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4월 20일이었다. 미국 콜로라도주에 있는 루드로 탄광에서 파업을 하던 노동자와 분규를 진압하던 사용자 측 민병대가 무력 충돌하여 그 과장에서 노동자 측 어린이 11명을 포함한 1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루 종일 쌍방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늦은 오후에 노동자들은 화력을 읽고 후퇴를 했다. 그 와중에 지하 반공호에 숨어 있던 11명의 어린이와 여자 2명이 화재로 인한 연기에 질식사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망자 6명은 파업의 리더와 파업 노동자였는데 그들도 민병대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일명 루드로 학살이라 부르는 미국 노조 탄압사의 가장 불명예스런 사건이었다.

사업주인 콜로라도 퓨얼 & 아이언 컴퍼니(이하 CF&I)는 그 당시 기업들이 수십 년 동안 그래왔듯이 야만적 경영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업주에게 원가절감의 가장 좋은 아이템은 노동자의 급료였다. 개인이 하루에 캐는 석탄의 무게에 따라 급료를 책정했고, 그 이외의 광갱작업이나 궤도부설 등에 대해서는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또한 허허벌판에 난민촌 같은 천막들을 지어 노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학교 교회 병원 주택 등은 모두 천막이었다.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는 것은 노동자들 몫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생필품을 파는 매점을 만들어 시중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팔아 이득을 챙겼다. 노동자들의 코 묻은 돈까지 착취한 것이다. 사용자는 최대한의 이익창출을 취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들의 허리를 쥐어짰다.

공간적으로 볼 때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을 하는 탄광노동자들은 이런 처우에 불만이 많았고 노조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더구나 콜로라도 지역 탄광은 안전시설 또한 가장 취약하여 30년 동안 1700명이 안전사고로 사망하였다. 1884년 최초의 탄광 노동자 파업 이후 이런 동요를 잘 알고 있던 사업주는 그런 격앙된 분위기를 상쇄시키기 위해 아시아나 남미에서 더 값싼 노동 인력을 데려와 탄광촌에 투입시켰다. 또한 프락치를 탄광촌에 잠입시켜 노동자 조직을 교란하였으며, 말 잘 듣는 대체 노동자를 충원하여 함께 일을 하게 하면서 집요하게 노동조합 형성을 와해시켰다.

1914년은 노동자와 사용자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있던 시기였다. 어떤 형태든 폭발은 필연이었다. 사회운동가들은 각 주에 노조연합체을 만들고 사업체에 노조를 설립하기 위해 독립운동 하 듯이 노동자들과 접촉하였다. 그 중에 1890년에 조직된 서부광부연합은 기업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지탄의 대상인 CF&I를 타깃으로 노동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루드로 학살이 일어나자 콜로라도주에 있는 탄광 노동자들이 루드로로 집결하였다. 노조연합에서 CF&I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1000여 명의 노동자들에게 총기와 실탄을 배급했다. 그들은 인근 탄광을 급습하여 사무실을 방화하고 각종 시설 등을 파괴하면서 탄광을 폐쇄시켰다. 사용자 측에서도 무장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항했다. 그들은 10여 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노동자 무장봉기였다.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에 연방정부가 개입하여 노조와 민병대를 강제로 무장 해제시키고 그 지역을 봉쇄시켰다. 그 전투에서 199명이 사망하고 400여 명을 구속되었으며 그 중에 322명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다. 일명 '콜로라도 석탄전쟁'이라고 명명된 이 무력분쟁은 미국 역사에 있어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 사건의 직접적 당사자인 CF&I의 오너가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존 데이비슨 록펠러이다. 석유산업을 독식하는 것도 모자라 그는 석탄산업에도 손을 뻗고 있었다. 당시 회사의 경영은 록펠러 2세가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운영자는 존 록펠러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악덕 기업가의 부정적 이미지를 감추기 위해 록펠러는 형식적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이 사건으로 록펠러는 다시 국민적 지탄을 받는다. 그 후에 그는 이미지 쇄신을 위해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남은 20년 인생을 자선사업에 올인한다.

