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산행

산행 2012. 4. 25. 14:12

처음엔 혼자가 아니었다. K를 처음 만난 것이 화근(?)이 되어 나는 산에 미치도록 빠져들었다. 회사 동료의 학교 친구였던 K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어느 날 내게 접근하여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나 쉽게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나는 그대의 셀파가 되어 세상의 아름다운 산들을 전부 보여줄 것이니 그대가 그 때 아! 정말 아름다웠노라고 외치면 당신의 영혼을 내가 가지겠노라"고 그는 내게 제안을 했으며, 일상의 권태로움에 지쳐있던 나는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먼 훗날 나는 아! 정말 아름다웠노라고 외치지 않았다.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자만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메피스토는 나에게 졌다. 따라서 나의 영혼은 현재까지 내 자신이 가지고 있다.

군에 있을 때 일명 땅개라고 불리우던 보병 출신인 나는 3년 동안 평생 걸을 걸음 다 걸었노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터라 산에 오르는 것은 물론 쳐다보는 것조차 생리적으로 꺼려했었다. 재대 후 5년 동안은 그랬다. 그런 완고한 나의 의지가 K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악(?)의 유혹은 너무나 달콤했는지 모른다.

K를 따라 산악회에 들어간 나는 처음엔 그냥 따라가는 정도의 워킹 수준이었다. 걷는데 신물이 나도록 단련이 되어 있던 나는 힘든 산행에 큰 지장을 받지 않으며 곧 잘 따라다녔다. 하지만 몇 십 명이 움직여야 하는 산행은 나의 적성에는 맞지 않았다. 일정한 통제를 따라야 하고, 관광버스 시간에 맞추어야 하고, 일찍 하산하였다고 내 마음대로 이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한 제약들이 썩 내키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K와 나는 2년 후 의기투합하여 산악회를 탈퇴했다. K도 나의 주장에 기다렸다는 듯이 동의를 했다. 그 후 K와 나는 둘이서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간혹 두세 명이 합세하여 함께 가기도 했지만 거개는 둘이 가는 산행이었다. 그렇게 단출한 산행은 체중을 한 10키로는 뺀 듯 한결 다리와 마음을 가볍게 했다. 한겨울 지리산 장터목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싸구려 양주와 소시지를 구워 먹으며 산에 대한 개똥철학을 구구절절 늘어놓았고, 추위와 싸우며 둘이 꼭 부둥켜안고 밤을 지새야 했던 시간들이 지금도 생생하기 기억에 남아 있다.

어디 그뿐인가. 설악산 대청봉 바로 밑에 있던 대청대피소 그 움막 같은 소굴(?)에서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등산객들과 함께 서로 갈지자로 누워 눈을 붙여야 했고, 다음 날에는 천불동 계곡으로 내려오면서 무릎을 다쳐 절뚝거리던 K의 20키로가 넘는 70리터짜리 배낭을 대신 짊어져야 했으며, 하산하여 막걸리에 김치전으로 피로를 달래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렇게 동고동락하며 5,6년 동안 산에 미쳐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주말에 지리산을 가기 위해 K와 영등포역에서 밤 10시에 만나기로 했었다. 그런데 K는 어찌된 일인지 나오지 않았다. 11시 기차를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에 오래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 때만해도 휴대폰이 흔치않을 때라 달리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시간이 되자 기차에 몸을 실었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날 새벽 늦게까지 폭음을 하여 반 죽다 살아났다고 한다. 술도 산만큼 사랑했으니 이해는 한다.

하여튼 나는 본의 아니게 홀로 산에 가는 신세가 되었다. 사실 산에 대해 조금만 덜 미쳤어도 아마 집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서울 인근에 있는 산도 아니고 저 멀리 있는 지리산을 혼자 가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것도 야간열차를 타고 말이다.

청승맞게 타의에 의해 혼자 지리산에 갔다 온 나는 K에게 연락을 안했다. 약속을 안 지킨 그에 대한 노여움이 한동안 삭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K한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마 미안한 마음으로 차마 전화기를 들지 못했을 것이다. 몇 개월 뒤에 연락은 왔지만 왠지 그 때의 사건으로 서로 간에 신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소원해진 것이다. 내 고집도 한고집하지만 그도 만만한 고집이 아니었다. 산 친구로서 그와는 그렇게 쫑을 쳤다.

