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들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 거대한 변혁기를 구분할 때 광물질의 명칭을 끌어다 쓴다.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세련된 표현은 아니지만 돌과 구리와 철이란 광물질의 이름을 앞에 다 붙인다. 그만큼 광물질은 새 시대의 격변을 주도하는 요소이며 대문명의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청동기인들은 철기인들에게 쫓겨나고 흡수되었으며 문명의 발전 속도는 광범위하고 급속하게 변하는 것을 역사에서 볼 수 있다.

19세기에 접어 들어서 인류는 이제 철기시대가 가고 석유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선언한다. 18세기 산업혁명 후 시장경제와 과학문명이 빠른 속도로 팽창하던 시기에 무언가 부족한, 그러니까 석탄으로는 풀 수 없는 답답한 그 무엇이 팽배해 있었으며 바로 그 막힘을 해소해 준 촉매제가 석유였다. 석유가 세상에서 빛을 보자 문명의 속도는 급속하게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3000천여 년의 철기시대가 저물고 바로 석유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석유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고래 이야기를 하겠다. 산업혁명 후 문명이 발전하고 삶의 질이 향상되자 인간의 욕망은 보다 넓은 지평으로 향했다. 야간의 남는 시간에 질 좋은 문화생활을 위하여 그들은 불빛을 갈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보다 더 선명한 양질의 글 읽기와 저택에서의 우아한 실내악 연주회와 지인들과의 화려한 연회 등, 빛의 소중함을 인식한 그들은 보다 질 좋은 빛을 원했다. 상대적으로 밝지도 않고, 그을음이 많고, 오래 타지도 않는 동식물성 기름을 배척하고 새로운 조명용 연료를 구하기에 혈안이었다.

그 갈망을 채워준 것이 고래기름이었다. 고래기름은 19세기인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최고의 상품이었다. 고래기름 중에서도 향유고래의 머리에 있는 경랍 부위가 고퀄리티의 기름이었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18세기 중엽부터 거친 대서양을 주름잡던 미국인은 포경산업에 눈을 돌리고 고래를 사냥하기 시작했다. 허먼 멜빌의 백경이란 소설의 주된 배경이 바로 향유고래와 사냥꾼의 이야기이다. 멜빌은 성난 바다 한가운데에서 고래와 인간의 목숨을 건 사투를 보여주고, 그리고 인간에 대한 고래의 노여움을 마지막 피쿼드호가 침몰하는 장면에서 보여준다.

1864년 미국의 기록을 보면 당시 포경선이 735척이었다고 한다. 등유가 등장할 무렵인 1865년에는 고래기름 1갤론(3.785리터) 당 1달러 77센트하는데 그 금액은 현재의 휘발류 가격의 20~30배와 맞먹었으며, 당시 노동자의 3일치 노임이라고 한다. 이렇게 고부가가치의 고래기름을 모험과 개척정신의 화신인 아메리카인이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당연히 미국이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산업이었다.

19세기 중엽에는 고래 포획의 도가 지나쳐 지구상의 고래가 멸종 위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의 포경선은 고래를 쫓아 대서양을 넘어 태평양의 끝인 일본과 그 안 쪽에 위치한 한반도까지 이르렀고, 인도양의 끝인 남아프리카까지 섭렵하며 광란의 고래잡이에 빠져 있었다. 돈 앞에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그 탐욕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고래도 죽고 그에 상응하는 선원도 죽었다. 혹자는 말한다. 만약 등유가 몇 십 년만 늦게 발명이 되었다면 지구상의 고래는 멸종되었을 것이라고. 이 고래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자연에 대한 씻을 수 없는 과오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고래의 종족을 보전(?)시켜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발견한 등유였다. 석유와 등유를 논할 때 미국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이미 일만 년 가까운 시간동안 인류와 지근거리에서 함께 해 왔지만, 본격적인 석유의 역사는 미국이 출발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마지막 고갈되는 그날까지 석유는 미국과 함께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게스터(1797년~1864년)라는 사람이 있었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1827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병원을 운영하면서도 지질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본업인 의사보다도 그는 지질학자로서 더 많은 명성을 얻는다. 지질학의 보고인 캐나다의 자연환경은 그가 지질학자로서 도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준다. 화석탐사연구와 광물학 분야에 매진한 그는 여러 가지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석탄과 원유와 증유석유'라는 저서이다. 그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석유에 대해 관심 이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주변에는 땅에서 스며 나오는 역청질의 석유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땅에 대한 것이라면 모든 것에 관심 대상이었던 그는 석탄과 코르타르를 채취하여 연구에 매진했다. 수없이 많은 실험과 실패를 하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석유를 끊여 증유시키기를 수없이 반복하던 그는 섭씨 150도가 넘어갈 지점에서 증유하는 기체를 액화시킨다. 시험관을 통해 비이컵으로 뚝뚝 떨어지는 액체를 그는 지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인류 최초로 석유를 정제하여 등화용 기름, 즉 등유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그 액체에게 케로신이라고 명명한 후 미국에 가서 상표특허를 낸다. 1854년에 일이다. 사실 최초의 등유 발견에 대해 얘기가 분분하지만 공신력 있는 기록이나 객관적인 상황을 볼 때 게스터가 주인공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게스터가 발견한 케로신은 시장 경쟁력 측면에서 볼 때 실험실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시장에 내놓고 팔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을 생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등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석유 채취 기술이 미개했고, 또한 생산설비를 구축하기에도 환경이 열악했기 때문이다. 대도시 일부 지역에서 알음알음 판매하는 수준이었다. 만들면 뭐하나. 팔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데. 사실 등유 시장이 형성되기엔 캐나다라는 경제적 공간은 적절하지 않았다. 주체하지 못하는 모험과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미국이 등장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인지 모른다.

