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미국에서 석유 광풍이 불고 있을 때 유럽에서는 내연기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증기기관차로 대변되는 외연기관을 내연기관으로 대체하려는 개발 분위기가 전 유럽에 고조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 독일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일차 다임러벤츠라는 브랜드가 바로 가솔린기관을 처음 만들었던 공학자 디임러와 벤츠의 이름에서 시작한 것이다. 석유를 정제할 때 등유보다 낮은 비등점에서 만들어진 휘발유는 사용할 데가 없어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었는데 바로 그들에 의해 석유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들어낼 수 있었다.

먼저 내연기관와 외연기관에 대해 잠깐 살펴보고 가겠다. 둘 다 연료를 연소하여 얻은 열에너지로 직선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변화시키는 틀에서의 메카니즘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외연기관은 열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장소가 실린더 외부에 있고 내연기관은 실린더 내부에 있다는 게 차이점이다. 외연기관의 대표적인 기계는 증기기관차이고 내연기관의 대표 주자는 자동차이다.

참고로 현재의 화력발전소와 원자력발전소도 외연기관의 구조를 기초하고 있다. 하여튼 외연기관은 몸집이 크고 효율이 낮은 반면 내연기관은 몸집이 작고 효율이 높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의 공학자들은 외연기관을 대체할 수 있는 내연기관 연구에 올인했다. 동력을 생산하는 엔지니어링은 지금의 로봇기술처럼 대단히 매력적이었고 그 당시 공학자들의 꿈이었다.

르네상스를 이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든 소품 중에 자동차 형태와 비슷한 기계 설계도가 있는데 그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이 놀랍게도 태엽이었다. 후세 공학도들이 그 설계도 대로 제작을 하여 시운전을 해본 결과 장난감 수준이지만 자동차처럼 움직이는 데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다빈치도 자동으로 움직이는 어떤 기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빈치 사후 약 150년 후인 1680년에 네델란드가 낳은 천재 만물과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가 화약을 폭발시켜서 동력을 만드는 내연기관을 처음으로 고안했다. 진자시계를 만들고, 토성을 최초로 발견하고, 빛이 파장이라는 것을 증명한 호이겐스의 원리 등으로 유명한 바로 그 호이겐스다.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어떤 기계적 형태의 인공체에 대해 인간들은 오래전부터 꿈을 꾸어 왔다. 공학적인 개념 정립이 안 되어 있는 상태에서도 오직 뛰어난 상상력과 직관력으로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공학적 메카니즘을 설계했던 것이다. 

그 후 영국의 제임스 왓트가 꿈에 그리던 증기기관을 만들어 산업혁명을 촉발시켰다.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증기기관은 인류문명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그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진전된 기계를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19세기는 동력의 시대였다. 조지 스티븐슨이 완성한 증기기관차가 상업용으로 자리를 잡고 유럽과 미국을 달리고 있었다. 그에 만족하지 않고 비록 대중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증기자동차도 발명되어 귀족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마차의 말을 떼어내고 증기기관을 장착했던 것이다. 물탱크과 석탄적재함과 화로와 기관 등이 복잡하게 설치되어 있는 괴상한 형태의 자동차였다. 비록 말보다 느렸지만 기계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동력의 메카니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증기자동차는 놀라운 의식의 전환이었다. 마차는 말이 끌어야한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문제는 내연기관이었다. 보다 작고 효율성을 강조한 내연기관이 대세였다. 1860년에 프랑스의 에띠엔 르누아르가 도심 거리의 가로등 원료로 사용하던 석탄가스(석탄을 정제한 일종의 천연가스)를 이용해 내연기관을 만들었다. 그 가스 내연기관은 전기로 점화를 한 최초의 엔진이었다. 그리고 1874년 독일의 지그프리드 말커스가 벤젠을 사용하는 엔진을 만들었다. 그것을 마차 차체에 장착을 하여 4륜자동차를 제작했다. 하지만 시운전 중에 생각지도 않게 엔진소리와 배기소리가 너무 심하게 났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당연히 민원이 들끊었고 이에 시 당국에서 운행 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당연히 특허 신청서도 반려되었다. 소음을 간과한 것이다.