1863년 남북전쟁 중에 곡물상회를 운영하며 짭짤한 수입을 올리던 존 록펠러는 곡물사업을 접고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검은 석유에게서 진한 돈의 향기를 감지한다. 그해 오하이호주 클리블랜드에서 동생인 윌리엄과 석유 정제기술자인 사뮤엘 앤드루스와 함께 기존의 작은 정유회사 5개를 매도하여 회사를 만든다. 석유 채굴사업도 염두에 두었지만 안정성을 확보할 수 없었다. 현재도 그렇지만 탐사와 채굴은 불확실성을 담보로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땅속에 석유가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있더라도 그 매장량이 얼마인지 파보아야 했기 때문에 리스크가 너무 컸던 것이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정유사업이 본 궤도에 올라서자 록펠러는 동생 윌리엄을 뉴욕에 보낸다. 대도시에 회사를 설립하므로 해서 은행과의 여러 가지 업무가 원활하게 유지될 수 있고, 큰 기업과의 교류를 하고 친목을 도모 할 수도 있고, 유럽과의 수출관계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그러한 긴 안목은 추후 회사 발전의 강고한 디딤돌이 되었다. 윌리엄은 존의 요구대로 뉴욕에서 대형 은행의 고위직과 당대 최고의 금융가이었던 J.P 모건과 철도왕 밴더빌트 등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았다.

1870년 석유사업의 가능성을 확신한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이라도 주식회사를 만든다.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당시엔 상호에 자신의 성을 붙이는 게 유행이었지만 그는 달랐다. 상호에 표준, 규범, 윤리, 신뢰 등 좋은 뜻은 다 가지고 있는 스탠더드(Standard)라는 단어를 착안한 것은 등유의 대중적 불안감, 측 화재와 폭발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불식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상호에 그런 뜻이 담긴 단어를 선택한다는 것은 판매 전략의 유연성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주식회사라는 개념이 정착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록펠러는 마치 지금의 다단계 영업처럼 획기적인 방법으로 투자자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주식을 산 투자자에게 많은 배당금은 물론 회사의 부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불안전성을 해소시켰다. 당시엔 회사에 투자를 하였을 경우 그 회사가 경영을 잘못하여 부채가 많아지면 법적으로 그에 다른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 그의 신 개념적인 제안으로 많은 투자자들에게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등유 가격은 일정하지 않았다. 석유회사들은 가격이 내려가면 석유 채굴을 많이 하고, 가격이 올라가면 채굴을 감소시키고 하는 현상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석유시장에서의 가격결정은 다른 산업과 달리 주먹구구식이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원시적인 시장이었다. 한마디로 무식한 놈들이 벌려놓은 신생산업의 한계였는지 모른다. 따라서 석유를 운송해야 하는 철도회사도 매출이 불규칙했다. 거대한 증기기관차를 한번 움직이려면 기본적인 비용이 많이 들며, 그에 따른 일정한 물량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석유량이 감소되는 경우에는 적자 운행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참고로 석유산업에 있어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당시의 방식은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록펠러는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묘책을 만들어 시행한다. 안정적이면서 저렴한 등유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물류 비용을 최소화하는 게 관건이었다. 젊고 당돌했던 록펠러는 당시 대를 이어 철도왕으로 군림하던 윌리엄 밴더빌트을 찾아가 철도 운송가격에 대해 협상을 한다. 매일 열차 60량 분을 보장할 테니 기준가격에서 30%의 리베이트를 달라고 했다. 즉 30%를 할인해 달라는 것이다. 안정적인 매출을 확보하는 대신 30%를 깍아 달라는 록펠러의 획기적인 제안에 노련한 밴더빌트는 승낙을 한다. 이 협상은 스탠더드 오일의 등유값이 당대 최고의 가격 경쟁력을 갖는 계기가 된다. 바로 현재 해운업계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운임할여제(Fidelity Rebate System)였던 것이다.

자금과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 록펠러는 본격적으로 기업 사냥에 나선다. 내세우는 명목은 등유 시장의 안정성을 도모하므로 해서 질 좋고 싼 가격의 등유를 소비자에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것을 곧이 곧 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그 당시부터 가장 싼 가격의 이면에는 노동착취와 경비를 줄이기 위한 물불가리지 않은 기업운영과 독특한 영업 방식과 양육강식의 공격적인 확장 등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고 있었다.

먼저 클리블랜드 주요 은행의 간부들에게 스탠더드 오일의 주식을 헐값으로 양도해주고 경쟁 회사에게는 경제적 지원을 하지 못하게 차단을 도모했다. 그 주식을 가진 은행 간부들은 그 주가가 하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경쟁사들에게 매정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우 교묘한 매수 방법이었다.

