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폴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이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칭했다. 체 게바라가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트린 후, 그 혁명을 지지했던 사르트르가 쿠바를 방문하여 체 게바라를 만나고 나서 한 말이다. 어떤 이는 완전한 인간이라 함은 곧 예수를 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생인 게바라는 1951년 어느 날 휴학계를 내고 선배인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흔히 대학생 때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나듯 그에게도 낭만적인 경향이 짙은 ‘방랑 귀족’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는 2개월 만에 망가진 500cc 모터사이클을 폐기하고, 발과 자동차로 나머지 7개월 동안 칠레와 페루와 콜롬비아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한다. 물론 편안한 여행이 될 수 없었다. 비와 눈을 맞으며 걷기도 하고, 금방 분해될 갖은 트럭을 히치하이킹하기도 하고 때론 허름한 마구간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 등 견유주의자 같은 지난한 여행이었다. 그는 그 여행에서 처참한 민중들의 삶을 목도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자신의 의술로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농장과 탄광에서 그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 민중들은 그런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저항의 몸짓을 하지 않고 자본가에게 오히려 자비를 베풀어주기를 원하고 있었으며 그에 게바라는 분노한다. 민중들의 능력으로는 이런 현상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게바라는 깊이 고민한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게바라는 이미 의식화된 운동권 학생이 되어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사랑했던 그는 의대를 졸업한 후 안락한 의사로서의 미래를 접고 당시 혁명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던 남미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긴박한 현장을 접한다. 마치 80년대 우리의 ‘학출’과 같았다. 그리고 과테말라에서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를 만나 결혼을 하고, 미국 CIA가 개입된 전형적인 남미 국가의 혼탁한 정세에서 반정부 투쟁에도 적극 가담한다. 과테말라에서 남미 국가와 미국이 어떠한 관계가 맺어져 정권을 창출하는지 명확하게 확인한 그는 가데아로부터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피델 카스트로에 관한 얘기를 듣고 멕시코로 떠난다. 이제 머나먼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혁명을 위해서. 그로부터 12년 후 1967년 10월 9일 그의 나이 39살 때 그는 볼리비아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14세기 말, 중국에서는 원나라가 명나라 주원장에게 쫓겨 자신의 고향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원나라를 따르는 권문세족과 명나라를 따르는 신진사대부가 대립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이색을 논하지 않고서는 당시 정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 이색은 유학을 고려에 처음 들여온 안향의 정통 후예로서 약관의 나이에 원나라 국립대학인 국자감에서 수학하며 당대 최고의 학문인 주자성리학을 배웠고, 2개의 고시를 패스한 당대 최고의 두뇌였다. 24살 때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귀국한 그는 공민왕에 의해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성균관을 재건하여 총장 격인 성균 대사성이란 직책을 맡아 후학 양성에도 매진한다. 그는 엘리트 성리학자로서 명성이 자자했으며 그의 문하에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머리들이 모여들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김구용 조준 등이 동문수학을 했다. 그러니까 서울대 법대를 능가하는 학당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바로 역성혁명 전 후 격동의 현장에서 이색과 그 졸업생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우정과 배신의 드라마를 쓴다.

 

그 이색 문하에 바로 10대 후반의 정도전이 입학을 한다. 그러니까 이색 학파의 일원이 된 것이다. 정도전은 그로부터 13년 후, 그의 나이 33살 때 1375년 권문세가의 모략에 의해 유배를 가고, 1383년 이성계를 만나 혁명에의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하며, 5년 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거쳐 고려 권력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1392년 자신의 스승인 당대 성리학의 거두 이색은 숙청되어 다시는 권력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서로 동심우라 할 정도로 가까웠던 선배인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격동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역성혁명에 성공한다.

