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굴의 추억

추억 2012. 4. 26. 14:43

내가 따블백을 매고 처음 자대에 배치된 곳은 일명 ‘개나리’라고 불리던 땅굴 예상지역이었다.


전방의 1월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중대본부에서 며칠 대기 생활을 한 나는 어느 날 저녁, 자대 전령에게 인도되어 대남방송소리가 귀 터지도록 들리는 철책을 떠나 인적 없는 산길로 나섰다. 해는 금방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에 쌓인 골짜기를 구비구비 돌아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나는 유령처럼 전령의 뒤만 따라갔다. 대남방송 소리와 전령의 후레쉬 불빛만이 이 검은 공간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길 옆엔 지뢰밭이야. 조심해."


저승사자 같은 전령은 나에게 저승사자처럼 입을 열었다. 나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였지만, 그렇다고 신출내기인 나는 내심 긴장을 늦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뢰보다도 겨울밤의 짙은 어둠이 나를 두렵게 했다.


내가 따블백을 내려놓은 곳은 연대 예비소대로서 땅굴 예상지역을 경계하는 임무를 가진 다소 의외스런 그런 독립부대였다. 70년대 중반 이북에서 파 내려온 땅굴이 발견된 후 육군은 전방지역 곳곳에 이런 예상지역을 선정하여 부대를 파견해 놓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한 얘기지만 그때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땅굴을 남한 후방 지역까지 파 병력을 이동시키려는 북한의 의도가 가히 파격적이었으며, 북한다운 공격성향을 엿볼 수 있는 기상천외한 전술이기도 했다.


그리고 물론 지질조사와 충분한 상황 조사가 있었겠지만 이런 땅굴 공격을 미리 탐지하려고 별도로 부대를 파견한 우리 육군의 대응 전략도 우스광스럽기도 했다. 어디로 파 내려올지, 그 넓은 지역에서 땅굴을 찾아낸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것처럼 무모한 짓이니까 말이다.


하여튼, 그곳에는 계곡 끝 부분 구릉이 있는 지역에 여러개의 음파탐지기를 설치하고, 그 들려오는 음파를 헤드폰으로 24시간 지겹도록 듣고 있어야 하는 탐지부대가 있었고, 만약 땅굴을 발견하였을 때 북한군을 초전에 격퇴시키는 전투부대 이렇게 둘로 나누워져 있었다. 이들 두 부대의 콘센트막사는 2~3백미터 거리에 두고 있었다. 사실, 땅굴이 발견 안 되면 정말 할 일 없는, 속된 말로 '망고땡'인 카추샤부대였던 것이다.


그곳의 하루 생활은 극히 단조로웠다. 훈련이나 교육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고, 몇 명만 남겨 놓은 채 소대원은 전부 화목작업을 나간다. 막사를 중심으로 사방 4~5Km 이내의 산에는 나무다운 나무는 없다. 잡풀들과 묘목처럼 작은 나무들이 산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산불로 검게 그을린 나무들이 가끔 보였고 대개는 이름모를 나무 등걸만 널브러져 있는 민둥산이었다. 산불이 자주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땔감용으로 모두 베어졌기 때문이었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런 산의 불모지화도 전략적인 것이라고 했다. 침투하는 적의 은폐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이다.


여하튼 한 시간 이상 멀리 나가 산을 해매면서 화목을 구해 막사로 돌아오면 점심시간이다. 그리고 구해온 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장작을 만들며, 한편에선 족구를 하기도 하고 조잡하지만 간이 야구를 하기도 한다. 또한 어느 날은 사격훈련이랍시고 - 일정량의 탄약을 소비해야 한다 - 담배 내기 담뱃대 맞추기 사격대회를 하고 아니면 막사 부근에 있는 꿩을 잡으러 나서기도 한다. 유일한 낙은 일주일에 한번씩 오는 PX차다.


