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탐욕이 없다면 한낱 사바나에 어슬렁거리는 사자와 다를 게 없다. 직립보행을 하면서부터 인간은 식욕과 성욕에 이어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탐욕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탐욕은 보다 나은 삶의 향상을 위해 불을 만들고 돌을 쪼아 연장을 만들었으며 또한 사람을 죽이고 열등한 문명을 파괴하였고 결국 신의 섭리에 도전하는 위치에 까지 다다르게 했다.

 

우리는 탐욕이 인류 문명의 발전에 동력원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2000여년 전 부처와 예수는 그 탐욕은 잡아먹어야 할 괴물이라고 설파했다. 이미 2000년 전 탐욕의 폐단을 부처와 예수도 익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많이 파괴하였는지 그 실상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탐욕과 인간과의 싸움은 영원한 숙제인지 모른다.

 

군웅할거의 시대, 공자 장자 노자 등이 우주의 이치를 설파하던 시대, 그 선인들의 설파를 기록으로 남겨 사상의 르네상스를 연 백가쟁명의 시대, 관포지교 오월동주 와신상담 합종연횡 등 수많은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시대, 역사가는 그 시대를 춘추와 전국시대를 합친 춘추전국시대라 칭했다.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221년 약 550년 동안 지속되었다. 여기서 춘추전국시대 550년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집고 넘어 가겠다. 당시 형식상 가장 상층의 권력자는 주나라 즉 동주의 천자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혀 실권이 없었고 제후라 불리는 영주들이 각자 왕이라 칭하고 지역을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주나라 초에는 정책적으로 땅을 왕족이나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 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제후들의 힘이 강해지자 스스로 왕이라 하였고 그에 따라 천자의 권능이 약해지면서 중원이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바로 봉건제의 시작과 끝이었다. 춘추시대 초에 약 1000개 이상의 제후국들이 난무하다 춘추오패 즉 10개의 나라로 정리되었고 기원전 400년 경 이후 다시 수많은 전쟁과 병탄 합병 등을 거쳐 전국칠웅의 시대가 200여년 지속되었는데 그 시대를 전국시대라 한다. 그리고 그 두 시대를 합쳐 춘추전국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위 제 진 한 조 연 초 등 전국칠웅이 중국 대륙을 분할하여 지배하던 전국시절, 가장 변방인 서쪽 끝 척박한 땅을 지배하던 진나라의 소양왕이 56년 동안 재위하면서 부국강병에 매진하고 또한 책사인 범저의 원교근공 정책을 받아들여 진나라를 가장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자인 진시황이 그 토대를 기반삼아 10년의 기간을 거치며 나머지 6개국을 정복하여 천하를 평정한다. 기원전 220년 진시황 나이 39살 때였다. 13살에 장양왕의 뒤를 이어 진의 왕이 된 후 26년이 지난 무렵이었다. 당시 개념으로는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천하는 주나라 천자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가 존재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으며, 서로 이합집산 합종연횡하는 현상은 하늘의 이치였다. 바로 그런 중원의 패러다임를 깬 것이 진시황이었다.

 

천하를 제패한 진시황은 먼저 화폐와 문자와 도량형 등을 통일시켰다. 그리고 500년 이상 중원을 혼란하게 만들었던 봉건제를 없애고 군.현제도를 도입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그 제도는 그 후 중국의 모든 왕조들의 기본적인 통치제도가 되었다. 그러한 제도들이 비록 진나라에서 빛을 보지 못했지만 한나라에서 그 제도를 이어받아 계승 발전시켰다. 초한지에서 보듯 항우를 제거한 유방이 진나라를 무너트리고 한나라를 세웠지만 진시황 때의 제도를 비토하지 않은 것을 보면 유방 한고조의 현명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진나라와 법가에 대해 잠깐 얘기하고 가겠다. 춘추전국시대는 유가, 도가, 묵가, 명가, 법가 등 제자백가 사상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진시황의 5대 조부인 효공(그 당시만 해도 진나라의 지도자를 왕이라 칭하지 않음) 시절 진나라는 상앙에 의해 처음으로 법가사상을 통치기반으로 삼아 법치국가를 만들었다. 100여년 전부터 기반을 다져온 법가사상을 진시황이 이어 받아 더욱 강고하게 다졌다.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통치철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로인해 아이러니하게도 통일 진나라의 생명이 20년도 가지 못했지만, 통일천하 된 대제국 하에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모른다. 명검도 주인을 잘 만나야 명검으로서 진면목이 나타나는 법이다.

