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에필로그

사색 2018. 10. 8. 18:10

이제 평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핵폭탄과 대륙간미사일 시험발사 등으로 긴장이 팽배했던 한반도에 언제 그랬냐는 듯 급 평화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한마디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평화의 시대가 이렇게 빨리 도래하리라고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살아 꿈틀거리는 역사적 현장이며 정말 격동의 한반도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평화의 시대에 발맞추어 분단과 냉전의 상징인 비무장지대가 부각되고 있다. 먼저 남북간 고위급회의에서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GP 10여개를 우선 철거하자는 디테일한 계획이 나왔고, 그 행위의 일환으로 판문점 주변에서 지뢰 제거작업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종전 선언 후 그 비무장지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수많은 시나리오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베를린 장벽을 예로 들기도 하고, 자연환경의 보고로서의 생태계를 철저하게 보존해야 하고, 역사적 냉전 유물로서의 가치를 조명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비무장지대라는 공간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대단히 희귀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런 평화의 시대가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하고 2년 전 오마이뉴스에 논픽션DMZ’이란 제목으로 비무장지대에 관한 글 10편을 기고한 적이 있었다. 북한의 핵개발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던 시기였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 냉전의 시대에 DMZ GP에서 사병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10개의 꼭지로 나누어 썼는데, 엄혹했던 그 중심 속으로 몰입하는 것은 사실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시간을 다시 되돌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제대 후 강산이 3번이나 바뀌었지만 나는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었다. 강열했던 그 기억은 불지불식간에 나의 의식을 점령하곤 했다. 시간의 흐름과는 상관없이 기억의 농도는 묽어지지 않고 또렷하게 모양을 유지한 채 나의 내면을 악성종양의 인자처럼 돌아다녔다. 참전 군인의 트라우마 같은 마음의 상처와는 또 다른 강열한 그 무엇이 의식의 한 귀퉁이에서 나를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래전부터 그 기억을 송두리째 배설하고 푼 욕구가 잠재해 있었는지 모른다. 결과론이지만 지금은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나를 본다.

 

이 글은 논픽션DMZ’ 연작의 에필로그라고 해도 무방하다. 비무장지대에 대한 이야기는 기존 언론에 많이 노출되어 진부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먼저 내가 경험한 비무장지대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고 가겠다.

 

비무장지대는 DMZ(demilitarized zone)라고도 불린다. 그럼 먼저 그 규모를 계산해 보자. 흔히 휴전선 155마일이라고 하는데, 그 길이를 우리에게 익숙한 로 환산하면 약 248이고, 남북 관할 폭 합이 4이니 면적은 992가 된다. 물론 실제 측량을 고려한 면적(남한 측 570)은 그보다 크지만 계산의 편의성과 북한의 부정확한 통계를 감안하여 992를 고수하겠다.

 

992를 서울(605)과 비교하면 1.65배이고, 남한(99,720) 면적의 약 1%에 해당되는 면적이다. 쉬게 상상해보면 여의도의 342개나 되는 면적인 것이다. 그리고 30평짜리 주택 1100백만 호를 지을 수 있는 넓이이다. 결코 작지 않은 면적의 비무장지대가 한반도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만리장성을 인류최고의 유산이라고 배웠다. 인공위성에서 보일 정도로 성의 규모가 방대하고 실제 가본 사람들에 의하더라도 그런 지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땅의 경계선이란 개념으로 볼 때 만리장성은 인류 최고의 건축물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국경선이란 개념에 의한 규모면에서 볼 때 만리장성은 대한민국의 휴전선을 결코 능가하지 못한다. 만리장성이 길이는 휴전선보다 길지 모르지만 면적 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리장성의 길이가 6500라고 볼 때 넉넉잡아 평균 폭이 100m라고 하더라도 면적은 650밖에 안 된다. 서울의 면적과 비슷하다. 그리고 흔히 휴전선과 비교되는 베를린 장벽이나 미국 멕시코의 국경 장벽의 규모는 한마디로 조족지혈이다. 다시 말해 휴전선은 지구상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국경선이란 의미이다. 이런 규모의 국경선은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남한 기준으로 볼 때 휴전선 철책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그물망처럼 격자무늬의 철사로 엮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탄소 함유량이 많고 아연도금 된 철사의 표면은 예리한 칼날처럼 되어 있어 맨손으로 만지기가 겁이 난다. 그 철책위에도 가시덤불 같은 원형의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다. 그 철망을 만져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철망 구조의 울타리와는 차원이 다른 아주 강한 금속이란 느낌이 강렬하게 와 닿을 것이다. 좀 더 깊이 표현하자면 단단함과 차가움과 섬뜩함이 손끝을 타고 뇌리를 스칠 것이다.