그렇게 나름대로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하면 5시가 된다. 그리고 밥을 먹고 6시30분에 점호를 취하고 7시에 취침을 한다. 왜냐하면 전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호롱불이 사물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등기구였다. 보초근무가 없는 일요일에는 12시간 동안 취침할 수 있었다. 문화 혜택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군대 역사상 이런 부대는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땅굴은 정말 기발한 착상이 아닐 수 없다. 탄광의 갱도를 파는 기술은 일본이 세계 제일이라고 한다. 일제 식민지 시절 수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반강제로 징용되어 광부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개미처럼 수직으로 수백 미터, 수평으로 수천 키로미터를 파고 들어가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노역은 실로 야만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자원을 구하기 위한 인간의 집념이라고 미화하기엔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북한의 땅굴도 수 km미터는 파야하는데 얼마나 많은 노역과 인명피해가 있었겠는가. 지질조사도 없이,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무조건 앞으로 파헤쳐 나가야하는 무모함, 생각해보면 인간은 너무나 잔인한 동물이다.


그곳 생활은 무료하고 때론 군기가 빠진 느슨한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각자 고유한 생활 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함석으로 만든 콘센트 막사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장작으로 밥하고 난방을 하는 그런 반문화적인 생활은, 나름대로 낯섦은 인생을 경험하게 한 중요한 시간이었다. 영하 30도에 육박하는 혹한에 보초를 서고 내무반에 들어와 장작 난로에 양은냄비로 끊여먹는 라면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따분한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밤, 비상이 걸렸다. 소대장은 취침하고 있던 소대원을 긴급히 무장을 시키고 간단한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소대장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있었다.


“ 음파탐지기에 이상한 소리가 포착되었다. 긴장 늦추지 말고 명령에 신속히 따라라. 실전 상황이다.”


무장을 하고 위장약을 얼굴에 잔득 바른 소대원은 먼저 탐지부대로 향했다. 새벽의 차가운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탐지부대에 도착한 소대원은 막사 처마에 기대어 상황실로 들어간 소대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양의 눈은 아니지만 바람으로 인해 그 기세가 등등했다. 소대원들은 추위보다도 맞닥트린 실전상황에 긴장하고 있는 듯 발을 동동거렸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라는 옛날 노래가 북쪽에서 눈보라를 타고 을씨년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상황실을 나온 소대장은 분대장들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곧 각각의 분대는 분대장을 따라 어둠속으로 들어갔다. 비병을 질러대는 눈바람소리는 우리를 더욱 긴장시키고 있었다. 각 분대는 지정된 지점에 매복을 했다. 눈을 파고 나뭇가지로 대충 위장하는 정도의 가매복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났을까? 새벽은 오고 상황은 종료되었다. 당연히 우리는 완전 동태가 되어 있었다.


그 이상한 소리라는 것은 정말 이상한 소리였다. 봄이 오기 시작하면 지반에 변화가 생기는데 그 때 나는 소리가 아닌지 하고 추측만 할뿐이었다. 간혹 소리에 변화가 있을 때가 있다고 하는데 그 때마다 비상을 안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실제 땅굴 파는 소리라면 그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잘못은 중대한 과오이고 무거운 책임이 뒤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결코 훈련 상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3월 말경, 그곳을 철수하기 전까지도 땅굴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더 이상의 땅굴은 발견되지 않았다. 반공교육의 실제 전시물이었던 땅굴은 이제 하나의 허무맹랑한 역사적 사건으로 끝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잠들어 있는 오늘도 그들은 계속 땅굴을 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일명 남굴사라는 땅굴을 찾는 전문가들이 있어 가끔 언론에 나오기도 하는데, 전문가의 다양성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사실, 그런 우화 같은 얘기가 과거에 우리에게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미사일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는, 그러므로 해서 남북의 긴장이 고조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볼 때 그 시절의 땅굴은 어떻게 보면 낭만이 있었는지 모른다. 땅굴의 추억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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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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