 

진시황이 통일전쟁을 벌이기 전, 법가사상에 심취해 있던 진시황은 어느 날 우연히 한비자가 지은 법가에 대한 서적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에 자신의 참모 중에 한비자와 인연이 있던 이사에게 명하여 한비자를 진나라로 영입하게 했다. 이사는 과거 순자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었고 그 동문 중에 한비자가 있었던 것이다. 동문수학한 동창이었다. 하여튼 이사는 한나라 왕족 출신인 한비자를 현란한 술수를 발휘한 끝에 진나라로 불러들여 진시황의 어전 앞에 앉혔다. 자신에게 감명을 주었던 학자를 마주한 진시황은 크게 만족을 하여 그를 자신의 참모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울지도 모른다고 염려한 이사는 그를 모함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한비자의 학문 수준이 자신보다 훨씬 우월하여 자신의 영달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진시황의 미래를 볼 때, 그 당시 한비자는 진시황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법치주의로 무장하게 한 원인 제공자인 것만큼은 주지의 사실이다.

 

진시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폭군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행정적인 부분에 들어가면 일 중독자처럼 업무에 대한 욕심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 뒷짐지고 다니며 보고만 받은 게 아니라 하루에 120근 정도 되는 죽간, 그러니까 각 부처에서 올라오는 상당량의 행정 서류를 매일 밤늦도록 파악하고 결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CEO와 비교하자면 회사의 주요 사안을 임원한테 맡기지 않고 꼼꼼하게 직접 챙기는 스타일이었으며 또한 주위에서 피곤해 하는 완벽주의자였다. 이런 스타일도 한비자가 주장한 의 개념에 충실히 따른 결과인지 모른다. 좋게 말하면 나랏일에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런 열정은 순행이라는 통치 행위에서 잘 나타난다. 순행이라 함은 왕이 전국의 군.현을 순시하며 실정을 파악하는 행위인데, 진시황은 한번 나가면 1년이나 걸리는 순행을 제위 기간 10년 동안 5번을 나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위 기간 반을 궁궐 밖에서 보낸 것이다. 그런 통치 행위가 물론 왕의 열정이라고 보아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듯 직접 챙기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는 일종의 편집증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은 마지막 순행에서 병에 걸려 객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제 본 얘기의 중심으로 들어가 보자. 먼저 진시황의 내면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인 조희, 즉 조태후에 대해서 알고 가야 한다. 조태후는 진시황의 성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좀 심하게 표현하면 처음과 끝인지 모른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조희는 진나라 북동쪽에 있던 조나라 어느 귀족의 자녀였는데, 이유는 정확이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젊은 대상이었던 여불위의 애첩이었다고 한다. 다른 역사서나 야사에 의하면 기생 출신의 여불위 애첩이라는 설도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겠다.

하여튼 당시 지금으로 말하면 상장회사 대표이사 쯤 되는 상당한 재력가였던 여불위는 어느날 자신이 공들여 관리하던 자초라는 진나라 왕족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 파티를 열었다. 당시 자초는 근접한 나라끼리 침범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서로 왕족 중에 한 명을 볼모로 두는 외교정책에 따라 조나라에 살고 있던 참이었다. 대상으로서 재력이 상당했던 여불위는 그런 자초에게 펀드를 들어 애지중지 관리하는 즉 지금으로 말하면 고품질의 스폰서를 자처한 것이었다. 사실 자초는 당시 진나라 효문황의 많은 서자 중 한 명에 불과해 신분상승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여불위의 베팅은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었다.

 

여불위는 (야사에는 의도를 가지고 조희를 자초에게 접근을 시켰다고도 하지만) 그 파티에서 조희에게 자초의 시중을 들게 했다. 미색이 출중했던 조희는 자초의 시선을 한순간 확 잡아버렸다. 조희의 미색에 빠진 자초는 술김에 여불위에게 조희를 자신에게 달라고 청한다. 아마도 당시 조희와 여불위의 관계를 몰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왕족이라 하더라도 더구나 볼로 신세인 처지에서 그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 청에 여불위는 기분이 나빴지만 순간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하여 거대한 운명 속으로 빠져든다. 만약 여불위가 거절을 했다면 중국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훗날 자초와 조희에게서 낳은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그 당시 어찌 알았겠는가.

