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대피소 철거하기 직전의 대청대피소. 폐쇄하고 10년 정도 기념으로 전시하다가 2007년에 철거했다고 한다.
▲ 대청대피소 철거하기 직전의 대청대피소. 폐쇄하고 10년 정도 기념으로 전시하다가 2007년에 철거했다고 한다.
ⓒ PPOUMPU/등산포럼/작성자c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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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오색에서 3시간 이상 올라가면 정상인 대청봉에 도달할 수 있다.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는 가장 짧은 시작점이 중산리라면 설악산에서는 오색이다. 차이는 미미하지만 표고차를 굳이 따져보면 오색에서 대청까지의 높이가 1300미터로, 중산리 천왕봉보다 약간 크다. 산에서는 굳이 의미를 논할 수 없는 수치지만, 표고차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다.

거리 대비 표고차가 크다는 것은 경사도가 크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만큼 오르는 데 힘이 들고 어렵다는 것이다. 같은 표고차라도 직선거리가 길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어렵지 않고, 직선거리가 짧으면 시간이 단축되더라도 힘이 들기 마련이다. 물리적인 에너지 량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심리적으로는 다르다.

하여튼, 사람의 체력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3~4시간을 열정적으로 투자를 해야 천하절경의 대청을 만날 수 있다. 따라서 그 등로는 결코 안락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정열과 육체적 노고를 하나의 에너지로 발산해야만 당신은 그 노고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산에 대한 절대적 욕구를 충족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유유자적은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지겹도록 오르고 오르다 보면 중간중간에 음료수 파는 노점상을 보게 되는데, 그 노점상에서 파는 음료수 가격을 보면 등정의 노고를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 아래 오색에서 1000원하는 음료수가 중간에서는 2000원을 하고 정상이 가까워지면 3000원이 된다. 흔히 우리가 아는 수요공급의 법칙은 무용지물이다. 노점상이 짊어지고 올라오는 노동의 대가가 반영된 물류유통가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정상에 오르면 대청봉은 탁 트인 조망을 당신에게 선사한다. 한동안 멋진 풍광에 넋을 잃는다. 그 유명한 돌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사진을 찍고 해맑게 웃으면서 고산 분위기를 만끽한다. 당신은 그 멋진 풍광을 즐길 자격이 된다.

지금은 철거하여 터만 남아 있지만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정상엔 놀랍게도 대피소 건물이 있었다. 정상석에서 불과 몇 십 미터 아래에 있는 그 대피소는 망부석처럼 경사면에 기대어 가깝게는 화채능선을 멀게는 동해바다를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한때는 군 시설물이었다고 하는데, 돌과 모래와 시멘트를 얼키설키 조합하여 쌓아 만든 대피소였다. 말 그대로 등산객의 대피를 목적으로 하는 수용인원 20명 내외 크기의 작고 조잡한 구조물이었다. 아마도 정상부에 그런 대피소가 있는 곳은 대청봉이 유일무일할 것이다. 그래도 대피소 입구에는 대피소가 아니라 '대청산장'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 대피소엔 '산장'답게 매점이 있었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는 매점일 게 분명하다. 그 매점에서 파는 품목은 아주 간단하다. 음료수 몇 종, 라면, 초코파이 등이 전부이다. 종류는 단출하지만 가격은 고가다. 산 아래보다 몇 배 비싸다. 무슨 명품도 아닌데 그렇게 비싸냐고 하겠지만 여기까지 운반비를 고려하면 비싸다고 입술을 내밀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 매점에서는 물을 팔지 않았다. 그렇다고 목마른 등산객에게 어떠한 물도 거져 주지 않는다. 물 한 모금 달라고 하면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 참 야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물이 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대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경험한 많은 대피소에서도 물은 팔지도 주지도 않았다. 선수들은 다 알기 때문에 물 가지고 시비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 유명한 오대산 진고개 대피소 영감님의 속마음을 안 것은 대청에서의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귀한 물을 조금씩이라도 주기 시작하면 경계선이 무너져 아수리판이 될 것이 자명하다.