아브라함 게스터와 동시대에 미국에는 조지 비셀(1821년~1884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역시 게스타와 같이 석유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기자 출신 변호사였다. 그는 캐나다와 가까운 미국 동북부에 있는 펜실베니아 출신이었다. 뉴욕 월가에서 잘나가는 투자 전문 변호사였던 그는 1853년 휴가차 고향인 펜실베니아로 간다. 그는 어느 날 고향 지역을 한가롭게 돌아다니다가 절개지에서 햄버거 소스처럼 흘러나오는 시꺼먼 역청을 본다. 역청은 사실 오래전부터 그 지역에서 항상 보아오던 것이기에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주민들은 그 역청으로 이미 오래 전 원주민이 그랬던 것처럼 각종 진통제나 피부질환과 타박상의 치료제나 심지어 감기나 발열증상이 있을 시에 바르고 먹는 일종의 만병통치약이었고 일종의 집안의 상비약이었다. 50년 후에 등장하는 바셀린 보다 오히려 더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하지만 그날은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어떤 직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주위에서 무심코 주어들었던 석유에 대한 이야기들이 모여 그에게 어떤 생산적 영감을 일으키게 했는지 모른다. 각종 호기심이 왕성했던 19세기 미국의 분위기를 볼 때 그의 영감은 개연성이 충분했을 것이다.

비셀은 어릴 적에 동네에서 석유로 횃불을 만들었다는 기억을 떠올렸고, 그 석유로 조명용 램프 연료로 변형시킬 수 있다는 영감을 얻었던 것이다. 피타고라스가 유래카를 외친 것처럼 그의 발상은 획기적이었다. 그는 그 발상을 발상 자체만으로 여기지 않고 사업성이 충분하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펜실베니아와 가까운 뉴헤이븐으로 간 그는 우선 펜실베니아 록오일 컴퍼니라는 회사를 설립한 후 먼저 석유 샘플을 가지고 당대 최고의 화학자였던 예일대 교수 실리먼을 찾아갔다. 실리먼은 삼십대 초반의 당돌한 젊은 변호사인 그를 처음엔 탐탁하게 보지 않았다. 시꺼먼 점액질이 든 병을 내밀면서 석유의 성분 분석과 질 좋은 램프용 연료 축출 여부 등에 관한 연구를 의뢰하는 비셀의 태도에 그는 신뢰를 줄 수 없었다. 최고의 과학자 입장에선 생뚱맞게 찾아와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비셀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비셀은 삼고초려 끝에 승낙을 얻어냈다. 그는 연구비 명복으로 약 500달러(현재의 달라 가치로 10만 달러)를 보고서와 교환하는 것으로 합의를 본다.

실리먼은 연구를 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석유에서 정제되는 물질에 대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비등점에 따라 성격이 다른 물질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석유의 가치를 인식한 것이다. 그 당시 식자들이 알고 있었던 약제나 윤활류나 난방유 정도의 가치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말이다. 등유도 물론 훌륭한 물질이었지만 그것을 축출하고 남은 찌꺼기인 유활류도 그 당시 철도와 각종 기계제품에서 품질 개발을 손꼽아 기다리는 훌륭한 품목이었다. 또한 가장 먼저 축출되는 가솔린이란 액체도 휘발성을 이용하면 드라이크리닝 세탁용으로 적합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버릴 것이 없는 참 알뜰한 물질이었던 것이다.

