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

추억 2012. 4. 24. 11:49

일요일 오전, 안가면 금방 집중 포화가 날아올 것 같은, 그래서 초토화될 것 같은, 계엄령 발령 후 긴급조치가 공표될 것 같은 마누라의 무서운 시선을 무마시키기 위해 나는 피곤한 몸 이끌고 식구를 데리고 무조건 차를 몰고 집을 나섰지. 용인 에버랜드 가자는 아해들과 마눌님의 명령을 운전사 맘대로를 외치며 가히 행동에의 의지로 과감히 거부한 나는 팔당 지나 정약용 묘소로 방향을 잡았어. 지들이 어떡할 거야.

“어머, 성주야 저기 개나리 좀 봐라. 민정아 저기 벚꽃 좀 봐라, 어머 어머...” 마눌님의 연속으로 터져오는 감탄사는 나의 뒤통수를 정약용 묘소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 않고 연신 때려대고 있었지. 남은 졸려 죽겠고마 씨... 아하 누가 그렇게...

 

하여튼, 내 애마는 별로 지체하지 않는 가운데 정약용 묘소에 도착했지. 이미 꽤 많은 상춘객들이 진을 치고 있더군. 우리 식구는 그 상춘객들 틈에 끼어 정약용 생가 옆 벤치까지 봄의 따사로움을 음미하며 사진도 찍고, 갈갈갈 웃음꽃을 피워대면서 걸었어. 조선말 썩을 대로 썩어 있던 조정과 개혁의 기치를 걸고 싸우다 결국 그 고루한 수구세력의 벽을 넘지 못하고 쓸쓸히 생을 마감한 천재 정약용의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춘객들은 그가 남긴 발자취를 그냥 봄길 따라 사뿐히 지나치고 있었지. 뜻을 피지 못한 천재여, 님에게 이 몹쓸 후손들을 대신해 통읍하고 고개 숙여 사죄하나이다. 아하 누가 그렇게...

나들이에 음식이 없으면 의미가 반감되는 법, 마눌님과 아해님은 어제 저녁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나를 매섭게 노려보던 그 김밥 재료로 만든 김밥과 토마토를 게걸스럽게 해치우고 있더군. 난 입맛이 없어 김밥 몇 개에 입을 접고 말았어. 허참, 마눌님과 아해님은 더 드시지요라는 말 한마디 없더군. 아하 누가 그렇게...

배를 든든하게 채운 마눌님과 아해님은 나보고 주위를 한바퀴 돌자고 하더군. 나는 “그냥 여기 있을란다”라고 항상 그렇듯 귀차니스트로소 본분을 표했지. 식구들은 한번 해 본 얘기였노라고 말하는 듯,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나를 벤치에 홀로 남겨두고 자리를 뜨더군.

마눌님과 아해님이 떠난 후 나는 짐을 옆에 놓고 먼산바래기로 아무 생각없이 따사로운 햇살을 좆고 있었어. 햇볕은 바람 없이 포근하면서 부드럽게 얼굴을 애무하고 있었지. 그 때도 햇살은 따사로웠지. 철책 바로 밑 땅굴 예상지역 막사에서 페바로 내려가기 며칠 남겨놓은 어느날, 점심 먹고 페바 부대에서 쓰겠다고 해놓은 싸리빗자루 더미에 기대어 앉아 있을 때였지. 3월 말의 햇볕은 따스했다. 공기는 아직 차지만 햇살은 따사로웠다. 졸음이 온다. 나는 그 햇살을 베게 삼아 시나브로 잠에 빠져든다. 꿈은 없고 오직 햇살의 따사로움만이 나를 꼬옥 감싸 안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한테 혼난 후 울먹이며 엄마품에 안겨, 서서히 울음이 가시면서 잠속으로 빨려드는 그 포근함 일까, 아니 그런 서정은 아닐 것이다, 그냥 낮잠이라고 해둬 버리자.

“여보!” 아아! 마눌님의 카랑한 목소리. 나는 눈을 떴다네. 그리고 주차장으로 가면서 “얼마큼 잔거야?”라고 나는 마눌님한테 퉁명스럽게 물었다네. “한 삼십분 됐나...” 아하 누가 그렇게...

 

나는 차에 올라 탄 후 아들놈 오줌 누는 사이에 잠깐 차안 백밀러를 보았지. 아까 졸았던 눈을 추스리려고 말이야. 그런데 웬일인지, 그 거울 속 비친 얼굴은 다소 게슴츠레 하지만 알 수 없는 잔잔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고 있더군. 나는 깜짝 놀랬지. 회한의 미소인지, 행복의 미소인지, 달콤한 낮잠의 여운에 의한 미소인지, 글쎄 뜻 모를 그 미소는 금방 가시지 않았어. 그 때 문득 그 표정에서 연상되는, 박하사탕이란 영화를 봤는지 모르지만,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영호가 강가에 누워 햇살을 보며 미소 짓는 그 화면이 떠오르더니 곧 정지하는 것이었어. 그래 박하사탕이란 순수의 이미지가 그 잔잔한 미소에 배어 있었던 것이지. 순수의 미소, 군대 있을 때 그 낮잠 속에서 아스라이 감싸주던 순수의 낮잠, 그리고 현실의 낮잠에서 잠시나마 맛보았던 그곳으로의 여행... 아하 누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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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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