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는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인간과 함께 이미 석유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신은 석유를 모두 땅속 깊이 숨겨두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르고 생각만큼 인간들이 세상의 질서를 확립해 나갈 무렵에 신은 은밀하게 역청우물을 만들어 석유를 인간에게 노출시켰다. 그 석유를 인간들이 어떻게 다룰지 넌지시 지켜볼 심사였는지 모른다.

인간은 처음 시꺼멓고 뜨겁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그 역청을 쓰잘머리없는 물질로 여겨 기피하였지만 1만 년 가까이 흐른 현재는 석유의 분자구조를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 지구상의 그 어떤 물질보다도 이처럼 다양하게 다룰 수 있는 광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의 기대 이상으로 영리했던 것이다.

아마도 석유라는 물질이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전에 문자로 기록된 것은 기독교 '구약성서'일 것이다. 비록 역사가들에 의해 공인을 받지 못하는 기독교 경전에 나오는 대목이지만 그렇더라도 구약성서가 구전으로 내려오다 문자로 작성된 객관적인 기록을 토대로 볼 때 결코 다른 문명보다 시간적으로 뒤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바로 노아의 방주 이야기이다.

3년 전 러셀 크로우가 주연한 <노아>라는 영화가 있었다. 신의 계시를 받은 노아가 거대한 방주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전나무를 잇대어 방주의 형태를 만든 다음 역청을 그 잇댄 나무 틈 사이를 매우고, 또한 역청을 솥에 끓여 방주 표면에 바르는 장면이 세밀하게 묘사된다.

물론 방수와 접착이 그 목적이었다. 구약성서 창세기 6장에서 신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전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그 방주에 작은 방들을 만들고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하여라." 그리고 방주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 등을 구체적으로 일러주신 신은 자상하게 지붕의 높이와 문의 위치까지 정해주시고 마지막으로 3층으로 만들 것을 당부하신다.

역으로 추정해 보자면, 역청이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방주를 만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애시당초 노아의 방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을 물로서 멸해야 한다는 신의 계획은 차질이 생긴다. 난감해진 신은 노아를 홍수로부터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많은 고민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성경에서는 물론 역청의 존재는 인간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아가 600살 때 홍수를 겪고 350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셀부터 시작해 아브라함까지 족보를 들여다보면 그 시간은 3000년 정도가 된다. 아브라함 이전 3500년 전에도 역청이 존재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 전의 사람이니까 도합 기원전 5500년 전에도 역청을 진흙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위에서 계산한 시간은 비록 역사서가 아닌 성경에 나오는 수치여서 역사적인 의미가 없다고 손사래를 칠 테지만, 이미 기원전 5500년이면 수메르 문명 초기 정도가 되고 그때 이미 역청을 사용한 흔적이 여러 유물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추론해 볼 때 노아의 방주가 만들어진 기원전 5500년이라는 시기가 합리성을 배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노아의 자손 아브라함은 구약에서도 나오듯이 수메르의 중심인 우르에서 태어나 수십 년을 살다 아버지인 테라를 따라 북쪽 하란으로 이주를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시조인 노아도 그 수메르 지역에서 살았음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과 노아의 방주를 결부시키려는 이유는 역청이 이미 기원전 5500년 전에도 귀한 물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미 7500년 전부터 역청은 인류 문명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수메르인 이전의 인간은 연못처럼 지상에 노출되어 유황과 함께 역겨운 냄새를 뿜어대는 시꺼먼 물체를 어떻게 보았을까. 더 올라가면 호모사피엔스 시대의 인간은 살아 꿈틀거리며 숨을 토해내는 그 검은 물체를 보고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그 물질은 마르지 않고 수천 년 동안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신비롭고 두렵고 혹은 주술적인 대상은 아니었을까. 그 표현을 고대 문헌에서 보면 '악마의 배설물' '죽은 고래의 피'라고 적시하고 있다고 한다.

역청을 광범위하게 사용한 문명은 바빌로니아다. 도시국가인 수메르에 유입되어 함께 생활하던 아모리인이 터줏대감 수메르인을 몰아내고 바빌로나아라는 제국을 세웠다. 매우 영리했던 그들은 수메르인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은 물론 더 나은 문명으로 계승 발전시켰다. 그 중에 하나가 역청이었다.

지구라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빌로니아에는 암석이 거의 없어 이집트와 달리 크고 작은 건축물을 지을 때 진흙으로 만든 벽돌을 사용했다. 지금의 조적작업과 같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놀랍게도 접착제의 일종인 모르타르용으로 진흙을 사용하지 않고 역청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진흙보다 접착력이 더 우수하고 물로 비벼야 하는 번거로움이 덜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업성이나 가성비가 뛰어났고, 매장량도 풍부했다는 것이리라.