 

그 이중 철책선은 서에서 동으로 한반도 중심을 가로질러 설치되어 있다. 철책은 잠시 들녘을 지나고 강을 뛰어넘어 첩첩산중 높고 낮은 산을 넘고 넘어 내륙으로 접어들어 지난한 긴 여정 끝에 동해에 도달한다. 특히 강원도의 해발 1000미터가 넘는 수많은 봉우리를 넘을 때는 정말 고단하다. 능선의 급경사는 단내가 날 정도로 숨을 턱까지 차게 만든다. 그 능선을 일직선으로 쫙 펴면 아마도 철책선의 길이는 155마일이 아니라 300마일이 넘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여름 그늘 한 점 없는 불모지화 된 철책선을 오르다 보면 중무장한 병사는 초주검이 된다.

 

견고한 철책선으로 둘러쌓인 992의 비무장지대에서는 관측과 경계, 즉 시야를 확보할 목적으로 상황에 따라 불규칙하게 화공작전이 벌어진다. 건조한 가을 어느 날, 무심한 수색병은 바싹 마른 억새 숲에 불을 지핀 후 바람의 반대 방향으로 냅다 뛰어간다. 불길은 삽시간에 산과 들녘으로 번져나간다. 한껏 뜨거워진 불길은 숲을 태우며 맹렬히 타오른다. 나무와 수풀도 죽고, 노루 고라니 토끼 등의 동물들도 죽거나 땅속으로 숨거나 불길을 피해 질주한다. 때론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터진 지뢰 폭발 소리가 펑펑하며 메아리를 치기도 한다. 그 불길은 밤이 깊어질수록 불바다를 이루어 환성적인 장관을 이룬다. 누구도 그 불길을 끄지 못한다. 철책선을 넘어오지 않게 맞불을 놓을 뿐이다. 그렇게 한바탕 불바다를 이루던 산야는 새벽녘이 되면 화산연기처럼 희뿌연 연기를 토해낸다. 그리고 철책에는 역겨운 탄내가 진동한다. 보다 강력한 어떤 불길은 어떠한 재제도 받지 않고 마치 전 비무장지대를 다 태워버릴 듯 며칠 동안 미친 듯이 타오르기도 한다.

 

그 세계에서는 불모지작업 혹은 박살띠작업이란 단어를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철책선과 GP 주변, 즉 시야확보를 목적으로 철책선이 있는 주변을 황무지화시키는 작업을 일컷는다. 말 그대로 미래에 나무와 풀 같은 식물이 절대 생기지 못하도록 뿌리 채 뽑아버려 불모지화 시키는 것이다. 풀 한포기 없는 그런 황토색 불모지 지역이 철책선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져 구글어스에서 보면 확연히 보일 정도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물론 북한 쪽은 남한보다 더 화끈하게 산을 깎아 초토화시킨다. 그 불모지작업으로 인해 지뢰 제거작업을 하던 병사들이 간혹 지뢰를 밟아 산화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곳이 치명적인 이유는 바로 지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일명 발목지뢰라고도 불리는 M14대인지뢰이다. 그 놈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지뢰탐지기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부식되지도 않는다. 멀게는 휴전 후 비행기로 무차별하게 살포되었고 가깝게는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 등을 매설할 때 행동대원처럼 주변에 대량으로 매설되어 왔다.

 

대인지뢰만 하더라도 크기가 캔맥주 만 하고 무게가 제법 나가기 때문에 지반 변형이 생기더라도 이동에 제한을 받지만 보온병 뚜껑만 하고 가벼운 그놈은 지반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폭우가 쏟아지면 빗물에 휩쓸려 낮은 곳으로 이동한 그놈은 어느 숲에 자리를 잡고 정착을 하며, 그 위로 가랑잎과 흙이 쌓이고 그렇게 자신을 철저하게 은폐시킨다. 어떤 놈은 거센 빗물을 따라 흘러가 못에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못이 마르면 가라앉았다가 다시 비가 와 못에 물이 채워지면 자신을 부양시키고 물길을 따라 이동한다.