1871년 드디어 일명 클리블랜드 대학살이라고 명명한 기업 합병인수 전쟁이 벌이진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그해 12월부터 다음해 3월 사이에 뉴욕, 필라델피아, 피츠버그 등에 있는 정유사 27개를 무자비하게 사냥을 한다. 바로 그 유명한 트러스트의 시작이었다. 동종 업계가 시장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서로 카르텔을 형성하는 형태의 단합은 있었으니 아예 혼자서 독점을 하겠다는 노골적 트러스트는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록펠러는 황야의 무법자처럼 경쟁자들을 가차 없이 쓸어버린 것이다. '규모의 경제'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는 경쟁사들에게 2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권했다. 우리에게 경영권을 양도하고 주식을 배분 받아 안정적인 부를 보유할 것인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경영하여 파산하든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협박하였던 것이다. 많은 기업들은 록펠러의 냉혹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경영권을 포기했고, 독자 경영을 고집했던 몇몇 회사들은 록펠러의 예언 데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동종기업을 사냥하는 것만 아니라 말 안 듣는 하청업체에게도 가혹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 중에 하나가 등유 운반통에 관한 것이다. 와인 저장통 같은 목재통을 납품하는 회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가 가격을 올려달라고 하고, 납기도 제대로 못 맞추는 등 뱃장을 부리자 이에 록펠러는 철재통을 자체적으로 개발하게 하여 목재통을 대체하였다. 결국 목재통 하청업체는 오래가지 못하고 파산했다. 하청업체의 을질을 가차없이 응징한 것이다.

록펠러에게 대항하는 자들은 결코 그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대표적인 게 철도회사였다. 당시 철도시장 40% 정도를 점유하고 있던 운송업체인 밴더빌트 소유의 뉴욕 센트럴 철도회사가 자신과 쌍벽을 이루던 탐 스캇과 담합하여 전격적으로 운송 가격을 인상한다. 밴더빌트의 변심에 격분한 록펠러는 그들의 담합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이미 자신과 상대할 자가 없는 상황에서 운송비가 올라가면 그에 다라 최종 등유 가격을 조금 인상하면 될 텐데도 그는 그런 철도회사의 오만함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타협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고안한 것이 파이프 라인이다. 스탠더드 오일 공장에 즐비한 배관들을 보고 착안한 것이다. 유정지역에서 정유회사까지 파이프 라인을 통해 석유를 이동시킨다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착상이었다. 참모들과 주위에서 무모한 사업이라고 말렸지만 그에겐 막대한 자금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돈이면 못할게 없었다.

결국 석유는 거미줄처럼 퍼진 파이프 라인을 따라 유동되었고, 가장 큰 고객이 사라진 철도회사의 매출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당연히 철도 회사들은 담합을 풀고 저가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출혈 경쟁을 하던 철도회사들은 줄도산을 하고, 철도회사에 돈을 빌려준 은행과 수많은 투자자들이 문을 닫는다. 그 결과 1873년 미국에 금융공항이란 거대한 허리케인이 밀어닥친다.

 석유 시추
 결국 석유는 거미줄처럼 퍼진 파이프 라인을 따라 유동되었고, 가장 큰 고객이 사라진 철도회사의 매출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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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서도 록펠러는 굳건히 살아남는다. 오히려 그 공항으로 망해가는 석유회사들을 줍다시피 하여 인수한다. 브라키오 사우르스처럼 스탠더드 오일은 끝없는 포식으로 더욱 거대해진다. 1880년이 되었을 때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석유 시장의 90% 이상 점유하게 된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악의 화신 사우론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곡물가게 점원이었던 록펠러는 41살에 트러스트를 완성하고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다. 트러스트란 동종의 기업들이 자신의 경영권 전체를 지주회사에 주고 단지 주식 만 가지고 있는 형태의 독점자본을 일컫는다. 그 당시 횡횡하던 카르텔 형식의 단합 보다 강력한 형태로서 독점시장을 지향한다.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지주회사가 미국의 석유시장을 법의 테두리 안팎에서 독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석유와 등유의 생산량을 조절하고 가격 또한 등락 없이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시장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이러한 기업합병은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에서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그는 설파한다. 적자생존의 진화론이 철학적 근간이었다.

