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의 잉태

아인슈타인과 가우스와 라이프니치의 나라, 칸트와 헤겔과 니체의 나라, 괴테와 하이네와 헷세의 나라, 바흐와 베토벤과 브람스의 나라, 종교개혁을 이룩한 루터의 나라, 그리고 히틀러의 나라. 과학과 철학과 예술과 종교사를 선도해 왔던 독일이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광기의 블랙홀에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경건한 마음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히틀러와 독일이 자행한 세계 2차 대전을 볼 때, 국민 개개인의 분노가 메시아적 선동가와 만나 화학반응일 일으키면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핵폭탄급 분노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학습했다는 사실이다. 홀로코스트 같은 인종학살이 정상적인 사고로 가능하겠는가.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이 분노 앞에 무릎을 꿇는 현상은 무엇을 말하는가. 종교와 인문학적 가치가 무용지물이 될 정도로 그들의 분노가 사우론급인지 아니면 월래부터 종교와 인문학은 인간 정신활동의 사치품에 불과한 것이었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대한 분노로 인해 역사는 본능적으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 왔다는 것이다.

18세기 유럽은 해가지지 않는 영국과 짐이 곧 국가라고 설파한 루이 14세의 프랑스가 양대 산맥을 구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프랑스가 18세기 유럽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시민에 의해 왕정이 무너진 인류사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었다. 비록 혁명의 성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정신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그 대변혁기에 나폴레옹이란 발군의 능력자가 나타나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수백 년 동안 견제와 싸움을 해오던 유럽은 나폴레옹으로 인해 힘의 균형이 크게 흔들렸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로 원정을 가지 않았다면 유럽은 장시간 프랑스에게 굴복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806년 프로이센이라고 불리던 독일은 나폴레옹에게 철저히 짓밟혔으며, 프로이센을 비롯 오스트리아 헝가리 스위스 등이 속해 있던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연합군에 의해 쫓겨난 후 유럽에 힘의 공백기가 오고, 독일 연방이라는 복잡한 구조의 시대를 거쳐, 비스마르크라는 위대한 인물이 등장해 복잡하게 엉켜있던 프로이센 정국을 안정시키고 더 나아가 1871년 22개 군주국 등을 통합하여 독일제국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와 보불전쟁을 벌여 과거 나폴레옹에게 당했던 자존심을 되찾고 이를 계기로 강한 독일을 이루는 기폭제가 되었다. 드디어 하나의 독일이 유럽에 등장한 것이다.

대단한 집념으로 독일제국을 건국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이웃 국가들에게 힘을 과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 간의 전쟁을 막는 평화 중재자로 활약을 했으며 내부로는 부국강병 정책에 몰두하여 유럽의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는 기초를 다졌다. 1890년, 전임 왕 빌헤름 1세보다 욕망이 강했던 빌헤름 2세에 의해 팽을 당하기 전까지 독일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내실을 다지는 평화의 시대를 보냈다.

하지만 팽창정책을 지양하고 균형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비스마르크가 제국주의를 주창하며 팽창정책을 신봉하던 신임 왕인 빌헤름 2세와의 권력 다툼에서 비스마르크는 패배하고 재상에서 물러난다. 이 당시 비스마르크가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지 묘비에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정적 비스마르크를 제거한 개혁 군주 빌헤름 2세는 제국주의 깃발을 들고 당시 유럽에 광풍이 불었던 식민지 사냥에 뛰어든다. 경제 성장을 한 단계 상승하기 위해서는 소비와 생산력의 측면에서 식민지 개발은 필수였다. 우물 안 개구리 식으로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원칙에 따라 빌헤름 2세는 선발 국가인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의 견제를 무릅쓰고 식민지 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특히 마지막 식민지 사냥터인 아프리카에 집중하여 카메룬, 탄자니아, 르완다 등을 손에 넣은 데 성공했다. 당시 힘 좀 쓴다는 제국주의 국가 중에 일본만 하더라도 조선을 삼키려고 온갖 술수를 쓴 것을 보면 식민지 사냥은 당시 전 지구적으로 유행이었다.