또한 그들은 역청으로 노아가 그랬던 것처럼 방수재로도 사용했다. 유프라테스 강이 범람할 때 수위가 성벽을 차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때마다 강물이 성벽을 침투하여 성안으로 물이 스며나오곤 했는데, 그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은 성벽 안과 밖 사람 키 정도 될 높이까지 역청을 녹여서 발랐다. 현재도 3000년 이전의 방수공법 즉, 건축물의 지층부위 외벽에 아스팔트를 녹여서 바르는 공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그 당시 지구 최고의 도시 바빌론의 유적지에 가보면 그 흔적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들은 범위를 넓혀 역청을 성 안 도로 위에도 도포를 했다는 것이다. 바닥에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역청을 발라 요철 부분을 없앤 것이다. 지금도 바빌로니아 유적지에 가면 말라비틀어진 굳은 역청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현재의 아스콘 포장에 비하면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그 당시에 이미 도로용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식의 대전환이 아닐 수 없었다. 역청의 쓰임새가 현재나 그 당시나 그 목적과 개념이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작가들은 공중정원에 대해 자세히 기술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정원의 계단식 테라스에는 돌로 발코니를 만들어 씌우고, 그 위에 갈대와 역청·납 등을 층층이 쌓아 관개수가 새나가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역청을 건축토목용으로 매우 다양하고 유용하게 사용을 했으며 또한 의학용으로도 사용한 흔적을 각종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상처의 피를 멈추게 하는 지혈제와 열을 내리게 하는 해열제로도 사용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에겐 현대의 바셀린이나 아스피린 정도의 보편적인 상비약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해본다.

시꺼멓고 역겨운 유황 냄새가 나는 역청을 먹는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지만 그런 인식은 현재를 사는 우리의 편견인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약 속에 석유화학물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민간요법으로 사용한 그들의 비과학성을 감히 폄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노아의 후손인 이집트인도 역청을 유용하게 사용을 했다. 미이라라는 단어가 역청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 '무미아이'에서 나왔다고 하듯이 미이라를 만들 당시에는 이미 역청이 방부재용으로 미이라 제작의 필수적인 재료였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증거 또한 박물관에 있는 수많은 이집트 미이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간난아이 모세를 나일강에 태워 보낸 광주리 표면에도 역청을 도포했다는 기록이 구약에 나온다.

이집트에서도 역청의 쓰임새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유적이나 문헌을 볼 때 그 지역에서는 바빌로니아처럼 우물 형식의 역청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매우 귀한 물질이었다는 것이다. 내세로 가는 파라오에게 마지막으로 선사할 정도로 이집트에서의 역청은 황금처럼 귀했는지 모른다. 바빌로니아에서는 그리 비싸지 않은 역청은 마주 먼 거리를 이동하는 무역상에 의해 이집트에서는 고가로 팔렸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대가 지나고 중세에 접어든 6~7세기 무렵 역청은 또 다른 형태로 역사 앞에 나타난다. 동로마제국, 즉 비잔틴제국 시절 가톨릭 성인 중에 한 명이며 역사가인 테오파네스가 지은 연대기에 보면 그리스 공학자 칼리니쿠스가 '그리스의 불'이라는 무기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형 화염방사기 같은 형태의 무기로서 그것을 배에 설치하여 사용하였으며, 지중해의 여러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특히 당시 육상에서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페르시아는 해전에서 만큼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페르시아 해군에게는 불을 뿜어대는 그 위용이 신화속의 용처럼 범접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액체연료의 구성분 중에 하나가 역청이었다. 성분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황, 염초, 역청이 주성분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그리고 역청은 그 당시 육상 무기의 일원으로서도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공성전(성을 공략하는 전투)의 주력 무기인 투석기 포탄의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중세 때를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를 보면 투석기로 날려 보내는 불폭탄을 볼 수 있는데, 그 포탄의 재료 중에 하나가 역청이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네이팜탄과 같은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또한 개인 병기로도 사용되었다. 일종의 수류탄이었다. 사람의 던질 수 있는 항아리에 역청 화합물을 넣고 불을 붙여 던지면, 그 불붙은 항아리가 어떤 물체에 부딪혀 충격을 받아 폭발하는 것이었다. 항아리가 깨지는 충격파로 물리적인 에너지가 증폭되는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이나마이트처럼 역청을 나무통에 담아 심지를 꽂고 불을 붙여 투척했으며, 영화에서 많이 보아왔듯이 일명 불화살의 재료로도 사용했다. 현재의 수류탄처럼 위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최신최강의 무기였다고 한다.