 

우리는 정도전을 한고조의 한초삼걸, 즉 장량, 한신, 소하 중에 한 명인 장량과 비교하기를 즐긴다. 사실 주당이었던 그는 취기가 오르면 자신의 입으로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말은 곧 자신이 조선의 창업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정도전에게 흔히 조선의 설계자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조선의 헌법인 조선경국대전, 관료의 직제에 관한 경제문감, 억불숭유에 관한 불씨잡변, 군주의 도리를 설정한 경제문감별집 등의 집필에서 보듯 성리학과 민본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계하였으며 그리고 경복궁과 서울의 주요 건물들을 신축할 때 위치를 정하고 건물 이름을 작명한 것을 보면 분명 설계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 평가를 좀 강하게 표현하면 조선은 이성계의 나라가 아니라 정도전의 나라였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이성계는 단지 바지사장이었고 정도전이 실소유주라는 것이다. 고려 말 대부분의 개혁파들이 꿈도 꾸지 못한 역성혁명을 정도전이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정도전이 아니었다면 이성계가 최 씨 무신정권처럼 권력을 잡을 수는 있었겠지만 역성혁명까지는 가지 못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가 된 후 삼봉이 없었다면 자신은 임금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한 것을 보면, 그리고 삼봉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살해되었을 때 왕위를 버리고 함흥으로 떠난 것을 보면, 그는 애초부터 왕과는 인연을 두지 않았다. 따라서 정도전이란 인물이 이성계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은 알파요 오메가였던 것이다.

 

조선은 결과적으로 정도전의 뜨거운 에너지가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유방에게 장량이 찾아가지 않았다면 유방의 한나라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이 인정하듯, 조선도 정도전이 1383년 함경도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역성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정도전의 주도하에 역성혁명이 완성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정도전이 위대한 것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개국에 통치 이념을 접목시킨 점이다. 그 이념은 현재와 비교하자면 민주주의를 할 것인지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과 같다. 중국에서 수많은 혁명으로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지만 그 결과엔 인간의 욕망만 존재할 뿐 통치이념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이성계와의 운명적 만남 이전부터 정도전의 머리에는 성리학과 민본이 확립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정과 추진력으로 현실 정치에 접목시킨다. 조선의 정신은 정도전의 정신 이리라.

 

태종 이후 이런 분석과 평가에 대해 송시열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노’라고 외쳐왔지만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그런 도그마는 무너지고 있다. 과전법 실무 책임자였던 조준 정도(?) 되는 인물이 권력투쟁에서 패했다면 아마도 영원히 그의 가치는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정도전이기에 역적의 우두머리라고 욕을 먹더라도 그의 역사적 평가는 숨길 수 없었다. 감추기엔 크기가 너무 커서 감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영, 정조 때 재평가의 분위기가 일었고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정식으로 복권이 된 것을 보면 그가 차지하는 조선에서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를 가름할 수 있다. 사후 460년이 지난 뒤 복권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그 자체로서도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사건이지만, 조선에서 정도전이라는 존재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여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그에 대한 재평가는 사필귀정인지 모른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 보자. 1375년 삼봉의 나이 33살 때였다. 그는 당시 이색 학당 출신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서 성균관 사예 종4품 즉 지금으로 보면 국립대 음악교수 정도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당시 선진 사상인 성리학은 이색과 그의 제자들인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조준 등에 의해 고려 말의 정치사상적 이데올로기로 급부상하였는데 그들을 신진사대부라 칭하였으며 친명주의를 표방했다. 그리고 기득권 보수 세력을 권문세족이라 칭하였으며 친원주의를 표방했다. 당시 정치 판도는 신진사대부와 권문세족이 양분하고 있었다.

 