국력이 급성장 한 독일은 당시 유럽 제1의 강국이었던 영국과 치열한 군비 경쟁을 한다. 가솔린, 디젤엔진을 처음 발명한 독일은 중공업 기계 분야에 집중하여 자동차와 항공기와 선박 등의 개발과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그런 현상은 미국에서 점화된 석유화학의 발전과 맞물려 개발 생산 속도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특히 식민지 정책에 따른 선박 생산과 해군력 증대를 위한 군함 개발에 집중한다. 20세기 초 독일의 군비 지출은 해마다 10%씩 증가했다.

유럽을 주도해온 영국과 프랑스는 수백 년 동안 앙숙으로 지내며 국력을 소비해 왔는데,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화 되면서 전쟁의 위험성을 깨달은 그들은 그 당시부터 항상 동맹의 입장을 취해 왔다. 하지만 독일은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보다 강력한 국가를 위해 팽창정책에 집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그런 독일을 예의 주시하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런 견제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독일은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유럽의 역사를 볼 때 힘의 균형은 전쟁과 평화의 중요한 바로미터가 되어왔다. 스페인이 강할 때 유럽은 스페인으로 인해 치도곤을 당했고, 영국이 상대적으로 강할 때도 시달렸으며, 가까운 프랑스도 나폴레옹에 의해 한바탕 뒤집어졌던 과거가 있다. 힘의 균형은 평화에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 고민의 결과가 현재 유럽이 EU이다.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그 당시부터 싹트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은 아리아인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독일에 의해 20세기 전반기를 혼돈의 시간과 함께 보낸다. 1914년 전운이 감돌던 유럽에 하나의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폭발한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본산인 오스트리아는 슬라브계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에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역사적으로 민족의식이 강한 세르비아가 항상 눈에 가시였다. 오스트리아는 인접국인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사주해 자국 내에 있는 세르비아인을 포그롬과 비슷한 형태로 탄압을 했었다. 그런 험악한 분위기가 팽배하던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왕자인 페르디난트가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한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흑수단이라 불리는 극단주의 단체가 지원한 암살단에 의해 부인과 함께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한 달 동안 치열한 외교전이 벌이지고 드디어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이제 전쟁이라는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에 세르비아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의 형제국인 독일 제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러시아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곧바로 프랑스와 벨기에 한테도 선전포고를 하고 침공한다. 그리고 역시나 그러면 그렇지 하고,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뛰어든다. 프랑스 나폴레옹 시절 이후 그럭저럭 평화를 유지하던 유럽은 역사상 경험해보지 못한 혹독한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든다. 바로 세계 1차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세계 1차 대전은 독가스라 불리는 화학무기가 처음으로 사용한 전쟁이며, 당시 첨단 기술공학에 의해 만들어진 최신 무기들의 각축장이었다. 19세기 과학기술이 급성장하던 유럽과 뒤늦게 뛰어든 미국 등이 개발한 항공기, 잠수함, 군함, 장갑차, 트럭 등의 위력을 실전에서 실험하는 첫 번째 전쟁이었다. 그런 무거운 철강 제품을 움직이게 하는 고출력의 엔진 기술과 무엇보다 동력원인 석유화학의 발전이 무기의 능력을 극대화시켰다. 그런 신무기들의 위력은 상상외로 강력해서 각국의 당사자들도 놀랐다고 한다. 나폴레옹 때와는 차원이 전혀 다른 전쟁이었다. 1000만 명 이상 사망한 숫자가 그것을 증명한다.