 

그리고 1년 후 조희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 사마천 사기의 여불위전에는 그 자식의 씨가 여불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런 사실관계에 대한 물증은 없지만 그들 관계의 정황상 여불위가 조희와 관계를 맺은 후 자초와 만났다고 하면 충분한 개연성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사기의 여불위 아들 설은 역사가들이 너무 야사로 나간 것이라 하여 신뢰를 하지 않지만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후에 밝혀지지만, 그 근거로 전형적인 도화살을 가지고 있던 조희의 섹스 파트너가 여불위라는 것은 세상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둘은 변강쇠와 옹녀처럼 궁합이 딱 맞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에 대해 얘기하고 가겠다. 자초는 효문황의 첩의 아들로서 20여명의 서자 중에서도 말단에 위치한 존재감 없는 왕족의 일원이었다. 조나라에 볼모로 간 것도 왕가에서 전혀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나라에서 운명적으로 여불위와 조희를 만나고 그러므로 해서 여불위의 눈물겨운 도움으로 효문왕의 정실부인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어간다. 후사를 보지 못했던 화양부인은 여불위의 기획 설계한 계략에 넘어가 별 볼일 없던 자초를 양자로 삼는다. 여기까지 오는 데 수많은 일화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겠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초의 할아버지가 죽자 효문왕이 왕위에 오르고 자초는 태자가 된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미 진시황으로 달려가고 있다. 효문왕은 상중에 그러니까 왕위에 오른 3일 만에 돌연사하고 졸지에 자초가 진나라 왕위에 오른다. 존재감이라고는 전혀 없던 미미한 대군에 불과했던 자초가 왕이 된 것이다. 기원전 250년 진나라 30대 왕이며 바로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이다. 그리고 진시황이 10살 때였다.

 

힘들었던 조나라 시절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진나라에 와서 왕이 된 장양왕은 고작 3년 동안만 부귀영화를 누리고 급사한다.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아버지인 효문왕이 즉위 후 3일 만에 돌연사하고 장양왕도 3년 만에 불의의 객이 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들은 급사한 것일까. 지금처럼 교통사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쟁터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불치의 병이 있다는 기록도 없고, 최고의 음식과 보약과 명의 등으로 건강이 보장되어 있는 상황인데,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한다.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탐욕의 화신들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은 역사에 극히 일부부만 모습을 드러내며 경우에 따라서는 모조리 땅속에 묻힌다.

 

여하튼, 이제 운명의 수레바퀴는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진시황까지 왔다. 기원전 247년 그의 나이 13살이었다.

 

이제 조희는 왕의 모후 즉 조태후가 된다. 나이 어린 왕을 두고 섭정을 해야 하는 위치가 된 것이다. 조나라 지방 귀족의 자녀로서 여불위의 애첩이 되고 운명에 따라 자초의 처가 되어 결국 현재의 자리까지 도달한 것이다. 조태후는 섭정의 많은 부분을 여불위에게 맡겼다. 이미 가능성 1%였던 복권에 당첨되어 재상의 자리까지 올라 있던 여불위는 그것도 모자라 섭정까지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여불위의 이런 놀라운 인생역정은 100여년 후 사마천의 마음을 사로잡아 사기 열전 70편 중 여불위전이라는 한 챕터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처세술의 신으로 추앙 받고 있다.

 

그런데 그 둘은 어떤 사이인가. 이미 십 수 년 전 그들은 연인관계였지 않은가. 여불위가 자초에 올인하면서 야망을 불태운 결과 둘은 헤어져야 했지만 이제 운명은 그들을 다시 은밀한 침소로 인도했다. 어린 왕을 지척에 두고 그들은 회포를 풀었고 그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여불위는 색욕이 정점에 올라있는 조태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린 왕과 주위 환관들의 눈이 두려워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험하다고 판단한 여불위가 이제 정부관계를 정리를 해야 겠다는 이유도 없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조태후의 끝없는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게 큰 이유였다고 한다.