그해 명나라 공격에 밀리고 있던 원나라가 연합군을 만들자는 목적으로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그 사신의 영접을 놓고 권문세가의 거두인 이인임과 급진 신진사대부인 정도전이 한 판 붙은 것이다. 이인임은 세상이 다 아는 친명파 정도전 정몽주 이숭인 등에게 원나라 사신을 영접할 것을 명하였고, 이에 격분한 정도전은 중도파인 경복흥에게 항의하여 재고해 줄 것을 청하였다. 하지만 끝내 청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그들은 항명을 하고 귀양을 자초하고 말았다. 권문세족이 신진사대부를 길들이기 위한 술책이었다. 그중에 가장 급진적인 정도전이 타깃이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게 마련이다. 정도전 자신도 말했듯이, 그는 타협을 모르는 대쪽 같은 성격이었다. 정몽주 이숭인은 1년 후 복권이 되었지만 정도전은 그 후 9년이 지난 1384년에 복권이 된 것을 보면 정도전이 권문세족들에게 얼마나 많이 경계를 받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하여튼 정도전은 전라도 나주 지역 회진현 거평부곡이라는 곳으로 유배를 간다. 정도전에게 글쓰기는 일상과 같아서 일생동안 여러 분야의 수많은 기록들을 남겼는데, 소재동 황연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글로 남기는 것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제목이 마을 이름을 앞에 붙인 소재동기라는 책으로서 삼봉집에도 실려 있다. 이 글에 보면 그가 어떻게 2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문자의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정도전의 글쓰기는 역사적 사실성의 측면에서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정몽주는 당대의 석학이며 출중한 정치가였지만 자신이 쓴 기록은 한시와 잡문 등이 실린 포은집 이외에 미미하여 사실적 빈곤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문자를 남긴 자가 승리하는 것이리라. 예를 들어 일찍이 문자를 만들었던 중국은 2500년 전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었고, 문자가 없었던 고조선의 역사는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는 몇 줄의 기록에 의지하는 역사적 빈곤에 처해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지금도 중국과의 역사적 문제가 발생하면 힘을 못 쓰고 있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나주 소재동에 유배된 정도전에게로 돌아가자. 소재동기에 보면 10여 호 되는 마을 주변 풍광을 글로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그 표현을 그대로 다 옮겨 놓을 수는 없지만, 마을 주변의 산수풍경을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궁벽하지만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한 편의 수려한 기행문을 보는 듯하다,

 

소재동에 처음 와서는 환경의 변화로 적응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객들이 찾아와 술친구가 되어주어 삼봉에겐 적잖게 위안이 되었다. 그중에 서안길이라는 땡중이 있었는데, 얼굴이 길고 코가 높아 괴이하게 생겼으며 전국의 사투리를 구사할 수 있었고 또한 세상사 모든 일을 꿰차고 있어서 며칠 밤낮으로 대화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에서 문자 좀 하는 객들이 각종 특산물과 음식과 술을 가자고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시름을 달래주었다. 소재동기에 서안길과 황현 외 김성길, 김천부, 김천 등 손님들의 이름들이 거론된 것을 보면 기록의 구체성을 확인할 수 있고, 정말 그 지역 사람들과 흉금 없이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유배문학이라 하여 유배지에서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지만 그처럼 마을 사람들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쓴 작품은 없을 것이다. 이는 정도전의 교감능력이 뛰어나 그 촌락에 동화되었다는 증거이며 또한 타인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었다. 대게 많은 유배자들은 그 지역의 유력한 관리나 토호세력들과 친교를 하기 마련인데 정도전은 하층민과도 거리낌 없이 지낸 것을 보면 세상을 접하는 인식이 유연하고 넓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정도전은 답전보라는 글을 또 쓴다. 농부와의 대화라는 뜻이다. 나주 유배지를 배경으로 어느 노인과의 문답체 글인데,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집이 낮고 기울고 좁고 더러워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집을 나서 들을 거닐다가” 밭에서 호미를 들고 김을 매고 있는 노인과 만나 일장 훈시를 듣는 내용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은둔자라 칭했던 눈썹이 긴 노인의 입을 빌려서 자세하게 들려준다.

 

불의를 외면하고 호의호식에 탐하는 자들. 권력과 가까이하려고 온갖 아첨을 하고, 겉으론 정의롭게 보이면서 밤 만 되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권력과 결탁하는 자들.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과 풍속의 미악 등은 돌보지 않고,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시기하고 비방하고 비웃는 자들. 평화시에는 뒤짐만 지고 다니며 큰소리치고, 오만방자하여 조정의 선비들을 경멸하다가 전쟁터에 나기면 겁을 먹고 달아나는 장군들. 그리고 남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고, 아첨하고 아부하는 자를 좋아하고, 바른 말하는 선비를 배격하고, 관직과 봉록을 착복하고, 형법을 농단하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 조정에 득실거리노라고 일갈한다.

 

답전보는 정도전의 사상적 각성의 기록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자신이 품고 있는 권력세계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고백한 것을 볼 때 전환기적인 인식의 확장이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시작점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세상에 대한 깨달음이었는지 모른다. 그 깨달음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표현된다. 그동안 머리에서만 존재하던 맹자의 민본이 무슨 계시처럼 그의 가슴에 저며 들었다. 혁명의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1377년 7월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려난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2년의 유배생활은 쓰디쓴 와신상담의 시간이었다. 현재 개경의 분위기로 보아 언제 세상으로 나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복권은 요원할 뿐이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그의 앞길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상과 타협할 수는 없었다.

