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최동원 - 1

인물 2012. 6. 11. 08:46

1976년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결승에서 경남고는 막강 타선을 자랑하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를 상대로 탈삼진 20개를 만들어낸다. 27개의 아웃카운터 중에 20개를 탈삼진 처리했다는 것은 어메이징한 사건이었다. 그 전에는 지역 예선전에서 삼진 20개가 나오는 경기가 몇차례 있었지만 본선에서, 그것도 결승에서 삼진을 그렇게 많이 잡아낸 투수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바로 최동원이다.


금태안경에 다소 건방져 보이고,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을 가지고 있던 그는 경남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1975년 가을, 전국대회 4강 이상 상위팀들이 초청된 전국우수고교초정대회에서 그는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전무후무한 17이닝 노히트 게임을 이룩해낸다. 경북고를 상대로 9회 노히트 그리고 이틀 후 선린상고를 상대로 8회까지 노히트, 그렇게 17닝 노히트 게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무슨 만화 같은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놀라운 강속구와 함께 아버지가 만들어주었다는 그의 특이한 투구 동작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야구 교범책에도 없는 특이한 폼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팔에서는 강력한 속구가 쉬지 않고 계속 만들어졌다. 그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일명 트로이카 시대를 연 김시진, 김용남, 그리고 최동원은 1976년 고교야구를 3분활하고 있었다. 그 중에 최동원은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의 불같은 강속구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마구와 같은 구종이었다. 역동적인 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속구로 삼진을 잡아내는 장면은 또 다른 야구의 묘미를 만들어주었다.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센세이션이었다.


햇병아리인 그가 그런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신화 같은 얘기지만 그 당시 그런 현상은 당연했다. 그만큼 고교야구 인기가 대단했다는 방증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가 고교야구의 인기가 정점이었을 것이다. 실업과 대학야구는 무료 입장을 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지만 고교야구는 항상 만원이었고 라디오 중계방송을 하는 유일한 종목이었다. 이런 기현상이 결국은 수많은 인재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단초가 되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에서 혹사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세대에 입학해서 식지 않은 강속구를 계속 뿌려댔다. 연세대에 입학한 그해 봄, 그는 대학야구 결승리그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탈삼진 16개를 잡아내며 화려하게 신고식을 한다. 그 후 그는 팀의 에이스로 수많은 대회에서 23연승을 하는 등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발휘하였으며, 국가대표에도 선발 되어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대한민국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는 한마디로 명불허전이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아래에서 열거하겠다.


그의 강속구는 빠르면서도 강력했다. 그가 연세대 재학시절 한양대 야구장에서 연습게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우연히 그의 투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에겐 행운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떠난 공은 굉음과 바람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포수 미트로 빨려들어 갔다.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괴물 같았다. 빠른 것은 물론이고 한마디로 위력적이었다. 저런 공을 인간이 던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의 투구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들 탄성을 토해냈다. 역시 최동원이었다.


연세대 시절과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까지 그는 모든 타자의 공공의 적이었다. 그 당시 대학 야구에는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즐비했다. 장차 프로야구를 이끌어 갈 고수들이 한창 주가를 오르던 시기였다. 더구나 실업에서 잘 나가던 선수들도 대학에 진학하여 대학야구는 야구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봉연, 박해종, 김일권, 장효조, 이만수, 김한근, 김성한, 조종규, 박종훈, 이광은, 김시진, 김용남, 임호균 등등 새 시대를 열 스타급 선수들이 즐비했다. 그 중에 최동원이 있었으며 군계일학이었다. 그들은 최동원의 공을 쳐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특히 77년 최동원이 1학년 때 연세대는 대학 각종 대회 4개를 쓸어 담는다. 그 당시 연세대에는 복학생 김봉연, 기업은행에서 온 박해종, 이광은, 신언호 등의 좋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최동원이 없었으면 4관왕은 감히 엄두를 못 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양대라는 막강한 팀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한양대는 불행했다. 김시진, 김용남, 장효조, 이만수, 김한근, 김일권, 허규옥, 오대석 등 화려한 맴버 구성은 전관왕을 하여도 모자랄 팀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최동원이 버틴 연세대에는 기를 쓰지 못했다. 아마도 최동원이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그해 대학야구는 분명 한양대가 평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엔 실업팀과 대학팀이 함께 출전하는 백호기 대회가 있었다. 월래는 실업야구 대회였는데 인기가 너무 없어 고육책으로 성인대회라는 미명하에 대학팀을 참가시키고 있었다. 77년 그해 백호기 1회전에서 연세대는 실업야구의 최강팀인 한국화장품과 1회전에서 맞붙는다. 


당대 최고의 팀이 맞붙은 것이다. 대학의 최강 연세대와 실업의 최고수 한국화장품, 그리고 그 팀에는 최동원과 그해 타격 7관왕에 빛나는 김재박이 중심에 있었다. 김재박이 누구인가. 유격수면서 구원투수였고, 타격 또한 동방불패 당할 자가 없는 전천후 슈퍼스타였다. 한마디로 괴물이었다. 그런 김재박과 최동원이 드디어 승부를 하는 초유의 경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결과는 연세대가 4-6으로 패한다. 대학야구에서 연투하느라 지쳐있던 그는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최동원은 김재박과 두 번째까지는 완승을 하지만, 3번째 대결에선 아쉽게도 적시 2루타를 맞는다. 최동원은 4실점 후 7회 투아웃까지 잡고 이광은으로 교체 된다. 두 선수의 대결은 무승부 정도는 되지만, 팀은 7회에 구원 등판한 이광은이 9회말에 김재박 한테 굿바이 투런홈런을 맞고 패했다.


그럼 최동원의 활약상과 기록을 간단히 집고 넘어가겠다.


78년의 그의 투구는 더욱 빛을 발한다. 먼저 백호기대회에서 연세대는 결승에 올라 박철순이 버티고 있는 공군에게 패하여 2위를 한다. 물론 최동원은 연투를 한다. 상업은행을 이긴 후, 준준결승에서 한일은행을 상대로 탈삼진 13개를 잡으며 완투를 하고, 준결승에서는 최강 경리단을 맞아 1안타 완봉승을 따내고, 결승에선 0대2 완투패로 분루를 삼킨다.


놀라운 연투는 계속 이어진다. 그해 대통령기쟁탈 전국야구선수권대회에서 그는 4경기, 그러니까 전 경기를 지배한다. 당연히 팀은 우승한다. 간단히 기록만 옮겨 놓겠다.


영남대 - 6회, 투구수 78, 피안타 1, 사사구 1, 탈삼진 7, 자책점 0

동국대 - 9회 투구수 126, 피안타 3, 사사구 4, 탈삼진 9, 자책점 0

동아대 - 18회, 투구수 216, 피안타 5, 사사구 2, 탈삼진 19, 자책점 0

성균관대 - 9회, 투구수 159, 피안타 7, 사사구 2, 탈삼진 13, 자책점 2


동아대와 준결승에서 18회까지 가는 혈투 끝에 1대0으로 이긴 후, 다음날 성균관대를 상대로 3대 2로 이긴다. 모두 최동원이 완투를 했다. 이게 가능한가? 일설에 의하면 결승이 끝난 후 그는 탈진하여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전한다.


그리고 최동원은 국가대표로 세계선수권에 출전하여 작게는 1~2닝 길게는 완투를 하며 거의 전 경기에 등판하였고, 결국은 마지막 니카라과 전에서는 3실점 16탈삼진의 성적으로 완투승까지 한다. 국가대표에서도 그는 당연한 에이스였다.


살인적인 연투, 그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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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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