 

이에 고민을 하던 여불위는 함양에서 유명한 노애라는 자의 소문을 듣게 된다. 노애라는 자는 당대의 가장 거대한 음경을 가진 소유자로서 여기서 입에 담지 못할 전설적인 풍설의 주인공이었다. 여불위는 자초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직감으로 모종의 계책을 세웠다.

 

여불위는 그런 노애에게 없는 죄를 씌워 잡아오게 한 후 회유를 하여 환관 직을 주고 조태후의 침소로 드려 보냈다. 위장취업이었다. 그러니까 거세하지 않고 내시의 직책을 주어 태후 거처에 마음대로 출입을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여불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였으니 어느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물론 조태후도 노애의 거대한 음경에 반하여 여불위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제야 여불위는 조태후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노애와 조태후는 궁합이 너무나 잘 맞았다. 조태후는 노애에게 일부종사를 했다. 그리고 자식을 둘씩이나 낳았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태후의 남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파국의 원인이 되었다. 인간의 탐욕은 오직 파국만이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첫 번째 자식을 낳을 무렴 조태후는 여불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함양 밖으로 거처를 옮겨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여불위는 흔쾌히 받들어 조태후와 노애를 도성 밖 웅이라는 곳으로 처소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니까 조태후는 진시황의 씨 다른 동생을 잉태한 것이었다. 남편과 사별하면 열녀문을 세우야 한다는 유교적 관습이 미미했던 시대였지만 동서고금 막론하고 남존여비 풍습이 지배적이었던 2300년 전 엄중한 왕실 법도로 볼 때 조태후의 그런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패륜이었다.

 

진시황이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지난 20살 되던 무렵이었다. 조태후의 몸과 마음으로 총애를 받은 노애의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자신이 거느린 노비가 3000명이 넘었고 조태후를 등에 업고 이권이 개입된 종사에도 적극 관여하였으며 결국에는 자신의 권세를 주체하지 못하고 쿠데타를 자행하게 된다. 조태후에게서 낳은 아들을 제왕으로 옹립하게 위한 모반이었다. 물론 조태후도 그 쿠데타에 동의하였다.

 

노애의 난에 진시황은 진노한다. 대국시대 7웅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진나라였는데 겁도 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당연히 초장에 제압을 당한다, 그리고 노애는 능지처참에 처해진다, 야사에 의하면 진시황이 친히 조태후의 두 아들을 포대에 담아 때려 죽였다고 하는데 그 상태가 사람의 모양이 아니었다고 전한다. 그만큼 진시황이 격노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럼 조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진노한 진시황은 조태후를 변방에 유배를 보냈으나 신하인 모황이 다른 나라 제후들이 이 사실을 알면 등을 돌릴 염려가 있으니 유배를 거두어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이에 냉정을 찾은 진시황은 조태후를 함양으로 불러들여 감천궁이란 후미진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킹메이커 여불위가 남았다. 그도 노애의 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알고보면 여불위로 인해 사단이 난 꼴이었다. 참수를 당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그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노애의 난 이후 3년 뒤 그는 변방으로 유배를 가고, 진시황의 자살을 유도하는 편지를 받고 자결한다. 화려했던 그의 인생은 그렇게 마감을 한다. 역사에 의하면 그는 섭정 기간 동안 큰 업적을 남기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오점을 남기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또한 진시황과 트러블 없이 무난하게 왕을 보필해 왔던 것 같다. 단지 조태후와의 숙명적인 관계로 인해 명이 조금 단축되었을 뿐이다. 사실 난세였던 전국시대에 그나마 20년 이상 고위관직에서 살아남았다면 그의 처세술은 남다른 것이었지 모른다. 진시황이 몇 년 터울을 두고 그를 자결하게 한 것은 최소한의 예를 보인 것이리라.