바로 이 전쟁에 히틀러가 참전한다. 당신이 히틀러학을 전공한다면 바로 세계1차대전은 필수과목으로 수강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전쟁은 히틀러에게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마치 매트릭스에서 현실 세계로 공간 이동하는 차원의 전환기적인 전쟁이었다. 신은 히틀러에게 인간의 분노가 초래한 결과를 시험하는 임무를 맡겼는지 모른다. 하여 그는 충실하게 그 임무를 완수했으리라.

세계 1차 대전이 당시 유럽의 정세에서 필연이었듯이 히틀러의 탄생도 숙명이었는지 모른다. 유럽은 히틀러라는 괴물을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에이리언처럼 숙주의 배를 가르고 세상에 등장하리라는 것을 유럽은 알지 못했다. 악의 탄생은 그렇게 전쟁의 자궁에서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1889년 4월 독일과 접경 지역인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남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자수성가 한 세무공무원이었고 어머니 클라라 푈츠는 아버지의 두 번째 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누나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누나의 딸과 결혼을 한 것이다. 굳이 히틀러와 어머니의 촌수를 따진다면 사촌이 된다. 어머니는 어머니이면서 사촌 누나뻘이 된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하다. 앙드레 지드도 사촌과 결혼한 것을 보면 당시 유럽에서는 근친결혼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동성애보다 근친결혼이 훨씬 더 관대했다. 근친결혼에 대한 윤리적인 관념이 개방적이었던 반면 유전학적인 문제의 심각성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또한 인간의 욕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독교적인 윤리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먼 훗날 나타날 히틀러의 매우 독특한 성정과 폭력성과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을 보면 전형적인 조울증의 형태이며 그것은 근친결혼에 대한 유전학적인 문제에서 일차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종교와 이성의 시대에 불가사의한 악의 탄생은 그 괴물의 염색체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실마리를 풀 수 없다. 유전학적인 요소가 그의 자아와 초자아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66살의 늙은 아버지는 히틀러가 15살 때 사망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했었다고 말하지만, 객관적인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의 폭력성(말과 폭행)이 빠지지 않는다. 히틀러의 폭력성의 원인을 아버지의 폭력성에서 추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폭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부친의 알코올 중독이나 정신병적인 원인이 아니고서는 자식의 성격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은 과도한 논리이다. 아버지가 행한 폭력 정도로는 히틀러의 성격 형성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클라라 푈츠는 히틀러가 18살 때 암으로 사망한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밝혔듯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슬픔을 주었다. 히틀러가 1945년 4월 권총 자살을 한 벙커에서 어머니의 사진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사랑은 끔찍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증언에 따르더라도 어머니의 히틀러 사랑은 마마보이 수준이었고, 그런 사랑을 히틀러는 당연시했다.

아버지가 자신의 누나 딸과 결혼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상적인 사랑으로 인한 결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촌도 아니고 3 촌간의 결혼을 어느 누가 이해를 하겠는가. 더구나 나이 차이도 23살이다. 그 결혼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밟혀진 것은 없다. 분명한 것은 어머니가 약간의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인데 그렇다면 그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조금은 짐작은 할 수 있다. 들어내 놓고 말할 수 없는 어떤 욕망들이 깊이 개입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클라라 푈츠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집착이었다. 상식적이지 않은 자식 사랑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낳은 자식 5명 중 3명을 여의고 2명이 생존했는데, 그중에 유일한 아들이 히틀러였기 때문에 히틀러에 대한 사랑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 지독한 사랑이 히틀러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히틀러는 평생을 정부로서만 여자와 동거를 했을 뿐 법적인 결혼을 거부한 것을 보면, 그런 특이한 행동 양태는 어머니에게서 도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히틀러의 성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여기서 잠깐 히틀러의 여성 편력에 대해 얘기하고 가겠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마지막 연인 에바 브라운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연애 사건들이 많이 있다. 첫 번째 여인은 1923년 쿠데타 실패로 재판과 형무소 생활을 끝내고 잠시 시골에서 휴양을 하고 있을 때 만난 마리아 라이트였다. 10대인 그녀와 뜨거운 사랑을 빠져 있던 히틀러는 그녀의 청혼을 거절하고 대신 정부로서 자신 곁에 있어 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라이트는 그에 실망하여 히틀러와 헤어지고 자살을 시도한다. 10대 후반의 여자가 청혼을 하는 데, 남자는 이를 거절하고 정부로서 옆에 있어 줄 것을 요구하고, 이에 여자가 자살을 기도하고, 정말 정상적인 남녀 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두 번째 연애 사건은 대단히 엽기적이다. 배 다른 누나 앙겔라의 딸 겔리 라우발과 요즘 말로 썸을 탄 것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 앙겔라와 딸 두 모녀가 히틀러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성장한 라우발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그때 히틀러의 나이가 마흔이었고 라우발은 19살이었다. 아버지가 누나 딸과 결혼했듯이, 자신도 비록 배 다른 형제지만 조카딸에게 묘한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데자뷔였다.