말커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내연기관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기계공학에 대한 관심 정도가 마치 지금의 IT 붐처럼 폭발적이었다. 1876년 독일의 니콜라스 오토가 기존의 2행정보다 발전한 4행정 내연기관을 만들었다. 여기서 4행정기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그는 특허를 신청하지 않았다. 단순히 실험실용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실용화에 대한 기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오토의 회사에 코트리브 다임러(1834년~1900년)가 채용된다. 1872년이었다. 다임러는 슈투트가르트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건너가 2년 동안 기계공장에서 수학을 한 후 독일로 돌아와 여러 엔지니어링 회사를 전전하다 오토의 회사에 중간관리자로 취직을 한 것이다.

내연기관에 대한 이론과 현장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가 풍부했던 다임러는 1882년 자신보다 열 살 어린 회사 동료 빌헤름 마이바르와 함께 오토의 회사를 나와 자신의 소박한 기계제작소를 차린다.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고안한 내연기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인 원리는 오토의 것을 가져왔다. 문제는 연료였다. 기존의 가스엔진 보다 개량된 엔진이 목표였다. 가스 대체용으로 등유를 사용해보았지만 열효율성이 떨어졌고 무엇보다 등화용으로도 고가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연료를 가지고 실험을 거듭한 끝에 그는 어느 날 석유 정제 후에 남아도는 가솔린의 휘발성에 주목한다. 그 액체가 폭발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액체 상태의 가솔린을 스프레이처럼 기화시켜 공기와 함께 뿌려주면 질 좋은 폭발이 발생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장인의 통찰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몇 년 동안 가솔린 내연기관 연구에 매진한 결과 마침내 1885년 가솔린엔진을 선보인다. 처음으로 가솔린엔진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그 엔진은 현재 자동차 엔진의 원형이었다. 소형 경량이며 기존의 횡형식이 아닌 종형식이었고, 무엇보다 회전속도에서도 기존의 가스엔진의 속도 보다 4배나 많은 분당 800회전이었다. 그러니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RPM이라는 개념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엔진이었다. 종형식이라는 것은 현재의 자동차 엔진룸처럼 바로 엔진 아래에 구동축이 있는 형태를 말한다. 즉 설치 공간이 협소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임러는 그해에 그 엔진을 자전거에 장착하고 시험 운전을 한다. 마이바흐가 디자인한 자전거에 엔진을 장착했는데, 그것이 최초의 모터사이클로 기록되고 있다. 그만큼 가솔린엔진은 작고 출력이 좋았다는 방증이다.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에 힘을 얻은 다임러는 다음해 1886년에 드디어 1기통 1마력자리 가솔린엔진을 장착한 4륜 자동차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현재의 자동차 구조와 매카니즘이 거의 같은 형태이다. 마이바흐가 디자인을 하고, 다임러가 만든 엔진이 결합하여 탄생한 가솔린자동차는 독일은 물론 유럽 전 지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기존의 자동차, 즉 증기자동차 가스자동차 전기자동차 등이 자택 주변의 산보용 정도였다면 가솔린자동차는 50km 이상 운행할 수 있을 정도로 내구성이 강했다. 실용성이나 가성비 측면에서 보면 기존의 자동차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했다는 것이다.

시제품에 성공한 다임러는 1890년 자신의 성이 붙은 다임러자동차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생산 체제에 돌입하다. 특히 당시 세계 최초로 자동차에 브랜드 이름을 붙이는데 그 이름이 바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메르세데스이다. 그리고 그 해에 다임러 자동차의 최대 수입국이었던 프랑스의 팡아르라는 회사에서 특허료를 지급하고 가솔린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기술이전이었다. 메르세데스라는 단어가 프랑스 여성 이름인 것을 보면 프랑스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임러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동시대에 칼 벤츠(1844년~1934년)라는 젊은 공학자가 1886년 자신이 개발한 가솔린엔진을 장착한 3륜 자동차를 선보였다. 물론 장소는 독일이었다. 페이턴트 모터바겐이라고 명명한 그 3륜 자동차는 시차적으로 볼 때 다임러의 4륜자동차와 차이가 나지 않는다. 누가 먼저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3륜과 4륜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더라도 동시대에 두 사람이 나란히 가솔린자동차를 발명했다는 것은 놀랍거니와 한편으로 독일이 그 당시 기계공학에 대해 얼마나 많은 기술을 축척하고 있었는지를 가름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다임러와 벤츠는 당시에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전혀 모르는 관계였다는 것이다. 후일담이지만 1900년에 다임러가 사망하고, 1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26년에 두 회사는 합병한다. 다임러벤츠가 바로 그 이름이다.

