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3일 

아침 눈을 뜰 때까지 어디를 갈 것인지 정하지 못했다. 일곱 시 경에 눈은 떠졌지만 몸은 구들장 짊어지고 여전히 이불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토요일 달콤한 늦잠은 항상 그렇듯 산행을 방해한다. 그렇다고 제대로 잠을 청하지도 못하면서 괜시래 몸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머릿속에선 여러 산 중 명성산과 운악산 두 개로 압축을 한다. 여덟시가 되자 몸은 일단 일어난다. 그리고 세면을 하고 거실로 나오자 문득 운악산의 망경대가 뇌리를 스친다. 그래, 운악산에 가자꾸나. 이렇게 운악은 운명처럼 나의 간택(?)을 받는다.

 운악산 들머리에 있는 안내도. 운악산엔 이런 안내도가 잘 배치되어 있다.

 

 



 

 

 

 

 

 

 

 

 

 

 

 

 

 

 

 

 

 

 

 

 

 

현리에서 올라가는 운악산도 일품이지만 일동에서 오르는 코스도 그보다 결코 뒤지지 않다. 특히 무지치폭포 - 망경대 - 운악사 코스는 북한산도 서러워할 정도로 산세가 화려하고 조망도 뛰어나다. 전형적인 암릉으로 이루어진 운악산은 '돌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마치 전남의 월출산과 닮았다. 아마 경기의 설악이라고 불리어도 나무랄데가 없을 것이다. '악'소리 날 정도로 힘들다는 의미에서 3악이 있는데 설악, 치악,월악이 그것이다. 하지만 월악 자리에 운악을 놓겠다고 나는 감히 주장해 본다.

 정상 안부에서 본 내운악의 절경. 저 너머로 일동이 보인다.

 

 



산은 자신의 비경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다. 산은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힘듬을 강요한다. 산책 정도의 노고로서 산의 속살을 보겠다는 것은 대단히 큰 오산이며 욕심이리라. 산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운악도 마찬가지다.


 

 애기봉에서 사라키바위로 가는 능선. 소나무는 강한 바람에 뿌리를 까뒤집어 놓았다. 자신의 치부를 다 들어낸 소나무는 부끄럽다. 하지만 그것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소나무는 잘 알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이것 또한 풍광이 되고 산이 된다.

 

 


 사라키능선에서 본 운악 주능선. 오른쪽이 정상이다. 왼쪽은 현등사에서 올라오는 코스다. 4월 하고도 중순이지만 잔설은 가시지 않는다. 그렇듯 산에선 봄은 더디다.

 

 


운악에는 궁예의 흔적이 있다. 명성산에도 궁예의 흔적이 있지만, 운악에도 그가 남긴 진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왜 이 험한 산에 숨어들어 왔을까.

 무지치폭포 옆에 있는 석굴. 몇명 정도 비박하기 딱 좋은 장소다. 궁예도 이 석굴에서 잠시 기거했는지 모른다. 문득 그의 체취를 느끼고, 그리고 뒤다라 엄습해 오는 이 섬득함은 무엇인가?

 

 


자신의 부하였던 왕건에게 배신을 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 궁예는 명성산에서 저항을 하다가 많은 부하를 잃고 이곳 운악으로 숨어 든다. 명성산에서 30여리 떨어진 운악은 산세가 험하여 방어하기에 적격이라고 궁예는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배수진을 치듯 넘을 수 없는 산을 등지고 마지막 불사항전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도망다니지 않으리라. 그의 자존심일 수도 있다.

 

 

 하늘로 솟아 있는 망경대. 저기를 넘어야 정상을 갈 수 있고, 현리까지 다다를 수 있다.

 

 


궁예는 이 험한 산에 집을 짓고 산성을 만들었다. 그 흔적이라고 안내문이 설명하고 있는데, 우선은 믿고 싶다. 역사학적 유물이 발굴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지 못할 것은 없다. 풍설도 근거가 있기 마련이다.

 

 

 궁예가 만들었다는 산성 장소. 굳이 성을 만들지 않더라도 이곳은 성으로서의 역활은 다한다. 자연요새다.

 

 



험한 산을 오르내리면서 그는 와신상담하며 권토중래를 꿈꾸었을까. 천하를 호령하던 그가 아닌가. 부패한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꿈꾸지 않았던가. 그에게는 한 때 수많은 장수와 인재들이 몰려들었고 백성 또한 그를 왕으로 섬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수십의 병사와 이 운악 뿐이 없다. 빈손으로 가기엔 너무나 허망하지 않은가.

 

 궁예성 위에 있는 사자부바위.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은 감히 인간이 넘볼 수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침식에 의해 만들어진 대자연의 모습이다.

 

 


그는 면경대에 앉아 저기 명성산 너머 철원을 사무치는 회한의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가장 믿었던 부하 왕건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의 왕조여야 할 이 땅이 왕건의 것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렇게 된 현실을 어느 누가 믿겠는가. 천하의 궁예가 아니었던가. 왕건 이놈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살을 뜯는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천운은 왕건을 선택했고 그는 거기까지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역사는 그를 패륜아라고 쓴다. 그는 패자였다. 만약 그가 승자였다면 왕건이 패륜아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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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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