 

지뢰의 생태계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놈들은 두더지처럼 땅속에서 움직이며 생존한다. 먹이도 필요없다. 아마도 수백 년은 그렇게 생존할 것이다. 그리고 일설에 의하면 그놈은 번식을 한다고 한다. 허무맹랑한 유언비어인지 모르지만, 그놈들의 이동 경로와 개체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면 번식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는 이유이다. 많은 시간이 흐르면 아마도 발목지뢰라는 종이 이 비무장지대를 지배하고 있을지 모른다. 생태계의 최상위층이 바로 지뢰가 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종류의 인간도 거부할 것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의 지배에서 벗어난 유일한 곳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햇살 좋은 어느 봄날 그놈은 노랑제비꽃 옆에 국방색 모서리를 살짝 내밀고 있다. 육안으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70년대에 태어났을성싶은 그놈은 노랑제비꽃을 따러 온 젊은 병사의 발목을 한순간 날려버린다.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자신을 폭발시키는 그 순간을 위해 그놈들은 수많은 시간을 인내해 왔다. 향기 좋은 더덕 옆에서 어느 이름 모를 청춘의 발모가지를 잘라내는 순간 그놈들은 엑시타시를 폭발시키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 괴물의 일생은 그렇게 끝난다.

 

녀석은 한치의 오차도 없다. 아주 냉정하다. 발 앞꿈치로 밟으면 발가락과 발등만 날아가고 뒤꿈치로 밟으면 아킬레건 아래까지만 살점이 찢어 날아간다. 더 이상 바라지도 않는다. 밟은 부위만 절묘하게 손상시키는 것이다. 피가 쏟아지고 울부짖음이 계곡에서 메아리가 치지만 생은 마감한 녀석은 유유히 화약 냄새만 뿜어낼 뿐이다. 결국 발목이 날아간 청춘은 평생을 의족으로 살아야 함은 물론이다. 전설에 의하면, 어떤 멍청한 수색대원이 넘어지면서 무릎으로 발목지뢰를 밟았는데 결국 과다 출혈로 그 대원이 헬기 안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그 세계에 전해져 온다.

 

발목지뢰가 비무장지대에 얼마만큼 매설되어 있는지 그 수량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다른 지뢰들은 매설할 때 지도를 만들어 철저하게 관리를 하지만, 발목지뢰는 지형의 변화에 영향을 많이 받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미 관리 차원에서 벗어나 있는 게 현실이다. 휴전 후 현재까지 매설되어 온 대인지뢰와 대전차지뢰 등은 그래도 지뢰 매설지도를 만들어 최소한 관리를 해왔지만 발목지뢰는 개수와 위치 등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남한 사정 보다 결코 덜하지 않을 북한 측 지역은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그렇게 비무장지대는 수십 년 동안 화공작전과 불모지작업과 지뢰매설 등으로 인해 황폐화되어 왔다. 한국전쟁 때 비무장지대는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다. 전쟁의 포화가 난무하던 그 지역에 휴전이 되어 비무장지대가 형성되었고, 그 후 화공작전과 불모지작업과 지뢰매설 등이 이어지면서 그곳은 정상적인 자연으로서 발육 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전쟁 때 죽은 주검과 포탄 등의 상흔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곳은 그렇게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과연 헐벗고 지뢰가 난무하는 그곳에 동물들은 살 수 있을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노루나 고라니 토끼 등의 포유류가 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멧돼지도 있다는 설이 있지만 나는 확인할 수 없었다. 추측하건데, 아마도 휴전 후 경계선이 느슨했던 5~60년대에 들어와 살던 동물들이 본격적으로 철책선이 설치되면서 빠져나오지 못한 결과 그곳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70년대 후반에 설치된 이중 철책으로 인해 남한으로 내려오는 길이 막히고 말았던 것이다. 철책선이 느슨한 강이나 개천이나 암릉지역 등으로 야간을 뜸타 탈출을 감행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경계병들의 사주경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남한에서 볼 때, 한마디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그 포유류가 철책선 밖으로 탈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노루들이 생각없이 철책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경계병의 총에 맞아 죽는 사고는 심심치않게 발생한다. 하여튼 각종 동물들도 불에 검게 그을린 고사목과 땅에 숨어 있는 지뢰와 함께 위험한 동거를 하며 그곳만의 독특한 생태계의 한 개체로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북한군의 동향 관측을 목적으로 설치된 60여개의 GP가 있다. 북한 초소가 잘 보이는 봉우리 곳곳에 남한의 경계초소가 마치 높은 산에 세워진 유럽 중세의 성처럼 홀로 서있다. 바로 앞 봉우리에 북한 GP가 육안으로 보인다. 망원경으로 보면 북한군의 동태는 더욱 현실감 있고 사실적이다. 적과 마주한 최전선이다. 투견장처럼 뒤로 후퇴할 수도 없다. 강고한 울타리에 갇혀 적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망망대해 섬과 같은 그곳, 전쟁 발발시 적의 공격에 후퇴하지도 못하고, 그곳에서 가장 먼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운명이 그 GP이다. 그리고 적의 침투조가 은밀하게 침투하여 구성원을 몰살시키더라도 철책 밖에 있는 아군은 아무도 모른다. 아니면 동료끼리 다투어 총기사고가 일어나더라도 누구도 제어할 수 없다. 고립무원, 지독한 고립이 GP의 운명인지 모른다. 처음 그곳에 들어갔을 때 전임 선임하사가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네 무덤이야.”