 

이 사건 이후 진나라에서 조태후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조태후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잡아 사형을 처하라고 어명을 내린 것이다. 그 어명에 걸려 사형을 당한 사람이 무려 2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진나라에서는 조태후의 조자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친모에 대한 분노는 피해의식이 되어 진시황으로 하여금 죽을 때까지 황후를 두지 못하게 하였다. 부정한 짓을 저지른 친모에 대한 콤플렉스는 그의 성격형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미 친모 콤플렉스는 노애의 난 이전부터 그의 무의식을 잠식하고 있었다. 진시황이 13살에 즉위해 20살 노애의 난으로 섭정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친정세력을 구축하기 전까지 그 7년동안의 진시황에 대해서는 역사에 기록된 것이 없다. 그 사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조태후와 여불위 그리고 노애에 관한 부도덕한 행위들만이 기록에 남아 있다. 그 청소년시기 그러니까 사춘기 시절 진시황은 그런 사실들을 인지하고 있었을까? 한비자의 법가사상에 심취할 정도로 제자백가 사상을 가까이 두고 있던 진시황의 영득함을 볼 때 그런 사실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노애와의 관계에 대해 몰랐다고 한다면 진나라 궁궐시스템이 아무리 복잡하고 두텁다 해도 무능력한 왕이 아닐 수 없다. 여불위의 섭정으로 인해 국사에 대해서는 뒤로 좀 물러서 있었다하더라도 조태후의 부정한 행위를 왕으로서 모를 리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조태후에 대한 분노가 사춘기 진시황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은 조태후의 성에 대한 탐욕, 그러니까 그 탐욕에 대한 에너지를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는 유전학적인 측면이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빌리자면 이드 안에 있는 리비도가 초자아를 억누를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다.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강력한 음기의 소유자인 조태후의 피를 받은 진시황은 그런 사실을 거부한다. 조태후의 문란한 행위를 부끄러워하지만 그의 내면은 형태만 다를 뿐 뜨거운 그 무엇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친모의 강력한 음욕과 친부의 권력욕이 합치면 어떤 욕망이 만들어질까?

 

진시황은 그 7년을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면은 용광로처럼 이글거렸지만 그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감정의 표출로 인해 어떤 행동이 뒤따랐다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지 않을 수 없었다. 조태후와 여불위의 권력을 이겨낼 힘이 그에게는 아직 부족했다. 그런 현실을 인식한 그는 침묵했다. 무서운 평정심이었다. 그렇게 냉혹한 탐욕의 에너지는 잉태되고 있었다. 악마적 탐욕은 그의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 후에 나타난 진시황의 화려한 행적을 알고 있다. 10년에 걸친 위대한 천하통일의 여정, 아방궁과 만리장성과 왕릉 등의 거대한 토목공사, 그리고 분서갱유와 불사불생을 위한 끝없는 탐욕을.

 

사실 진시황은 전국 통일까지만 보면 한고조와 모택동을 능가하는 위대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그가 펼쳤던 10년 동안의 외교 정치적 능력은 입신의 경지에 오르고도 남는다. 하지만 통일 후 그가 보여 준 통치력은 한 인간의 탐욕의 오메가를 보여 줄뿐이다. 통치자의 탐욕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한 예로 분서갱유에 대해 알아보고 가자. 분서갱위의 주인공은 진시황이지만 주인공 같은 조연은 이사이다. 결국 CEO의 잘못된 판단으로 회사가 부도가 나지만 믿었던 참모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이사는 성악설로 유명한 그 순자의 문하생이었다. 조선에서는 맹자가 더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순자가 전국구 스타였다고 하며 그의 문하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 한명이 이사였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유명한 한비자도 이사와 동문수학한 제자였다. 학문에 정진하는데 부족함을 인식한 이사는 재빠르게 현실 정치로 경로를 바꾸어 어찌어찌하여 여불위를 알게 되고 그를 따라 진나라로 와서 결국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일조하게 된다.

 

이사는 자신이 모함하여 죽인 한비자처럼 법가사상 신봉자였으며 진나라에 법가를 도입한 상앙의 후계자였다. 한비자가 이론가라면 그는 실천가였다. 법가는 그의 철학이며 종교였다. 그런 통치철학적인 면에서 진시황과 궁합이 딱 맞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분서갱유를 촉발시킨 주도자가 된다.

 

위나라 사람이며 협객의 대명사인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할 때 죽다 살아난 것도 법이었듯이 진나라에서의 법은 너무나 강고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다. 한 예로,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은 백성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하며, 보다 많은 조세를 위해 강력한 법이 작용한 것이니 백성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관습과 도덕의 기준보다 법이 우선으로 작동하여 그로 인해 인심은 사라지고 민심은 흉흉하였다. 무엇보다, 현재의 민주주의처럼 국민이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황제가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비자가 설파한 법사상은 한계가 분명했다. 법은 오로지 황제의, 황제에 의한, 황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백성은 법 앞에 평등한 것이 아니라 황제 앞에서 평등할 뿐이었다.