증언에 의하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디까지 발전한 것인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히틀러가 라우발의 누드화를 그린 것을 보면 정상적인 외삼촌과 조카딸의 관계는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겉에 드러난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히틀러는 라우발에게 로리타 성애적인 성향이 있었고 그것은 병적인 집착 증세로 나타났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 의하면 이드가 초자아를 집어삼킨 결과물이다. 욕망은 윤리적 사회 통념보다 우월하여 무의식을 지배하는 것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들이 관계는 당시 대중에게 노출되어 히틀러 정적들의 공격 단골 메뉴가 된다. 히틀러가 조카에게 변태적인 방법으로 성적인 학대를 했다고 공격한 것이다. 당시 정치적으로 한창 뜨고 있던 히틀러에게 이 사건은 치명상을 입힐 정도는 아니지만 이미지 관리에 악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이들의 관계는 1931년 라우발의 의문의 권총 자살로 마감을 한다. 그녀의 나이 23살 때였다. 정설에 따르면, 히틀러가 라우발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착한 결과,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라우발이 자유를 찾아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 사건 후 히틀러는 자신도 자살하겠다는 행동을 보일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 바로 어머니의 죽음에서 보였던 절망감과 다르지 않았다. 라우발에게서 모성과 욕정을 함께 공존했는지 모른다. 물론 여기서 음모론이 빠질 수 없다. 히틀러에게 심한 폭행을 당했다든지,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했다든지, 자살 후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는지 하는 등의 설과 이로 인해 히틀러 측근이 살해했다는 음모론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어졌다.

히틀러의 측근 에른스트 한프스탕겔은 이렇게 증언한다. 라우발의 죽음은 혼탁한 정치 상황에 지친 히틀러의 마지막 안식처를 앗아간 사건이며 그로 인해 더 이상 이성적 사랑을 할 수 없는 불구자가 되었다. 에바 브라운은 부속물에 불과할 뿐이다. 아마도 라우발이 히틀러 옆에 더 오래 있었다면 히틀러의 잔혹함은 진화하지 않고 멈추었을 것이고 따라서 홀로코스트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라우발의 죽음은 히틀러를 악마로 만드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 귀족 데이비드 미트포드 공작 가문의 넷째 딸인 유니티 미트포드와의 염문이다. 1933년 언니인 다이애나는 19살인 유니티와 함께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당대회에 참석한다. 아버지 데이비드 공작은 나치 옹호론자로서 히틀러와 교류를 하고 있었고, 그 친분에 따라 자신의 딸들을 당 대회에 참관시킨 것이다.