 

2년 동안 정들었던 황현과 서안길 그리고 동리 사람들과 작별을 한 그는 고향인 영주로 가기 전에 강원도 원주로 발길을 돌렸다. 원나라에서 망명한 위그르인의 후손이며, 고시 동기이고 동문수학 했던 절친 설장수가 원주 목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이색학당 후배이며 자신을 친형처럼 따르던 하륜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참에 정도전에게 연락하여 원주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정도전을 개경에서 만나는 것은 빨갱이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아직까지는 불경스러운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이목이 없는 원주에서 만나 회포를 푸는 자리였다. 얼마나 친구가 그리웠으면 그 먼 원주로 발길을 옮겼을까. 정몽주와 서로 동심우라 부르듯 그들에게도 우정의 깊이는 그에 못지않았다. 먼 훗날 그들과 정적이 되어 죽기 살기로 싸우지만 말이다.

 

정도전은 고향인 영주로 가서 몇 년 간 세상과 담을 쌓고 생활한다.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은둔시킨 침묵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백면서생처럼 하릴없이 밥 만 축내는 시간은 아니었다. 생계를 위해 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리키고 손수 농사도 지었다. 그가 처한 상황은 절박했다. 절치부심하며 권토중래를 한다는 것은 사치인지 모른다. 우선은 민생고가 급했다. 아내 혼자 많은 식솔들을 거느리게 할 수 없었다. 정도전이 나주 유배지에 있을 때 그의 아내에게서 받은 편지가 지금도 전해지는데, 삶의 고달픔이 절절하게 배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0년 이상 관직에 있었는데도 그에겐 재산이 변변히 않았다. 가장으로서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을 이제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서당은 부업이었고 주업은 농사였다고 해야 옳다.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삼봉집 등 여러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선비의 체통 따위를 논하는 서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타고 술이나 마시는 낭만적 행위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정도전은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며 행동주의자였던 것이다.

 

자신에게 호통을 치던 담전보의 방미호수(厖尾皓首) 노인처럼 정도전도 호미를 들고 김을 맸다. 은둔자라고 칭했던 답전보의 그 노인은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세상과의 연을 놓고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하며, 그 피안과도 같은 고독에서 나를 발견하고, 땅의 숨소리와 나의 숨소리가 내면에서 공명하고, 그때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는다. 은둔자는 오금이 저려오는 것을 참으며 호미질을 멈추고 뜨거운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든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머금는다. 그리고 은둔자는 돈오와 같은 덩 빈 공간으로 빠져든다.

 

정도전이 토지개혁에 눈을 뜬 것은 이 무렵이었다. 고려의 전시과 제도는 매우 복잡하여 여기서 설명을 다 할 수 없다. 전시란 말 그대로 곡물과 땔감을 생산하는 토지로써 조세 관계 체계를 말한다. 화폐 유통이 제한적이었던 당시 재화의 일종인 토지를 이용한 조세제도이다.

 

그중에 수조 제라는 제도에 문제가 많았다. 수조제는 관료에게 주는 급여를 관이 지정한 일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1/10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나라에서 공무원에게 주는 급여를 화폐 대신 곡물로 주었는데 그 방법이 간접적이었다.

 

문제는 1/10이 지속되면 곡물을 생산하는 농민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세기말적인 혼탁한 세상이 되면 그 시스템이 무너지기 마련이다. 시간이 가면서 수조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진다. 가령 A라는 관료가 1/10의 급여를 받다가 관직을 변경하여 떠나면 그 1/10이 소멸되어야 하는데, A는 권력의 힘으로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상속까지 하는 현상이 발생되고, B라는 관료가 A의 후임으로 부임하면 그 땅에 1/10의 수조제가 부가되고 따라서 똑같은 땅에 2/10의 세금이 부과된다. 그리고 또 다른 C가 발생하고 급기야 농민은 3할 이상의 곡물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5할을 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자작농과 소작농이 혼재하다 보면 상황은 더욱 꼬이게 된다. 또한 벼룩의 간을 빼먹듯, 이런 과정에서 권문세족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마지막 살점까지 수탈한다.