정말 목이 말라 참을 수가 없다든지 밥을 해 먹을 물이 필요하다면, 그리고 10여분 발품을 팔고 10여분 줄을 서있을 수 있는 인내심이 있다면 화채능선 아래 샘터에 가서 물을 길러 오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을 짊어지고 산에 가는 것이다. 그게 산에서의 예의이며 기본이다. 높은 산일수록 물이란 존재는 귀해진다. 그 교훈을 대피소에서 실천한다.

대피소 내부로 들어가면 대낮에도 토굴처럼 어둡다. 천정은 낮고 창문도 365일 닫혀있다. 희미한 10촉자리 백열등이 겨우 물체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최소한의 어둠을 밝히고 있다. 경유 발전기를 사용하여 전기를 공급 받기 때문에 전기 사용은 극히 제한적이다. '후레쉬(플래시)'는 필수다. 따라서 대낮에 그 벙커에 들어가 편히 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도 없고 전기도 변변치 않는 대피소에서 당연히 밥을 해먹는 것 또한 편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별도의 취사시설도 없고 공간도 협소하여 정상적으로 취사를 할 수 없다. 느긋하게 쉬면서 밥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행복에 겨운 상상이다. 대피소 주변 적당한 곳에서 대충 라면 하나 끓여 먹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한다. 한겨울엔 더욱 그렇다. 굳이 밥을 먹고 싶으면 중청이나 소청대피소에 가면 편하게 해결할 수 있다.

사실 대청대피소를 철거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수많은 등산객들의 등쌀로부터 대청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정상에서 먹고 자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인간 편의주의에 기인한 편법이리라. 처음엔 가혹한 환경에서 등산객을 보호하기 위한 선한 의도로 대피소를 만들었지만 등산객의 급증으로 대청은 오염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여튼 뒤늦게 각성을 한 인간은 속죄하고 대청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겨울이었다. 대피소 내부는 늦은 오후가 되면 등산객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정원이 20여명이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조금만 있으면 확인할 수 있다. 대청대피소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은 거의가 해돋이를 보기 위함이다. 사실 조금이라도 안락한 숙박을 원한다면 중청이나 소청대피소에 가면 되지만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대청에 머무는 목적은 해돋이가 유일하다고 보면 틀리지 않다.

대청대피소 대청대피소(2006년) 산객의 애환이 절절하게 묻어 있는 내부. 저기 오른쪽 침상이 내 자리였다.
▲ 대청대피소 대청대피소(2006년) 산객의 애환이 절절하게 묻어 있는 내부. 저기 오른쪽 침상이 내 자리였다.
ⓒ 다음블러그 산조모의 열린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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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연초에는 개미떼처럼 등산객이 대청대피소로 몰려든다. 예약이란 개념은 없다. 먼저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 사람이 임자다. 그것도 모르고 밖 경치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든지 먹는 것에 너무 연연하면 차후에 편치 않을 수 있다. 날이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빼곡하게 차면 점호가 시작된다. 양쪽 침상으로 땀 냄새 풍겨대는 등산객들이 끼리끼리 모여 있다. 주임사관은 대피소 소장이다. 10촉자리 백열들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그는 언죽번죽 설악산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기 위해 겁을 주기도 하고 때론 등산 요량과 에티켓 등을 설파하기도 한다. 모두들 생경하고 특이한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다소 긴장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그의 연설에 몰두한다. 눈도 초롱초롱 빛난다.

그리고 소장은 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침상에 사람을 지그재그, 즉 머리를 침상 끝선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머리 발 머리 발로 맞추어 눕게 한다. 남녀 구분 없다. 처음엔 사람들은 불만 섞인 타성을 토해 내지만 이 성의 성주인 소장의 명령에 감히 거부하지 못한다. 등산객들은 웅성거리면서 서로 밀착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모자라 소장은 모로 누울 것을 명령한다. 공간이 조금 생기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등산객을 밀어 넣는다. 그렇게 짐짝처럼 빈틈없이 짜 맞추고서야 소장은 손을 탁탁 털고 나간다. 현재 그 자리가 당신의 자리이며 아침까지 사수를 해야 한다.