석유를 이용한 소이무기류는 중국에서도 명확하게 등장한다. 송나라 시절 맹화유궤라는 무기가 그것이다. 맹화유는 주위 환경과 맞물려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되어 유전에서 채취된 일종의 나프타 같은 기름이며 송나라 시절 꽤 인구에 회자되고 있던 물질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맹화유를 베트남이나 서역 등 주변국에게서 조공으로 받아오던 송나라는 석유의 쓰임새를 뒤늦게 파악하고 자국에서 직접 탐사 채굴하기 시작했으며 그즈음해서 '그리스의 불'과 흡사한 명화유궤라는 독특한 소이무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다만 그리스 불처럼 전함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육상 전투에서 마차에 실고 다니며 사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가공할 만한 신무기였다. 현재의 화염방사기와 흡사하다. 화약으로 점화하고 공기를 압축하는 방식으로서 기록에 의하면 화염이 100m 가까이 날아갈 정도로 그 성능이 그리스의 불보다 대단히 위력적이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석유란 단어는 10세기 북송 때 이빙이 쓴 잡학서 태평광기에 처음 나왔다고 한다. 석유라는 존재가 처음 석칠이란 이름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그보다 약 900여 년 이전 1세기 때 후한의 반고가 지은 한서다. 그 역사서에는 "고노에는 불이 붙는 유수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유수가 석칠 곧 석유인 것이다. 또 다른 역사서인 송나라 법엽의 후한서에도 석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천이라는 지방에 유전이 있고 그 물질을 수레바퀴나 물레방아의 바퀴의 연결축에 윤활유로 사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밖에도 석유는 중국 고서에는 화유, 웅황유, 석지, 석화유, 수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 중에 위진 남북조시대 기록에는 석유가 의학적으로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11세기 송나라 때 관료였던 심괄이라는 사람이 늘그막에 몽계라는 지역에 머물면서 쓴 <몽계필담>이란 일종의 잡학서 형식의 책을 지었는데, 그 책에 보면 석유의 채집과정이 기록되어 있고 무엇보다 먹에 대해서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석유를 태우면 검은 연기가 오랫동안 하늘을 뒤덮었으며 타고 남은 재로 먹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먹은 질이 아주 좋아 미래에 널리 유행할 것이라고 예찬을 했으며 또한 석유는 땅 아래에서 무한정 샘솟아 고갈될 염려가 없다고 덧붙였다.

놀랍게도 역청 이야기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들을 수 있다. 캘리포니아 남쪽 채널 아일랜드에 사는 원주민들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역청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 원주민들은 그 당시부터 역청으로 무기와 요트 등을 만드는 데 이용하였고 무엇보다 나뭇껍질로 병의 형태를 만든 다음 그 표면에 역청으로 발라 물을 보관하는 병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방수를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국립공원인 채널 아일랜드와 육지 부근에 해저유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지역에서는 옛날부터 석유가 사람과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석유는 19세기 정제 기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전까지 불특정 지역에서 제한적인 목적으로 이용했을 뿐 보편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고대근동 문명권에서 나름 활발하게 이용을 했지만 그 문화가 사라진 이후에는 인간들에게 그닥 필요한 물질은 아니었다. 결코 상쾌한 이미지의 물질이 아니었던 석유를 값싼 등화용 연료로 사용도 해보았지만 정제되지 않는 석유는 그을음이 많아 대중화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석유의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 인류는 2000년 이상을 석유의 암흑기를 보냈다.

지구의 문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19세기에 인간은 석유에서 보다 깔끔한 등유를 정제해 내기에 이르렀다. 초보적인 정제 방법으로 만들어진 등유는 식물과 동물에서 채취한 기름에 비해 그을음도 없고, 오래 타고, 값도 비싸지 않았다. 등화용으로 가장 적합한 재료였다. 바로 그 이전 가장 좋은 등화용 재료였던 고래기름을 순식간에 퇴역시킬 정도로 등유는 획기적인 조명용 연료였던 것이다. 만약 등유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고래는 멸종되었을 것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그만큼 고래기름은 산업적으로 활황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그 등화용 원유를 생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바로 유전이 풍부한 미국이었다. 석유를 대량으로 채굴하는 시추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등유를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탐욕의 상징인 록펠러가 있다. 하여튼 그 당시는 아직 에너지용으로서의 석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시기였다. 불과 150년 전에 말이다.

석유는 인류의 문명과 어떠한 형태로든 함께 해 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재 21세기에서의 존재가치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석유는 빙하기가 끝난 일만 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 애환을 겪어왔다.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리 존재했을 뿐이지 잊혀지고 사멸된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류문명의 지근거리에서 작은 가치를 유지해 오던 석유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20세기 들어 그 먼 옛날 수메르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된다.

 

오마이 뉴스 기고 2017. 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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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