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용문산에서 멧돼지 떼와 조우한 적이 있었다. 정상을 거쳐 용문계곡으로 하산하던 나는 잠시 너덜바위에 앉아 쉬고 있었다. 겨울철이고 계곡 상층부여서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정정을 깨는 소리가 계곡 건너 급경사면에서 들려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보아 아마도 등산객이 길을 잃고 헤매다 계곡으로 탈출하는 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내 짐작이 틀렸다는 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유롭게 쉬고 있는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바로 멧돼지 떼였다. 그 소리의 주인공이 멧돼지였던 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잽싸게 바위에 몸을 숨기고 그놈들을 보고 있었다. 급경사면을 타고 내려온 10여 마리의 멧돼지 무리가 계곡을 가로질러 반대편 경사면을 타고 일렬로 태평스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크고 작은 놈들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식구인 것 같았다.

그 광경을 숨을 죽이고 보고 있던 나는 스틱을 잡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본능이었는지 모른다. 놈들이 나를 발견하고 덤빈다면 스틱으로 무언가 방어를 해야 하겠다는 막연한 방어본능이었으리라. 스틱에서 손을 땐 것은 그놈들이 능선 경사면으로 사라지고 소리까지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그 긴장감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채, 나는 배낭을 메고 고양이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한겨울 계곡의 냉기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놈들이 나를 발견하고 대치하는 상황이 펼쳐졌다면, 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해보니 정말 등골이 오싹했다. 홀로 어떻게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10여 마리의 멧돼지와... 끔찍했다.

1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서도 발견된 멧돼지

요즘 산에 다니다 보면 멧돼지 흔적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5~6년 전부터 간헐적으로 띄었던 그 흔적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요즘은 가는 산마다 안 보이면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그 흔적은 산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는다. 전에는 해발 800~900미터 이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요즘은 1000미터가 넘는 고지대에서도 당연한 듯이 발견된다. 이런 현상은 경기도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있는 산에서 목격한 것이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대개의 등산객들은 일주일 동안 각박한 일상에 찌들어 살다가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 산에 가는데, 사실 산에서 멧돼지들이 헤집어놓고 간 흔적을 접하고 또한 배설물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썩 개운하지 않다. 몸은 힘들더라도 무언가 신선함과 상쾌함을 추구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어질러져 있으니 찝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야생 동물처럼 조용히 다니면 흔적이 별로 없으니 신경 쓰이지 않지만 그놈들은 덩치가 크고 10여 마리 정도 떼를 지어 다닌다. 속성상 계속 땅을 파헤치면서 이동을 하고 또한 배설물들을 쏟아대며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이런 거친 의식과 행위들이 놈들의 영역 표시의 일종인지 모른다.

놈들은 산이 자신의 앞마당인양, 등산객들이 한적하게 좀 쉴 만한 공터에서는 정말 광란의 파티를 연 듯이 땅을 초토화시켜 놓는다. 어미는 뿌리를 찾기 위해 무자비하게 땅을 파헤치고 새끼들은 자기네들끼리 먹이 쟁탈을 위해 뒹굴며 싸우고, 때론 발정기가 된 거대한 수놈이 암놈과 괴성을 지르며 교접을 한다.

인간이 만든 등산로를 이용하는 멧돼지, 놀랍다

 2017년 3월 중원산 중원계곡 상류
 2017년 3월 중원산 중원계곡 상류
ⓒ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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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그놈들은 인간이 만든 등산로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놈들은 매우 영민하여  산에서는 이동 환경이 좋은 등산로를 자신의 동선과 영역선으로 삼아 이동한다. 강원도 사명산에서는 들머리부터 시작해 거의 정상부까지 그 흔적이 등산로를 따라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린다. '녀석들은 인간보다 영리하여 인간이 닦아 놓은 길을 코도 안 풀고 편하게 다니지. 인간과 멧돼지는 산에서 만큼은 서로 공존한다는 거야.'

2년 전 춘천에 있는 용화산에 갔을 때는 멧돼지 때문에 왕짜증을 낸 적이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능선의 등락으로 인해 지친 몸을 멈추고 충전을 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멧돼지들이 파헤쳐 놓은 흔적 때문에 쉴 공간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 능선 등산로를 따라 이어진 흔적은 아마도 수십 마리 떼가 이동하면서 파헤쳐놓은 듯했다. 산에 가면 개고생을 감수하는 등산객이라 하더라도 대충 쉬기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가도 가도 쉴 만 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 지친 나는 할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멧돼지들이 놀던 곳에 의자를 펴고 앉아 시큼한 오물 냄새를 맡으며 물과 간식을 먹었다. 푹푹 찌는 한여름 오후였다.

그리고 두 달 전 가평에 있는 석룡산 수덕바위봉 부근에서도 멧돼지 흔적 때문에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다. 도마치 고개에서 시작해 겨우내 내린 눈이 능선을 따라 계속 이어졌고 희미한 발자국 몇 개만이 사라졌다 이어졌다 반복하고 있었다.

거의 러셀(앞서 가는 사람이 눈을 다지면서 길을 만들며 나아가는 것)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홀로 산속 깊이 들어가다가 수덕바위봉 앞에서 절벽 같은 된비알을 접하고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옆구리 경사면으로 희미한 발자국 2개가 보여 그 방향으로 조건반사적으로 발길이 움직였다.