연구 시작 한 달 후, 과학자이면서 교수였지만 세속에 눈이 밝았던 실리먼은 보고서 완성 후에 받기로 했던 연구비 일부인 100달러를 미리 지급해 줄 것을 비셀에게 요구했다. 생각지도 않은 실리먼의 요구에 비셀은 난감해 했다. 그 돈을 마련하려면 투자자들을 설득해야 하는 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차일파일 시간이 지나자 실리먼은 하던 일에서 손을 놓고 남부지역으로 가서 침거를 해버린다. 배짱이었다.

비셀은 황망했다. 그는 자신이 잘 아는 투자자에게 읍소하여 겨우 100달러를 만들어 수소문 끝에 실리먼을 찾아가서 그를 겨우 데리고 올라온다. 이런 비화가 있을 정도로 실리먼은 이기에 밝았다. 또한 나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석유사업이 성공했을 때 그는 주식을 양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주식 200주를 받아내었다고 한다. 당시의 교수 급료가 넉넉하지 않았고, 많은 식솔과 연구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돈이 필요했겠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며 이미 오래 전부터 과학자로서 금도를 벗어났다는 등의 구설수가 회자되고 있었다.

비셀에겐 무엇보다 보고서가 필요했다. 투자자를 모으기 위해서는 최고의 공신력을 가진 보고서가 필요했고 그 적임자가 실리먼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석유에 대한 연구 보고서만 있으면 더 많은 투자자를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다고 비셀은 확신했던 것이다. 비셀은 실리먼의 요구를 다 들어 줄 수뿐이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6개월 후 비셀은 학수고대하던 실리먼의 이름이 들어간 보고서를 받았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석유는 각기 다른 비등점에서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물질들이 분류되었고, 그 중에 고래기름을 능가하는 고품질의 등유를 축출할 수 있다고 보고서는 말하고 있었다. 바로 현대식 석유 정제의 시작이었다. 그는 그 보고서를 앞세우고 많은 투자자를 모았다. 본격적인 석유사업의 깃발을 올린 것이다.

우선적으로 생산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석유를 대량으로 채굴할 수 있는 장소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탐사와 채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백지 상태에서 새롭게 습득해 간다는 것은 선지자적인 마인드가 없으면 결코 진행될 수 상황이었다. 통찰력과 집념이 결합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여튼 그는 수소문 끝에 대주주인 제임스 타운센드에게서 탐사 채굴 책임자를 소개받았는데 그가 바로 41살의 룸펜인 에드윈 드레이크(1819년 ~ 1880년)였다.

뉴욕주 그랜빌 출신인 드레이크는 농부인 아버지를 따라 농삿일을 하다가 20대 중반에 도시로 진출한다.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는 촌놈은 가게 점원과 호텔종업원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철도회사에 취직을 한다. 그리고 그는 철도 업무에 적성이 맞았는지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 좋은 자리까지 올라간다. 좋은 직책이 고작 철도 승무원이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 철도 산업이 최고의 인기 업종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쳐지는 직업은 아니었다. 그러게 나름 잘나가다가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직을 했는데 회사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평생 무료승차권을 선물한다.

전부터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는 퇴사 무렵 이혼을 하고 딸과 함께 뉴헤이븐에 있는 톤틴호텔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철도회사 직원들의 대우가 상당했다고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월급쟁이 출신의 실업자가 호텔에 장기간 묵는다는 것은 그의 허세가 어떠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바로 비셀의 동업자 타운센트와 운명의 조우를 한다. 타운센트는 업무상 그 도시에 오면 톤틴호텔에서 며칠씩 묵곤 했는데 로비에서 입심 좋은 드레이크와 종종 어울리게 되었다. 드레이크는 다소 허풍끼가 좀 있고 만물박사 스타일로 말이 많았지만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남을 속일 수 있는 위인도 되지 못했다.