홀로 가는 산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초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 때 홀로 지리산에 간 경험은 지독한 등산병에 걸리게 한 악성 바이러스가 되었다. 나는 한동안 그 병에 감염되어 헤어나오지 못했다. 격리 수용 감이었다.

홀로 가는 산행은 무박 2일이 제격이다. 시외버스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나는 대개 야간열차를 이용한다.

토요일 밤, 저녁을 먹은 나는 배낭을 둘러매고 집을 나선다. 등산 경력으로 치면 나보다 선배격인 아내는 주말과부가 되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나를 자유롭게 놓아준다. 때론 고맙고 때론 이 여자가 무슨 음험한 술책(?)을 부리지나 않는 것인지 의심도 든다.

영등포역에서 진주행 야간열차를 탄다. 주말에는 웬만큼 일찍 예매하지 않으면 좌석을 구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진주행 객차에는 등산객들로 꽤 붐빈다. 지리산을 가기 위한 사람들인데 대게는 남원과 구례에서 많이 내린다. 나는 그들 속에 끼어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등산객들의 수다를 경청하기도 하고, 옆에 서 있는 사람과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며, 또한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며 검은 창밖을 아무 생각없이 내다본다. 기차도 느리고 사람들의 움직임도 느리다. 따라서 마음도 느리다. 느리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졸리면 승강실에 가서 적당히 움크리고 앉아 눈을 좀 붙이면 된다. 옹색하지만 기차에서는 자연스런 행동이다.

이른 아침에 열차는 진주에 도착한다. 오늘 가야 할 산은 백운산이다. 하루에 산행을 끝마치고 서울로 가려면 먼 거리 관계상 정당히 계획된 시간을 따라야 한다. 택시를 타야하는지 버스를 타야하는 지는 그 장소에서 결정해야 한다. 가능하면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 비용보다도 시골 버스의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심에선 볼 수 없는 풍경들이 정겹게 시야에 들어온다. 그곳 사람들은 어떤 삶을 영위할까라는 깊은 생각까지는 할 필요가 없다. 그저 보이는 것이 그들의 삶이니까 말이다. 나는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 일뿐이다.

꼬부랑길을 달려온 버스는 나를 부려놓고 계곡 안으로 사라진다. 언제 볼지 모르는 버스다. “12시에 있습더”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언제 있냐는 나의 질문에 중년의 버스기사는 이렇게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대답해 주었다. 등산객의 일정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12시 버스를 못타면 다음 버스는 한참 뒤에 있다는 것이다.

 

산에 오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마을을 끼고 돌아 등산길로 접어든다. 아직 마르지 않는 이슬방울이 바지 끝을 적신다. 공기는 차고 맑다. 인적이 없는 산행은 처음엔 다소 두려움을 느끼지만 몇 번 경험을 해 보면 그 두려움을 즐기게 된다. 발길에 스치우는 낙엽소리와 숲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는, 내뿜는 나의 숨소리에 스며든다. 거친 숨소리, 힘차게 뛰는 박동소리, 그 소리를 음미하며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모든 소리가 멈추고 인간의 부질없는 몸짓만이 남게 된다. 산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한참 후였다. 무슨 도 닦다 헛기침하는 소리냐고? 니가 무슨 오체투지하냐고? 하여튼 상관없다.

지방으로 가는 홀로 산행은 여행이란 덤을 준다. 산에 오르는 것은 사서하는 힘든 노역이지만 그것을 보상 받듯이 여행이란 선물을 안겨준다. 여행은 홀로 해야지 그 참다운 본질을 느낄 수 있으며 숨어 있던 자아도 만나볼 수 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 의문투성이인 나에 대한 탐구는 결코 부질없는 짓거리는 아니다. 메피스토에게 나의 영혼을 줄 수 없으니까 말이다.

산에 가는 목적은 단순하다. 좋으니까 가는 것이다. 산은 항상 거기 있고 그저 좋기 때문에 간다. 산에 오르다 길을 잃고 헤맨다던지, 힘들어 도저히 다리를 움직일 수 없을 때 다시는 산에 오지 않겠노라고 이 악물고 다짐을 하지만 하산하면 산은 다시 나를 부른다. 나는 그 유혹을 거부할 의지가 없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애증의 교착점에서 갈등은 부질없는 짓이다.

동틀 무렵 지리산 뱀사골은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나를 반겨준다. 또 왔니. 잘 지냈어? 어제 비가 와서 물살이 좀 쌜 거야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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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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