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3일
아침 눈을 뜰 때까지 어디를 갈 것인지 정하지 못했다. 일곱 시 경에 눈은 떠졌지만 몸은 구들장 짊어지고 여전히 이불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토요일 달콤한 늦잠은 항상 그렇듯 산행을 방해한다. 그렇다고 제대로 잠을 청하지도 못하면서 괜시래 몸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머릿속에선 여러 산 중 명성산과 운악산 두 개로 압축을 한다. 여덟시가 되자 몸은 일단 일어난다. 그리고 세면을 하고 거실로 나오자 문득 운악산의 망경대가 뇌리를 스친다. 그래, 운악산에 가자꾸나. 이렇게 운악은 운명처럼 나의 간택(?)을 받는다.
▲ 운악산 들머리에 있는 안내도. 운악산엔 이런 안내도가 잘 배치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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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리에서 올라가는 운악산도 일품이지만 일동에서 오르는 코스도 그보다 결코 뒤지지 않다. 특히 무지치폭포 - 망경대 - 운악사 코스는 북한산도 서러워할 정도로 산세가 화려하고 조망도 뛰어나다. 전형적인 암릉으로 이루어진 운악산은 '돌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마치 전남의 월출산과 닮았다. 아마 경기의 설악이라고 불리어도 나무랄데가 없을 것이다. '악'소리 날 정도로 힘들다는 의미에서 3악이 있는데 설악, 치악,월악이 그것이다. 하지만 월악 자리에 운악을 놓겠다고 나는 감히 주장해 본다.
▲ 정상 안부에서 본 내운악의 절경. 저 너머로 일동이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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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자신의 비경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는다. 산은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힘듬을 강요한다. 산책 정도의 노고로서 산의 속살을 보겠다는 것은 대단히 큰 오산이며 욕심이리라. 산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운악도 마찬가지다.
▲ 애기봉에서 사라키바위로 가는 능선. 소나무는 강한 바람에 뿌리를 까뒤집어 놓았다. 자신의 치부를 다 들어낸 소나무는 부끄럽다. 하지만 그것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소나무는 잘 알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이것 또한 풍광이 되고 산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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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키능선에서 본 운악 주능선. 오른쪽이 정상이다. 왼쪽은 현등사에서 올라오는 코스다. 4월 하고도 중순이지만 잔설은 가시지 않는다. 그렇듯 산에선 봄은 더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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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에는 궁예의 흔적이 있다. 명성산에도 궁예의 흔적이 있지만, 운악에도 그가 남긴 진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는 왜 이 험한 산에 숨어들어 왔을까.
▲ 무지치폭포 옆에 있는 석굴. 몇명 정도 비박하기 딱 좋은 장소다. 궁예도 이 석굴에서 잠시 기거했는지 모른다. 문득 그의 체취를 느끼고, 그리고 뒤다라 엄습해 오는 이 섬득함은 무엇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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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부하였던 왕건에게 배신을 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 궁예는 명성산에서 저항을 하다가 많은 부하를 잃고 이곳 운악으로 숨어 든다. 명성산에서 30여리 떨어진 운악은 산세가 험하여 방어하기에 적격이라고 궁예는 생각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배수진을 치듯 넘을 수 없는 산을 등지고 마지막 불사항전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도망다니지 않으리라. 그의 자존심일 수도 있다.
▲ 하늘로 솟아 있는 망경대. 저기를 넘어야 정상을 갈 수 있고, 현리까지 다다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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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이 험한 산에 집을 짓고 산성을 만들었다. 그 흔적이라고 안내문이 설명하고 있는데, 우선은 믿고 싶다. 역사학적 유물이 발굴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믿지 못할 것은 없다. 풍설도 근거가 있기 마련이다.
▲ 궁예가 만들었다는 산성 장소. 굳이 성을 만들지 않더라도 이곳은 성으로서의 역활은 다한다. 자연요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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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산을 오르내리면서 그는 와신상담하며 권토중래를 꿈꾸었을까. 천하를 호령하던 그가 아닌가. 부패한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꿈꾸지 않았던가. 그에게는 한 때 수많은 장수와 인재들이 몰려들었고 백성 또한 그를 왕으로 섬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수십의 병사와 이 운악 뿐이 없다. 빈손으로 가기엔 너무나 허망하지 않은가.
▲ 궁예성 위에 있는 사자부바위.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은 감히 인간이 넘볼 수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침식에 의해 만들어진 대자연의 모습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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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면경대에 앉아 저기 명성산 너머 철원을 사무치는 회한의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가장 믿었던 부하 왕건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의 왕조여야 할 이 땅이 왕건의 것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렇게 된 현실을 어느 누가 믿겠는가. 천하의 궁예가 아니었던가. 왕건 이놈 천벌을 받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살을 뜯는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천운은 왕건을 선택했고 그는 거기까지였다. 불행하게도 그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역사는 그를 패륜아라고 쓴다. 그는 패자였다. 만약 그가 승자였다면 왕건이 패륜아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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