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여인

가족 2016. 12. 4. 17:00

어느 여인이 여기 있습니다.

한국전쟁 후 그녀는 전쟁으로 황폐화 된 고향 강릉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15살이었습니다.

공장 노동자와 버스 안내양 등을 하며 억척같이 살던 그녀는 기성청 공무원이었던 감수성 예민한 청년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결혼을 했습니다. 

봉천동 고갯마루에 신혼집을 차린 그녀는 아이 셋을 낳고 남편의 박봉에 보탬이 되고자 동네 구멍가게를 하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큰딸이 중학교 3학년 일 때, 외로움을 많이 탔고 술을 좋아 했던 남편은 알콜 중독이 되었으며 그해 가을 간경화로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졸지에 하늘로 보낸 그녀는 슬픔을 뒤로 하고, 막막한 현실에 굴하지 않으며 모진 세월을 이겨나갔습니다. 

지난한 시간이었습니다.

월남한 시댁에서는 변변한 도움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시장통에서 삵바느질과 이불가게를 하면서 세 남매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큰 딸이 결혼을 하고, 몇년 뒤에도 두째 딸이 결혼을 했습니다.

두 딸 모두 외로운 어머니에게서 멀리 떠나지 안고 주변에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계속 시장에서 삵바늘질과 이불 장사를 하며 외손주 셋을 건사하면서 언제나 그렇듯 올곧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둘째딸이 이혼을 한 후 미국으로 떠났고, 그리고 1년 후 외손녀가 중학교 1학년 일 때 5년동안 암투병을 하던 큰 딸이 결국 이승에서의 소풍을 접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무너졌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늙고 쇠약한 몸을 이끌고 세상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녀의 몸에선 암세포가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방에서 자란 암세포는 점점 커져 폐를 찌그러트리고 몸 밖으로 삐져나오기 까지 했으며,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 정신이 혼미해졌고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수술도 할 수 없었고, 약물치료도 한 번 하고는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딸을 보내고 십년 하고도 5 개월이 지난 11월 29일 그녀는 결국 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임종 순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정말 한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두 딸 내외와 어린 손주들과 함께 햇살 좋은 어느 봄날 남산골 한옥마을에 나들이 갔던 그 날인지 모름니다.

햇살이 눈부시던 그날, 나는 그녀과 그 가족들의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가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나 없다고 슬퍼하지 마라...

지금쯤 저 하늘에서 먼저 온 큰딸이 그녀를 마중할지도 모릅니다.

엄마, 고생했어. 여기선 힘든 일이 없을 거야. 어서 와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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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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