내연기관의 기술 혁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897년에 역시 독일인인 루돌프 디젤이라는 공학도가 자신의 이름을 딴 디젤엔진을 발명한다. 전기 점화로 작동하는 가솔린엔진과는 달리 디젤엔진은 고압의 공기로 연소하는 방식이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내역기관이었다. 그 엔진은 등유의 비등점 보다 높은 온도에서 축출되는 경유를 원료로 사용한다. 가솔린엔진이 커버하지 못하는 범위의 자동차와 거대한 기계 등에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엔진이었다. 여기서 경유의 등장은 석유의 확장성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

실리먼에 의해 처음 석유정제 기술이 개발될 때 그 주된 목적은 등유의 축출이었다. 그 때 석유를 가열하자마자 기화되는 가솔린은 처치곤란이었다. 한마디로 애물단지였다. 그 가솔린은 1갤론당 20센트도 안 되는 싼 가격에 팔렸는데 그 사용처가 저가의 난방기기와 취사 화로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것도 화력의 질이 안 좋아 잘 팔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홀대를 받던 가솔린이 다임러와 벤츠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석유산업은 급성장한다. 그 주역은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유럽에서 다임러와 벤츠가 가솔린자동차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을 19세기 말에 미국에서도 조지 셀던과 듀리에 형제 등 일련의 공학도들이 가솔린내연기관을 장착한 자동차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돈 되는 곳엔 미국인이 빠질 수 없듯이 석유산업과 병행해 자동차 산업도 엘도라도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그렇게 20세기가 도래했을 때는 이미 200여개의 자동차회사들이 난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동차회사의 난립은 얼마가지 못하고 정리된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헨리 포드(1863년~1947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좌절과 성공을 거듭했던 포드는 절치부심한 끝에 1903년 40살 때 소액 투자자 열 댓 명을 모아 포드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러니까 1900년 기준 미국 통계에 의하면 자동차 점유율은 증기자동차 40%, 전기자동차 38%, 가솔린자동차 22%였다고 한다. 그런 자동차 시장에서 포드는 T자동차라는 모델을 내놓아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킨다. 그에 힘입은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 형식을 고안하여 생산 방식에 혁신을 가져온다. 대량 생산이 시작된 것이다. 당연히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 가격을 낮아진다. 상류층 만 소유할 수 있었던 자동차가 이제 중산층으로 확대된다. 자동차의 대중화를 포드가 선도한 것이다. 그 순환고리는 생산을 더욱 촉발시킨다. 1914년도에 73만대를 생산하였고, 1920년대에는 세계 자동차 시장의 50% 이상에 상당하는 자동차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점유율이 50%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제 증기자동차와 전기자동차는 더 이상 거리를 활보할 수 없었다.

자동차로 촉발된 석유의 수요는 20세기 들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육상과 하늘과 바다의 운송 수단 연료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1차세계대전을 격은 유럽과 미국은 군용트럭와 탱크와 전투기 등 무기 개량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 종전 후 무자비할 정도로 군비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석유의 수요는 급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탄소와 수소의 마술적인 연금술인 바로 석유화학의 시대가 우리를 맞이한다.

인간은 먼 옛날 나무를 마찰시켜 불이란 열에너지를 만들어냈다. 그 열에너지로 동굴 속의 인간은 고기를 구워먹고 추위를 피하고 어둠을 밝혔다. 인간은 몇 만 년 동안 그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불과 200여 년 전 인간은 그 열에너지에서 동력이란 운동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청동기 문명이 철기 문명으로 넘어가는 과정과 같은 문명의 대변혁이었었다. 그 중심에 바로 석유가 존재한 것이다. 동력으로서의 석유는 인간의 삶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에 충분했다.

 

오마이뉴스 2017.08.24

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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