다운센트와 드레이크는 자연스럽게 석유사업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운센트는 석유사업의 리더가 뉴욕 월가 어느 건물에서 염정의 시추탑 사진을 보고 그 방법으로 석유를 채굴하면 어떨까 하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드레이크에게 말했다. 그 때 드레이크는 내 고향에서 어릴 때 중국인들이 염정에서 시추기를 설치하고 염수를 끓어 올리는 것을 많이 보아서 그 방법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특유의 허풍을 떨었다. 자신이 직접 그 일을 해보지 않았지만 눈에 익은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그 후 다운센드는 드레이크가 자신들이 찾고 있던 석유 굴착의 적임자임을 직감하고 비셀에게 드레이크를 채굴 책임자로 소개했다. 베셀은 진실성이 다소 부족해 보이는 드레이크를 보고 찜찜했지만 그에게 과감하게 채굴에 관한 전반적인 임무를 맡겼다. 일설에 의하면 드레이크가 철도 평생 무료 이용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안 다운센트가 조금이나마 비용을 절감할 차원에서 그를 고용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가십거리에 불과할 뿐 채용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하여튼 드레이크와 비셀은 의기투합하여 지도를 놓고 시추지역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비셀의 고향인 펜실베니아에는 오래전부터 석유 유정지역이 많았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연못처럼 고여 있는 석유를 그릇으로 퍼 날랐고, 지하수는 헝겊 등으로 걷어내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석유를 수집했었다. 그 많은 유정 전부에 다 시추기를 설치할 수 없었다. 그만한 인력과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장 적당한 곳을 검토한 끝에 타이터스빌에 소재한 오일크리크라는 작은 인디언 마을을 선택했다. 가장 유력한 지역이었다. 동네 이름에 나타나듯이 그 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석유에 대한 이야기가 원주민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또한 그 당시에도 마을 곳곳에서 끊임없이 검은 석유가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목재용 벌목으로 먹고 사는 타스터스빌은 인구가 고작 120여 명 되는 산골 소도시이었다. 그 마을에 특수 임무를 띤 드레이크가 급파되었다. 우선 급파되기 전에 타운센트는 전략가답게 그 동네에 다 선작업을 해놓았다. 낯설고 텃세가 강한 시골동네의 특성을 감안하여 드레이크 대령 앞이라는 우편물 몇 개를 타이터스터빌 우체국으로 보냈다. 그 당시에는 우편물을 우체국에 가서 찾아와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우편물 표지가 눈이 띄기 쉬웠다. 드레이크 대령이 누구지? 그 사람이 우리동네 사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대령 정도 되면 사회적 지위가 범상치 않았다. 그러니까 드레이크란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사전 포석을 해놓은 것이다. 타이터스빌 사람들은 드레이크가 마을을 완전히 떠날 전까지 그를 드레이크 대령이라고 불렀다. 

1857년 2월이었다. 특수임무를 띤 드레이크는 2주간의 마차여행 끝에 타이터스빌에 잠입했다.  타운센트가 맛사지 작업을 해놓은 타이터스빌은 예상 대로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시추라는 뜻도 모르고 석유에 대한 가치도 모르는 주민들에게 그는 어렵지 않게 싼 가격에 땅을 매입했다. 탐사를 할 수 있는 장비나 기술이 전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는 현재 눈으로 보이는 유정을 골라 땅을 매입할 수뿐이 없었다. 한마디로 감이었다. 드레이크의 직관에 성공여부가 달렸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다. 무엇보다 돌팔이 공학자 드레이크가 총 책임자라는 것이 무모함을 더해 주었다.

그렇게 땅을 매입하고 뉴헤이븐으로 돌아온 드레이크는 시추에 필요한 준비에 몰두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떠벌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 그런 일은 비밀스럽게 진행되어야 함에도 그의 입은 가만있지 않았다. 석유의 특성이나 시추에 대해 대중적으로 전혀 생소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설명을 하여 납득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당시는 사기꾼들도 득실거리는 무질서한 사회 분위기여서 드레이크의 말은 허무맹랑 얘기로 들리기에 충분했다. 그런 상황인데도 드레이크는 그들과 열띤 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들에겐 한마디로 뜬구름 잡은 허황된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856년 3월 드디어 드레이크는 시추장비와 투자자에게서 받은 자금과 청운의 꿈을 품고 타이터스빌로 장도에 올랐다. 자신을 멸시한 모든 이에게 복수를 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시추작업에 몰두한 그는 우리가 아는 솜털처럼 가벼운 드레이크가 아니었다. 그는 진지했다. 작업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했다. 오직 시추에만 관심 있는 괴물이 되어 갔다. 작업자들이 그의 매몰찬 지휘에 머리를 흔들며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사안에서도 작업은 순조롭지 않았다. 시행착오가 많았다. 세계 어디에서도 실행해보지 않은 작업이기에 당연한 현상이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기계소리만 요란할 뿐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천공 숫자만 늘어났다. 드레이크는 시시때때로 타운센트에게 자금을 요청했다. 처음 하는 작업이라 예산을 확보하는 데 어떤 규칙과 공식이 없었다. 그 때마다 타운센트는 투자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겨우겨우 자금을 마련해 주면 몇 개월 후 다시 자금 요청이 들어오곤 했다. 대책이 없었다.

