인적인 연투는 없었지만 그래도 타 팀의 에이스 보다는 많은 경기에 등판을 했다. 봄철 대학야구대회에서 방어율상을 받았고, 백호기대회 1회전에서 당대의 최강팀 상무를 맞아 1대0 완봉승을 이루었고, 가을 대학야구선수권에서도 결승전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3대0 완봉승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세계선수권대회와 한미대학야구선수권에도 출전하여 활약을 했다. 국가대표에는 그 당시 국민적 에이스였던 이선희가 대단한 활약을 하고 있었고, 대학대표에서는 같은 4학년생 김시진과 김용남이 뒤늦게 좋은 피칭을 하였던 관계로 상대적으로 최동원은 그다지 눈에 뛰지 않았다. 사실 그때부터 그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렇게 최동원의 고교와 대학에서의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잠시 여기서 그의 기록을 총 정리해보겠다. 자료는 동아일보에서 따왔다.


경남고 재학 32경기 19승 9패 66사사구 306탈삼진 34자책점 그리고 방어율 1.04


연세대 재학 134경기 70승 25패 190사사구 909탈삼진, 143자책점 1.62방어율


연세대 시절 기록을 잠깐 분석해 보면, 이닝은 약 794이고, 3학년 때의 몇 경기는 없는 것으로 볼 때 연간 평균 44게임에 등판하여 평균 약 6이닝을 소화했고, 이닝당 탈삼진 비율은 1.14개이다. 그리고 게임당 사사구도 2개뿐이 안될 정도로 제구력이 뛰어났슴을 알 수 있다. 또한 방어율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야구선수는 남는 게 기록인데, 이런 기록은 사실 좀 난감하고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국제대회까지 합했을 때의 등판 횟수는 살인적이 아닐 수 없다. 이게 가능한 기록일까. 연간 264이닝...


드디어 야만의 1981년이 온다. 그해는 프로야구 출범을 위한 마지막 아마추어 시절이었다. 따라서 시험운영 차원에서 실업대회는 프로야구 리그 시스템으로 치루어졌다.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누었고, 각 리그 우승 팀이 최종 코리안시리즈를 벌이는 시스템이었다. 1982년 원년 프로리그 시스템과 거의 동일했던 것이다.


그해 최동원은 우여곡절 끝에 롯데에 입단한다. 롯데는 1975년에 창단되어 세미프로라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던 팀이었고 당연히 다음 해에 프로야구 원년 부산을 연고지로 하는 팀으로 예약을 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롯데는 부산이 낳은 최동원을 간절히 원했다.


하여튼 그는 전기리그부터 눈부신 활약을 한다. 그 결과 롯데는 13승 2패로 1위를 하여 코리안시리즈에 직행한다. 기록을 보자.


놀랍게도 최동원은 혼자 전기리그에 12승, 후기리그엔 봐줘서 5승을 책임진다. 팀이 소화한 324이닝 중에 그가 206이닝을 던진다. 60% 이상을 한 선수가 던진 것이다. 그리고 후기리그 1위팀인 상무와 5전 3승의 코리안시리즈를 벌인다. 이 또한 기록을 보자.


10/25일 1차전 9이닝 3실점 0대3

10/26일 2차전 7이닝 무실점 4대5

10/27일 3차전 6이닝 3실점 6대6

10/29일 4차전 7이닝 3실점 7대4

10/30일 5차전 3이닝 무실점 5대3

10/31일 6차전 9이닝 4실점 6대4


6전 3승 2패 1무의 전적으로 롯데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다. 그리고 당연히 최동원은 전 게임에 등판했고 결국은 마지막 게임에선 완투까지 한다. 얄궂게도 신은 3차전을 무승부로 만들어 한 게임을 더 등판하게 만들었다. 그게 그의 운명인지 모른다. 사나운 팔자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그 당시 롯데 감독은 박영길이었다.


사실 81년의 실업야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프로리그의 전초전격이었기 때문에 그냥 워밍업 정도로 경기를 하더라도 책임을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리그에서 우승을 하더라도 야구사에 중요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 아마추어 시즌 우승이 무슨 명예가 있겠는가. 야구 광팬들도 1981년은 존재성이 미약하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롯데는 최동원에게 연투를 원했다. 오직 승리를 위해, 공장에서 과자를 생산하듯 최동원을 등판시키고 승리를 따낸다. 그는 팀이 원하는 데로 역투와 연투를 하며 팀의 승리에 자신을 불사른다. 자신의 어깨가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던지고 또 던졌다. 과연 누구를 위해 던지는지, 자신을 위해선지 팀을 위해선지, 그는 승리를 위해 자신을 장렬히 산화시켰다. 그런 현상을 우리는 혹사라고 한다.


롯데는 잔인했다. 그해뿐만 아니라 프로리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승리를 위한 욕망은 마치 기업의 포식성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승리의 욕망에 최동원은 결국 무너졌다. 팀은 선수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선수는 몸이 생명이기 때문에 혹사를 시키면 인간적 도덕적으로 용서 받을 수 없다. 최동원은 한참 후 인터뷰에서 그 당시에는 그런 연투가 당연했노라고 담담히 받아주었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살인적인 연투는 인간적인 면에서 결코 용납이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인간적인 냄새가 안 난다. 그런 비인간적인 선수 기용의 최대 희생자가 바로 최동원이다. 롯데도 미치고, 최동원도 미쳤다. 광기의 시대였다.       

 

식자들이 말하기를 최동원의 전성시대는 75년부터 81년까지라고 한다. 프로야구에서 뛴 8년은 덤으로 얻은 결과물이라고도 말한다. 특히 선수회 사건으로 왕따를 당한 마지막 3년을 뺀, 83년~87년 롯데에서의 5년 기록(89승, 5년 연속 200이닝, 903탈삼진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레전드급 성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구 프로에 가기 전의 그를 더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투수였는지를 말해준다. 아마추어 마지막 시절과 프로의 태동기에 그가 야구계를 지배를 했고, 그가 있음으로 해서 야구는 존재했다.


그리고 식자들은 또 이렇게 가정을 한다. 최동원이 1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우리나라 프로야구 지평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박찬호가 있기 전에 최동원이 있었을 것이고, 선동열이 있기 전에 최동원이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250승은 물론이고 300승을 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전설로 남았다. 불꽃처럼 선수생활을 했던 그는 이제 신화가 되어 우리의 기억에 저 하늘의 별처럼 자리를 잡았다. 한때 대단한 야구선수가 있었노라고 후대에게 말해줄 신화를 그는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래, 그는 진정한 이닝이터이며, 화이어볼러였다. 한 경기와 한 시대를 지배했던 진정한 화이어볼러였슴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동시대를 함께 한 나는 행복했노라고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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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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