 

이에 살기 힘들어진 농민은 자진해서 권문세족의 노비로 들어가고, 투탁이라 하여 사찰에 의탁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런 신분의 변화는 개인적으로 행하여지는 것이어서 가족의 분해로까지 이어진다. 봉건시대의 국가 기반은 농민이었다. 군대를 소집해도 농민군이라 하여 농민이 우선이었고, 국가의 역사에 동원되는 부역에도 농민이 우선이었으며, 나라의 온갖 납세의 의무도 농민이 해결해야 했다. 농민이 부족하면 국가의 재정은 궁핍해지고 따라서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고.

 

하지만 농민의 삶은 세금으로 인해 점점 피폐해진 반면 권문세족은 납세의 의무에서 자유로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조세제도이지만 봉건사회에서는 당연한 논리였다. 곡물이 생산되는 모든 땅에는 세금이 부과되지만 권문세족은 예외라는 것이다.

 

고려 전시법의 특징은 사찰전에도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시 권문세족과 버금가는 기득권층이었던 불교계는 토지 소유량이 상당하였으며 그에 상응하는 잠재적 조세의 크기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고려 전체의 사전에 조세 의무를 부여한다면 백성들의 허리는 상당 부분 펼 수 있었다. 사찰은 세금도 안 내고 생산력도 없는 완벽한 특혜 지역이었다. 사찰로 인한 유무형의 경제적 손실에 대한 현상은 당시 신진사대부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그중에서도 직접 농사를 지으며 격은 정도전에겐 불교 개혁은 최우선 항목이었다. 불씨잡변에서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면 불교가 민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여튼, 십여 년 후 조준에 의해 혁신적인 토지개혁에 대한 상소가 올라가기 전 당초 정도전의 의중은 권문세족의 사전과 사찰의 사전을 모조리 몰수하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사회주의적인 토지개혁이었다. 이런 제도는 공산주의가 아닌 이상 지구 상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급진적인 토지개혁으로서 당연히 당신 기득권 세력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되고 결국 많이 완화된 과전법이란 형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4년 동안 완벽한 무망의 세월을 보내던 그는 관의 허락을 받고 1381년 39살 때 제천과 원주를 거쳐 드디어 경기도 양주 삼각산 아래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거주지 제한이 풀린 것이다. 6년 만에 돌아온 동리였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공직에 나갈 수 없는 몸이었다. 복권은 요원했다.

 

하여 그는 또다시 생계를 위해 삼봉재라고 명칭 한 학당을 연다. 학자이자 관료 출신으로서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직업은 훈장이었다. 다행히 양주에서의 학당은 영주에서 보다 훨씬 운영이 양호했다. 양주는 당시 개경 서경과 함께 가장 큰 도시 중에 하나인 남경과 인접한 향리로서 인구가 많았다. 개경과도 가까운 남경에는 전국에서 모인 고시생들이 많았고 그중의 일부도 삼봉서원에 수강 등록을 했다. 정도전의 명성은 지방보다 대도시에서 더 많이 회자되기 때문에 글깨나 하는 유생들도 알음알음 찾아왔으며 따라서 서원의 경영은 농사를 짓지 않을 정도로 잘 되었다. 후진을 양성하며 오랜만에 마음 놓고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평화도 잠시, 지역에서 영향력 깨나 행사하는 자들이 정도전을 가만 두지 않았다. 과거 고위 관직에 있었다는 그들의 배경에 누가 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정도전의 행적을 감시하기도 하고 서원에 찾아와 훼방을 놓기도 했다. 어느 권문세족 일파의 사주가 분명했다. 결국 그들의 온갖 음해로 삼봉재가 철거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렇게 1년 만에 정도전은 양주를 떠나 제자들과 함께 부평 남촌으로 이사를 가서 학숙을 연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부평 부사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재상 출신의 높으신 분의 별장을 짓는다는 핑계로 학숙이 폐쇄당하는 등 갖은 수모를 겪은 끝에 결국 몇 개월 만에 쫓겨 나는 신세가 된다. 숙청당한 지 8년이 지나고 있었지만 아직도 그는 요시찰 인물이었으며 활동에 제한을 받고 있었다.