사실 이렇게 자리를 잡는 것은 행운이다. 최소한 한겨울의 눈보라를 막아주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눈치도 없이 때늦은 등산객이 꾸역꾸역 찾아온다. 대피소 소장은 중청이나 소청으로 내려갈 것을 요구하지만 간절한 등산객이 그 말을 들을 리는 만무다. 하긴 겨울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등산객이 눈보라 치는 어둠을 뚫고 이동한다는 것도 무리인지 모른다. 그들은 소장의 지시를 거부하고 대피소 입구를 중심으로 주변에서 비박하기에 이른다. 엄동설한에도 극성은 수그러지지 않는다. 밤이 깊어 가면 추위를 이겨내지 못한 등산객은 하나 둘 대피소 안 복도를 점령하기 시작하고 그렇게 곰비임비 가득 메운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은 침낭을 뒤집어쓰고 앉아서 골아떨어진다. 그렇게 밤은 깊어간다. 냄새와 소음이 진동하지만 그래도 잘 사람은 그닥 환경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처음엔 빈틈이 없다. 옆 사람과 밀착을 하면 꼼짝달싹 못한다. 신기하게도 아구가 딱 맞는다. 옆 사람의 근육 움직임까지 느낄 수 있다. 당사자가 여자라도 열외가 될 수 없다. 발은 머리 양쪽에서 냄새를 풍겨 댄다. 침낭이 있다면 뒤지어 쓰면 그나마 느낌이 낫다. 하지만 장비를 챙기지 못한 초보자는 발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생리현상이 시상하부를 자극할 경우엔 참아야 한다. 절대로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현재의 안식처를 포기해야 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헤드랜턴을 켜고, 등산화를 신고, 사람을 헤집고, 강추위를 이겨내고, 그렇게 애면글면 긴 여정을 거쳐 제자리로 오는 데 성공을 하더라도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없음에 절망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몇 사람이 빠지고 나면 새벽녘엔 몸을 정상적으로 눕힐 수 있게 된다. 그나마 여름철엔 일출시간이 빨라 무박하는 샘치고 대충 잠을 때우지만 겨울철엔 긴긴 밤을 고독과 싸워야 한다.

일출 한 시간 전부터 등산객은 기상하여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일출에 관심이 없는 나 같은 게으른 사람들은 그들이 다 나간 후 편하게 한 두 시간 더 취침을 한다. 그렇게 대청대피소의 길고 긴 밤이 시나브로 지나간다.

이 이야기는 1996년 폐쇄되기 바로 전 대청대피소의 풍경이다. 지금은 전국 어디를 가도 그런 대피소는 없다. 악명 높았던 설악산의 희운각이나 지리산의 연하천이나 뱀사골대피소 등도 건물 뼈대는 예전 그대로지만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여 등산객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는 실정이다. 발 냄새를 맡으며 자지 않아도 되고 생리현상을 참지 않아도 잠자리를 빼앗기지 않는다.

지금은 대청대피소는 없다. 그 많던 등산객을 이젠 중청대피소에서 소화를 한다. 200명에 가까운 수용인원 크기로 확장한 중청대피소는 예약을 해야만 숙박을 할 수 있다. 대피소라는 의미와 개념은 없는지 모른다. 단순한 숙박시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산악인들은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대피소계의 7성급 호텔이라고.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 애초부터 먹고 자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저 산이 좋아서 그 높고 험한 산에 올라갔을 뿐 하루 이틀 불편함 정도는 불평의 소지가 될 수 없었다. 그 대피소의 풍경도 산의 일부라고 여겼으리라. 거친 된비알을 오르는 등로처럼 말이다. 지금은 비록 철거되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마음의 성지가 되어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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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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