대개 이런 경우는 결말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다. 희미한 발자국을 쫓아 러셀을 하며 힘겹게 전진하다가 멧돼지들이 파티를 벌인 곳을 산악회에서 쉬었다 간 자리로 착각을 한다. 그 발자국까지 따라가다 이리저리 헤맨다. 몸은 지치고 악전고투를 하다가 겨우 능선등산로를 만났다. 해발 1100미터 이상이었다. 눈 속에서도 그놈들은 활개를 치고 다닌 것이다.

언젠가부터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멧돼지

 2017년 2월 석룡산
 2017년 2월 석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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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산에서 멧돼지 흔적을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개체수가 극소수였기 때문에 강원도 산골이나 휴전선과 가까운 전방지역에 가야 겨우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20여 전 일 것이다. 그 당시 멧돼지고기가 한창 유행이었다. 돼지고기보다 육질이 부드럽다고 하여 전 국민적 호황을 이루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연히 사육하는 축산농가가 급격히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열풍은 오래가지 못하고 식어갔다.

그리하여 그 당시에 사육하던 멧돼지는 애물단지가 되었고, 마침 자연환경 복원차원에서 지리산에 반달곰을 방출하는 등의 야생동물 증가 운동이 일어나 그것을 빌미삼아 사육하던 멧돼지를 산으로 방출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그 당시 방출된 사육 멧돼지들이 강력한 종족보존능력을 발휘하여 기하급수적으로 개체수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낙동강에 범람하는 뉴트리아가 처음에 그랬듯이 말이다. 

대한민국 야생에서 멧돼지의 천적은 없다. 멧돼지 정도 되는 동물의 천적이 되려면 불곰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런 놈들이 번식력 또한 어느 동물보다 왕성하여 한번에 10마리 이상 낳는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아마도 수십 배는 증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적도 없고 번식력도 왕성한 그놈들에게 이 대한민국 산야는 그야말로 천국인지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생태계는 정상적일 수 없다.

더구나 놈들은 잡식성 동물이어서 자연도태설과는 거리가 멀다. 다른 육식동물들은 생태계의 비정한 적자생존 법칙을 적용받지만 멧돼지는 무한대로 널려있는 나무의 뿌리를 캐먹는다. 영악한 놈들은 산 아래로 내려가 농작물을 파먹으면서 안온한 생존을 유지한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인과응보

사실 멧돼지의 농작물 피해는 심각하다. 마침 2017년 3월 31일자 연합뉴스에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

"지난해 경기도내 농작물에 피해를 준 유해 야생동물 1위는 '멧돼지'가 차지했다. 전년도 피해 동물 1위였던 '까치'는 3위로 밀려났다."

"동물별 피해 규모는 멧돼지가 6억1천700여만원으로 1위를 차지했으며, 고라니가 3억8500여만원, 까치가 2억7700여만원, 오리류가 6100여만원, 청설모가 4100여만원 순이었다."

"지난해 전체 야생동물 피해액이 전년도보다 감소했는데도 멧돼지 피해액은 오히려 전년 5억2700여만원보다 9천만원(17.1%) 늘어났다."

멧돼지 피해액이 6억 원 이상이라고 하는데, 그 금액은 화재 피해액 계산처럼 현 물가를 적용하는 관계로 실제 체감 피해액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신고를 하지 않은 농가가 훨씬 많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16년 8월 용화산. 그물망에 구멍이 나 있다.
 2016년 8월 용화산. 그물망에 구멍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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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위에서 보듯이 1위 멧돼지와 2위 고라니와는 거의 2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까치 오리류 청설모 등이 뒤따르는데, 중요한 것은 멧돼지 피해액이 전년도에 비해 17% 이상 늘어났다는 것이다. 멧돼지 이외에는 자연법칙에 따라 수십 년간 일정 수준의 개체수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할 요인이 적지만 천적이 없고 잡식동물인 멧돼지는 그 정도가 심각하여 사회적 부담 등을 따져볼 때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될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몇 년 전부터는 농작물을 해치는 것은 물론 주택가나 도심지에도 출몰하여 포획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자동차에 치여 로드킬이 발생하는 경우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북한산에서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80kg짜리 멧돼지가 광화문에 출몰했다가 택시에 치여 죽은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서울시 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현재 북한산국립공원에는 약 120마리의 야생멧돼지가 살고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출몰횟수도 2011년 43건, 2012년 56건, 2013년 135건, 2014년 185건, 2015년 364건, 지난해 548건 등으로 해마다 크게 증가하는 추세다."

사실 위에서 말했듯이 멧돼지들이 자연의 일부라고 하기엔 너무나 사람 손을 많이 탔다. 결코 대자연을 대하는 선한 마음으로 놈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멧돼지를 환경이나 대자연이란 개념에 포함시켜서 논리를 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고 동물보호주의의 잣대를 가지고 인간과 공존을 모색하는 것 또한 국민적 공감대를 갖기 어렵다. 자의든 타의든 이미 유해동물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사육되고 버려지고 하면서 결국은 전혀 생각지도 않게 멧돼지에게 곤욕을 치르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인과응보인지 모른다. 분노한 멧돼지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다. 놈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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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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