 

이에 전국의 유생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인간과 도를 근본으로 하는 유가와 묵가와 도가사상 등에 익숙했던 통일된 백성들이 전체주의 체제에 힘겨워하자 유생들이 궐기를 한 것이다. 조선이나 진나라나 유생들은 어디서나 꼿꼿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박사 순우월을 중심으로 한 신하들 중에도 군현제도와 법가의 폐해를 지적하는 부류들도 나타났다. 과거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요소들을 배척하지 말고 일부 유지해야 국가가 안정된다고 주장하였다. 유가와 법가 즉,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질서에 도전하려는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이사는 진시황에게 진나라의 서적과 기술서 등을 제외 6국의 역사서와 제자백가와 관련된 서적들을 소각하고자 강력하게 청하였고 이에 황제는 망설임 없이 결재를 한다. 하여 전국 곳곳에 소장하고 있는 불온서적을 자진신고 해야 하며, 30일이 지난 후 조사하여 발각되면 사형에 처하겠노라고 어명을 선포하였다. 로마의 네로황제급 광기였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갱유였다. 분서 사태로 진나라가 한바탕 소용돌이가 치고 있을 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로장생에 대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는 서복에게 막대한 돈을 투자하였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자 이에 진시황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하지만 진시황은 이에 굴하지 않고 방사인 후생과 노사에게 불로초를 구해올 것을 명령하였는데, 그들은 불로초를 이 세상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의 목숨은 어디로 가나 부지할 수 없는 처지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여 그들은 이런 진시황의 말도 안 되는 행위를 극열하게 비방하는 대자보를 붙이고 자취를 감추었다. 소문으로 만 듣던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세상에 폭로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내부자 고발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 유생들은 그렇지 않아도 분서로 인해 분노가 고조되어 있었는데 더욱 진시황의 폭정에 강력하게 저항한다. 이에 진시황은 자신을 비방한 유생과 방사들과 그리고 후생과 노사와 관련된 사람들을 색출하여 생매장하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함양에서만 그 주검이 무려 460명에 이른다고 했다, 악마적 탐욕의 결과인 이 사건은 진시황의 왕세자 부소에까지 피가 튀겨 결국 진나라가 오래가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기원전 212, 진시황 붕어 2년 전이다.

 

진시황의 죽음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으며 매우 쓸쓸했다. 순행 중 병에 걸려 사망했는데, 음모론과 온갖 추측 만 난무할 뿐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각종 보약에 함유된 수은에 의한 중독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것 또한 추측일 뿐이다. 수은 중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사인이 되는지 모른다. 하여튼 진시황이 죽기 전 유서를 써서 만리장성 축성 현장 책임자로 있는 몽염 집에 기거하고 있던 황세자 부소에게 전할 것을 명했는데, 환관인 조고는 이사와 모의하여 황제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시신을 함양까지 모시고 왔으며, 그 유서 또한 위조하여 부소와 몽염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당시 분서갱유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던 부소가 진시황에 의해 쫓겨나 잠시 변방에 있던 몽염 집에 의탁하고 있었다.

 

황제의 붕어를 숨기고 태자를 바꿔치기한 것은 명백한 쿠데타였다. 그들은 왜 진시황의 후계자인 부소를 거부하고 막내아들 호해를 왕위에 오르게 했을까? 여기서 암살설 등 여러 가지 음모론이 난무한다. 진시황과 그들의 내밀한 갈등과 암투는 무엇이었을까? 그 거대한 욕망의 충돌 에너지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애석하지만 그것이 답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시황이의 욕망이 너무나 강했다는 사실이다. 권력이 강해지면 탐욕은 컨트롤을 거부하며 그로인해 측근에게 꺾이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학습해 왔지 않은가.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다. 아마도 진시황의 죽음은 그래서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인물들이 대게 그렇듯 진시황도 극단적인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절친이었던 클레이토스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지만 그 행위를 후회하고 자괴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했던 반면 진시황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면을 상실한 냉혹한 악마적 분노의 소유자였다. 인간의 탐욕이 무한 증식하여 팽창한 결과 임계점을 넘으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를 진시황의 예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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