 

양주와 부평을 거쳐 온 곳이 김포였다. 부평부사의 도움으로 김포로 거처를 옮겼지만 주위엔 양주와 부평처럼 지인이 없었다. 그리고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허름한 초려를 얻었을 뿐 또다시 소작을 해서 민생고를 해결해야 만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농사밖에 없었다. 복권은 깜깜무소식이었고, 계속 박해를 받은 것으로 보아 지금보다 더 나은 생활은 보장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이제 나이도 마흔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세상의 부조리를 질타하고 혁명을 꿈꾼다는 자체가 사치였다. 또한 세상에 대한 분노도 사치였는지 모른다. 혁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식솔들을 어떻게 하면 굶기지 않을까 하는 삶의 의지, 본능만이 전부였다. 세상은 그를 잊었고, 그도 세상을 잊어 가고 있었으며, 원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꿈과 같이 정몽주가 김포 초막으로 찾아왔다. 1383년 여름이었다. 얼마 만인가, 그래 9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도전은 그가 가져온 술로 회포를 풀었다. 정도전과 함께 유배를 갔던 그는 1년 만에 복권된 후 조정에서 외교와 관련된 주요한 일을 해왔다. 그리고 몇 개 월 전에는 함경도 함주에 침입한 왜구와의 전투에 이성계와 함께 참전하고 복귀한 후였다.

 

동심우라 서로를 부르던 두 사람은 이제 세파에 찌든 중년이 되어 있었다. 정도전 보다 여섯 살 많은 정몽주의 머리는 반백이 되어 있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에 주름이 깊게 파인 정도전의 얼굴은 정몽주 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는 이성계와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정몽주는 20대 중반 관직생활 초기에 함경도에서 당시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젊은 무장 이성계와 처음 만난다. 여진족과 원나라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백전백승하고 있던 이성계의 종사관 즉 군영 수장의 보좌역으로 부임하여 당시 여진족 토벌전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1380년 전라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고 있던 왜구를 토벌하는 전투 즉 황산대첩에 삼도 도원수 이성계와 함께 조전원수 자격으로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또한 몇 개월 전에도 함경도 함주에서 왜구를 몰아내는 전투에서도 함께했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여러 전투에 함께 참전한 전우였다. 이성계는 정몽주보다 3살 많은 동년배였으며, 무엇보다 두 사람은 인간적인 관계가 돈독하여 우정의 순도는 정도전보다 결코 낮다고 할 수 없었다. 이성계와 정몽주 그리고 정도전의 관계는 이렇게 엮어진다.

 

당시 이성계는 고려의 영웅이었다. 북으로는 여진족과 원나라의 침입을 격퇴했고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토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그는 최영을 능가하는 국민적 장수가 되어 있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인간됨을 정도전에서 역설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장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알며, 항상 겸손하고 침착하고, 무엇보다 인식체계가 개방적이고 유연하여 개혁에 대한 인식이 열려있다고 했다. 요즘 표현으로 오픈 마인드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실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와의 교류가 활발했는데 아마도 정몽주의 영향이 컷을 것이다.

 

정몽주가 이성계에 대해 설파하는 이유는 바로 정도전에게 연결고리를 이어 주기 위함이었다. 고려의 개혁은 지지부진하여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정도전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조합, 고려 제일의 무장이면서 덕을 갖춘 이성계와 성리학 학자이면서 혁명적 기질을 가진 정도전의 조합, 냉정한 피와 뜨거운 피의 조합, 정몽주는 이 조합에 도박을 걸었는지 모른다. 이 난세에 영웅이 필요하다는 역사적 특명을 받았으리라.

 

순간의 결정에 뜨거운 피가 관여되지 않는다면 역사는 권태로울 뿐이다. 장량이 진시황 암살에 실패한 후,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바로 그 분노가 유방을 찾아가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로 인해 유방은 한고조가 되지 않았던가. 역사적 운명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뜨거운 피에서 발원한다. 무너질 것 같은 어느 초막에서 발화된 불씨는 거대한 불길을 이끌어낸다.

 

1383년 가을로 접어드는 어느 날, 정도전은 전대를 매고 김포 초막을 떠난다. 그리고 긴 여정 끝에 함경도 함흥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와 만난다. 역사는 이 순간을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혁명의 불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후 정도전이 어떻게 혁명에 이르게 하는지 잘 알고 있다.

Posted by 안호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