그 비무장지대에서 매일 수색과 매복이 이어진다. 지면 관계상 여기서 수색과 매복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은 현재 휴전 상태일 뿐이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지뢰와 적군과 매일 맞닥트려야하고, 그 과정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수색대원의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실전 상황이 매일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7월의 뜨거운 태양과 1월의 혹독한 추위와 구릉에 홀로 서 있는 검은 고사목과 타는 목마름을 달래주던 샘물과 침묵의 묵시록 대인지뢰와 불분명하고 안개와 같은 죽음과 그리고 수색대원들, 그렇게 그들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사실 비무장지대는 그동안 우리에겐 또다른 세상이었다. 세상의 희노애락에 익숙한 우리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마치 반지의 제왕의 무대인 중간계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세계와는 별개로 그곳은 매우 특별한 곳이다.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우리의 현실임에도 그곳은 딴 세상처럼 다가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예비역 병장들이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여타의 군생활 에피소드처럼 그 세계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우리의 아들들이 평범하지 않은 그 전장터에서 생존해 오지만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고 멀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울에서 불과 한 시간이면 족히 당도할 수 있는 그곳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이제 평화의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빙하기가 지나듯 동토의 땅에 한줄기 햇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으로 남북은 함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활의 시위를 남북은 힘차게 당겼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다. 어디에 맞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평화라는 과녁을 빗나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은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대남방송이 헤비메탈의 굉음처럼 울려 퍼지던 그곳에 새소리와 물소리가 들리고,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던 그곳에 풀향기 가득차고, 불특정한 지뢰로 인해 마음 놓고 걷지 못했던 그 땅을 즐겁게 트레킹 하는, 그런 세상을 우리는 소망하는지 모른다.

 

평화가 안착 되면 비무장지대는 당연히 사라질 것이다. 우선적으로 손보아야 할 것이 냉전시대의 사생아인 비무장지대의 해체이다. 하지만 해체는 토건 구조물을 철거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 GP와 철책선을 비롯한 구조물을 철거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몇 년 안에 끝나겠지만, 지뢰를 제거하는 작업은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기 때문에 몇 년이 걸릴지 계산서가 쉽게 나올 수 없으며, 지금도 민통선 부근에서 오래전 지뢰가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완전한 제거는 불가항력인지 모른다. 또한 불모지작업과 화공작전에 의한 상처는 몇 년 안에 아물 수 없다. 아마도 우리가 등산과 트래킹을 할 정도의 상태를 만들려면 70년 가까운 냉전시대의 2, 그러니까 100년 이상은 지나야 가능할지 모른다. 파괴는 한순간이지만 복구는 요원한 게 자연의 이치이다.

 

세계사적 냉전의 실재적 상징이며 우리 민족의 단절을 상징하는 비무장지대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끝없는 지뢰의 포식자였던 그놈은 공룡의 멸종처럼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종적을 감출 것이다. 그것은 이제 되돌릴 수 없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고 해야 옳를지 모른다.

 

야만의 역사가 종식된 후, 청명한 가을 어느날 철원 들녘을 거닐며 이곳이 오래전에 철책과 지뢰들이 즐비했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었던 곳이라고 담담하게 얘기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그리고 나의 숨소리와 손때가 묻어 있는 GP 벙커 안을 거니는 꿈도 꿔본다.

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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