석유시장 뿐만 아니라 철도 철강 석탄산업 등에도 이런 독점자본화 책동이 난무하자 상원의원인 존 셔먼이 '부당한 거래제한과 독점으로부터 상거래를 보호하기 위하여'라는 법안을 입안하고 1890년에 상원을 통과시킨다. 그 법안의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가 독점규제로서 기업의 부당한 독점을 제한하는 법이었다. 흔히 셔먼 반독점법이라 한다. 당시 포식자 공룡들이 얼마나 많이 시장을 황폐화시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 법은 21세기까지 이어져 마이크로소프트와 IBM과 애플 등에게도 적용되어 규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탠더드 오일은 정부에 대한 강력한 로비망을 구축하고 법의 담장 위를 걷는다. 시간이 갈수록 공룡의 탐욕은 식을 줄 모르고 더욱 왕성해진다. 석유 유정 탐사개발, 운송, 저장, 기술개발, 생산, 판매 등 모든 과정을 손아귀에 넣고 시장을 독점한다. 탐사부터 가정에 들어갈 때까지 기나긴 전 과정을 스탠더드 오일이 관장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19세기 후반 가솔린자동차가 발명되어 유럽과 미국에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석유의 수요는 등유의 수요를 능가하게 된다. 생각지도 않은 이 놀라운 전개는 록펠러가 말했듯이 신의 뜻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록펠러는 석유 하나로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여기서 록펠러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가겠다. 젊고 개혁적이고 호기로웠던 그는 대중적 성향이 강한 정치인이었다. 이미 30대에 뉴욕주 경찰청장을 하면서 부정부패 척결의 선두에 섰고, 국방부 해군담당 차관보로 근무할 때는 쿠바에서 벌어진 스페인과의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승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 받았고, 정치적 위상이 하늘을 찔렀다. 젊고 패기 넘치는 그는 차세대 대권주자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1900년 25대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을 무렵 루즈벨트를 가장 경계하는 세력은 당시 미국 경제를 좌지우지 하고 있던 독점자본가들이었다. 석유지존 록펠러와 철강왕 카네기와 금융계 J.P 모건과 그리고 철도 카르텔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연방 정치권과 암암리에 결탁하고 있었다. 10년 전에 통과된 셔먼 반독점법은 그들의 집요한 로비로 무용지물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는데, 바로 루즈벨트가 강력한 반독점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담합하여 루즈벨트의 정치적 부상을 약화시키기 위해 한직인 부통령이란 틀에 가두어두려고 수를 부렸다. 당시 공화당의 리더격이었던 토머스 플램에게 루즈벨트를 당시 대통령이었던 고집불통 보수주의자 매킨리의 런닝 메이트로 천거한다. 풀램은 자신들의 확실한 동조자였다. 그것도 모르는 루즈벨트는 부통령이란 자리가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아직 40살뿐이 안된 나이도 있고 해서 풀램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독점자본가들은 매킨리와 루즈벨트 조합의 대선 승리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결국은 뜻을 이룬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재선에 성공한 매킨리는 취임하고 1년도 안되어 레온 촐고츠라는 무정부주의자한테 총격을 받고 암살당한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정권을 이어 받는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얼떨결에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는 자신이 늘 가슴에 품고 있는 정책들을 처음엔 표출하지 못한다. 국민에게 공약을 내걸고 선거에서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힘을 받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매킨리 암살에 대한 음모론이 바로 자신 주변에서 횡횡하고 있어서 움츠리고 있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대통령 취임 초기 정견 발표장에서 그는 자신을 음모의 당사자로 의심하는 극열 보수주의자한테 총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지만 천운으로 암살에서 벗어난다. 그만큼 그의 위상이 불안했다는 증거이다.

그렇더라도 독점자본가와 루즈벨트의 전쟁은 숙명적으로 피할 수 없었다. 전운이 감도는 것도 일 년이면 족했다. 1902년 루즈벨트는 독점금지에 대한 법안을 국회에 통과시키려고 선전포고를 했지만 독점자본가들은 용의주도하게 법 망을 피하고 그들의 비호를 받은 정치권과 언론에서도 강력하게 방어망을 구축한다. 법을 만들어서 악의 축인 독점자본가를 척결하려는 시도는 현실적으로 돌파하기 어려웠다. 그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행정적인 절차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10년 동안 창고에서 먼지에 쌓여 있던 바로 셔먼 독점금지법이란 무기를 꺼내 온다. 그리고 그는 그 법으로 재임 포함 7년 동안 온갖 방해를 받으며 47개 회사를 독점기업으로 제소한다. 여론은 트러스트 파괴자 혹은 트러스트 저승사자라는 수식어를 그의 이름 앞에 붙였다.