현재 석유개발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사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인력으로 시추기를 돌리는 공법으론 암석층을 뚫을 수가 없었다. 드레이크는 그 대체 공법으로 증기기관을 이용한 동력장치를 고안하여 설치하였다. 그리고 대대장이를 고용하여 현장에서 부족한 공구나 자재 등을 만들어서 사용하였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방법이 아니었다. 작업을 하면서 연구하고 기획하여 진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 또한 이를 따라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일 년이 훌쩍 지나 1859년 봄이 되었지만 진척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돈만 소비되고 있었다. 투자자들은 이제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듯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타운센트는 투자자들은 다독였다.

타이터스빌은 돈 먹는 하마였다. 깨진 독에 물 붙기였다. 드레이크는 미친 듯이 땅에 구멍을 뚫었다. 수십미터를 뚫고 버려진 시추 구멍들이 널브러져 있고 다시 세운 시추기들이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드레이크 자신도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몰입했다.

8월의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벌목으로 인해 더욱 뜨거웠던 타이터스빌은 시추기 증기기관에서 뿜어대는 열기가 더해져 미친 듯이 타오르고 있었다. 타운센트는 드레이크에게 편지를 썼다. 이쯤에서 우리의 뜻을 접어야겠다는 내용이었다. 투자자들이 이제 두 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편지는 우체국에 전해졌다. 그런 상황을 아직도 모르는 불쌍한 우리의 드레이크. 신은 그의 열정에 감명을 받았는지 모른다. 드디어 1859년 8월 28일 시추기에서 검은 석유가 하늘로 치솟으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암석층에 걸린 시추기는 하루에 몇 cm씩만 파고 들어가는 지루한 진행을 보였고, 며칠 전부터 관련자들이 시추봉을 들어 올리자고 드레이크에게 종용을 했지만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그날은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숙소에 가서 깊은 잠에 빠져든 상황이었다. 당신 뜻대로 하소서(May Your will be done). 그렇게 그날 아침, 수억 년간 깊은 땅속에 숨어 있던 석유가 한 인간의 집념 앞에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그 후 오일크리크에는 수많은 석유 사냥꾼들이 몰려들었다. 오일러시가 시작된 것이다. 캘리포니아로 골드러시가 일어났듯이 타이터스빌 오일크리크로 오일러시가 일어났다. 고작 등유 하나 때문에 그런 광풍이 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지만 불빛이라는 존재가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가치의 크기를 가름은 할 수 있다. 또한 단지 등화용 연료로서의 가치만으로 오일러시가 불었다는 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소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우리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설계자이며 CEO격이었던 비셀은 꽤 많은 돈을 벌어 고향에 가서 대학에 기부도 하면서 잘 살았고, 살림꾼이었던 타운센트는 소문에 의하면 그리 잘 풀리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우리의 호프 드레이크는 석유에 관한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다 말아먹은 후 말년에는 펜실베니아주 정부에서 주는 소액의 연금으로 겨우겨우 살다 죽었다고 한다.

드레이크가 조금만 영악했다면, 그는 자신이 미치도록 갈구했던 진정한 의미의 검은 황금을 얻었을 것이다. 그는 기술자로서의 자질은 상당했지만 불행하게도 경영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뒤에 등장하는 존 록펠러(1839년~1937년)를 1%만 닮았어도 그는 시추기술에 대한 특허를 신청하여 미래를 도모하였을 것이다. 시추개발의 공로로 주정부에서 주는 월 몇 달러의 연금에 연연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추후에 그런 사실을 깨달은 그는 땅을 쳤지만 이미 자신이 고안한 시추기들이 미국대륙을 뒤덮고 있는 뒤였다.

석유정제 방법과 대량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굴착기술과 그리고 고부가가치의 시장경쟁력이 세상에 들어나자 몇 년 사이에 수백 개의 석유회사들이 난립을 했다. 저작권도 없고 사업권을 제한하는 법도 없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석유사냥꾼들이 대륙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당시에는 돈 되는 사업의 징후가 보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몰려들던 시기였다. 적자생존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했다.

십여 년이 흐른 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록펠러라는 천하의 고수가 등장하여 혼란했던 미국의 석유시장을 평정한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시작이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양육강식이 어떤 것인지 록펠러는 우리에게 선명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룡이 끊임없이 폭식을 하여도 체하지 않고, 비대함으로 인해 어떠한 경우에도 불편함을 격지 않는다는 현상 또한 임상으로 보여준다. 신이 준 선물이 인간의 탐욕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1880년 드레이크가 겨우 먹고 살만한 연금으로 연명하다 골방에서 외롭게 눈을 감을 때 석유의 석자도 몰랐던 록펠러는 미국의 석유시장을 90%이상 점유하기에 이른다. 석유의 제국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석유 트러스트의 시작이었다.

 

오마이뉴스 기고 201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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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