당시 루즈벨트의 타깃 1호는 스탠더드 오일이었다. 이미 독점자본가의 처음과 끝을 보여주고 있던 록펠러는 최악의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단 대학이나 의료재단을 설립한 자선 사업가이기도 했다. 루즈벨트는 록펠러를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 록펠러가 얼마나 선행을 하든 그 부를 쌓기 위해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 없다" 이 한마디에 록펠러에 대한 루즈벨트의 평가를 집약할 수 있다.

당시 스탠더드 오일에서 생산 판매하는 품목은 다양했다. 가솔린과 경유, 아스팔트, 윤활류, 양초, 성냥, 페인트, 바셀린, 화장품, 심지어 껌까지 만들어 팔았다. 그 제품의 원자재는 물론 검은 석유이다. 그리고 시추에서 판매까지 전 과정을 독점했다. 아직 본격적인 석유화학이 나타나기도 전이었다.

하여튼 록펠러는 1909년 루즈벨트가 퇴임할 때까지 주정부의 무차별한 공격을 방어한다. 독점금지법으로 제소 당한 많은 기업들이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록펠러는 주마다 다른 법을 악용해 미꾸라지처럼 피하고, 홀딩컴퍼니를 만들어 법망을 피하는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면서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그리고 루즈벨트가 퇴임한 뒤인 1911년, 드디어 9년 동안 지난하게 이어져오던 재판이 종지부를 찍는다. 연방대법원은 스탠더드 오일을 34개 회사를 분할할 것을 최종 판결한다. 더 이상의 트러스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악명 높았던 거대한 공룡은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자본주의에서의 규제 없는 자유경쟁이 얼마나 많은 폐해를 만들어냈는지 몇 십 년 동안 학습한 효과가 1911년에 법으로 판결이 난 것이다. 정부의 적절한 규제는 거대한 공룡의 출현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호망이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34개 회사로 해체된 후 세계의 석유시장은 빠르게 재편된다. 천하무적 스탠더드 오일의 위력 앞에 억눌려 있던 영국과 네델란드 기업들도 합세하여 이합집산 인수 합병 등이 이루어지고 또 다른 형태의 슈퍼 기업들이 탄생한다. 흔히 일컫는 석유 카르텔 형태의 세븐 시스터스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거대 자본을 가진 7개의 기업을 메이저기업이라 칭한다. 처음엔 스탠더드 오일 뉴욕, 스탠더드 오일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캘리포니아, 스탠더드 오일 캔터키, 스탠더드 오일 인디아나, 스탠더드 오일 오하이오, 오하이오 오일 컴퍼니 등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곧이어 유럽 기업이 합세 하면서 미국의 엑슨(스탠더드 오일 뉴욕), 모빌(스탠더드 뉴저지), 쉐브론(스탠더드 캘리포니아, 캔터키), 텍사코, 걸프오일 그리고 영국과 네델란드 합작인 로얄터치쉘과 영국의 BP 등 7개의 메이저 기업들이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 카르텔은 록펠러의 경영철학을 이어 받아 유전에서 주유소까지 전 과정을 장악하고 또한 무엇보다 세계 석유시장의 가격을 결정한다. 그들에겐 아담 스미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스탠더드 오일이 파국을 맞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존 록펠러는 더 많은 부를 쌓는다. 회사는 비록 해체되었지만 자신 소유의 주식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석유화학산업이 발전하면서 각 기업에 분산되어 있던 주식이 급등하였던 것이다. 독실한 침례교인이며 십일조의 대명사였던 그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내렸는지 모른다. 그는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된 것은 당연했다. 현재 석유시장 서열 1위인 엑슨모빌의 대주주가 록펠러가인 것을 보면 아직도 록펠러가 만들어 놓은 석유 패러다임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아주 먼 옛날 바빌로니아인들이 모르타르용으로 사용했던 검은 석유는 인간의 탐욕과 접하면서 반지의 제왕의 반지처럼 어떤 악의 매개물로 혹은 도구로 전락하였다. 인간의 탐욕은 신이 선물한 석유를 이용하여, 그 선한 뜻을 거역하면서 거대한 바빌론을 세우고 영원불멸을 추구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석유와 록펠러의 만남은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석유는 자신을 등유부터 시작해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수 천 가지 제품으로 현란하게 변신시키면서 인간을 현혹하고, 그것을 즐기고 있지 않을까. 석유도 인간과 함께 타락한 것은 아닐까. 인간의 탐욕과 석유의 화려함은 찰떡궁합일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 2017.09.5 

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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