유니티 미트포드는 그 당 대회에서 사자후를 토해내는 히틀러에게 매료되고 히틀러도 그녀를 완벽한 아리아인 여성이라고 칭송하며 둘 사이는 급속하게 가까워진다. 미트포드는 독일을 수시로 왕래하며 히틀러 옆을 지킨다, 둘 사이가 어디까지 진척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무렵 독일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미트포드의 행적을 종합해 보면 히틀러의 아이를 출산하다가 몸에 이상이 생겼고, 그 후유증으로 1946년 사망했다는 추측이 황색언론에 등장한다. 몇십 년 후에도 그에 대한 추적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져서 히틀러의 자식 소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히틀러의 유일한 자식에 대한 각종 서프라이즈의 주인공이 바로 유니티 미트포드였다.

그 이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바 브라운은 17살 때 히틀러 전속 사진사인 호프만의 주선으로 히틀러와 만난 후 33살 때 그와 함께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영화배우이면서 소련의 스파이었던 올가 체코바와 요세프 괴벨스의 아내인 마그다 괴벨스도 히틀러와 염문을 뿌렸다. 라이트, 라우발, 미트포드, 브라운의 공통점은 10대 때 히틀러와 처음 만났으며 자살과 의문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건강한 10대 여자를 선호한 히틀러의 성적인 독특성은 아마도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2. 악의 탄생

당시 10대 후반의 히틀러에게 유일한 재능은 그림 그리기였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얘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공부에 대한 재능보다는 앞섰다. 덩치도 크지 않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으며, 공부에도 취미가 없었다. 그나마 그림에 재주가 있어서 공무원이 되기를 바란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화가의 길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히틀러는 미술대학에 입학하려고 나름 노력을 하였지만 계속 낙방했다. 첫 번째 낙방이 있을 무렵 어머니가 사망한 것이었다.

그에겐 이제 가족이라고는 부모 형제자매 전부 사망하고 누이동생뿐이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약간의 유산과 고아 연금 등으로 당장 금전적인 불편함은 없었지만 어린 나이에 삶을 개척한다는 것은 누구든 지난한 일이었다.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룸펜이 되기 십상이었다. 더구나 그는 마마보이로 길들여져 사회생활이 녹록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 후 미술학교 진학을 포기한 그는 입학사정관의 추천으로 건축가의 길을 가려고 주위에 알아보았으나 학사 정도의 학력이 있어야 건축가로서 문이 열린다는 현실을 알고 건축가도 포기한다. 다시 공부를 하여 대학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정환경이 뒷받침하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성향 상 맞지 않았다. 공부와는 적성이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의 히틀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화가였다. 사실 그림 이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실업학교에서 배운 기술은 그의 사회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런 일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공부를 한다는 것도 그에겐 무리한 요구였다.

 

생활이 어렵지 않은 20대 초반에는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화구들을 메고 빈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제법 화가 티가 났다.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가 공연할 때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바그너였다. 그중에 리엔치에 매료되어 있었다. 리엔치는 1842년 초연 당시 정치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문제작으로서, 귀족과 시민계급의 대립과 투쟁, 사회적 불평등과 계급사회의 모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를 추구하는 파격적인 오페라였다. 혁명가 리엔치의 투쟁을 노래한 그 작품은 히틀러의 여린 마음을 낚아챘다.

리치엔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할 때부터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바그너의 며느리와 교분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 현상은 니체의 누이동생이 그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초인을 히틀러와 연관시키려는 의도와 다르지 않았다. 바그너의 며느리와 니체의 누이동생은 히틀러를 ‘민족의 태양’으로 찬양하며 바그너와 니체를 천박하게 만들었다.

무명 화가로 빈의 거리를 배회하던 히틀러는 결국 2년도 안되어 가진 돈을 탕진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오페라 관람료가 상당한 금액이었을 터인데 겁도 없이 오페라 관람에 돈을 펑펑 썼으니 돈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소득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소비형태로 삶을 꾸렸으니 언필칭 마마보이로서 한계를 보인 것이다. 정상적인 생활인으로서의 그의 정신상태는 아직 미숙아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한 히틀러는 거리의 화가가 되어 초상화와 엽서를 그려 팔면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한다. 그가 엽서를 그려서 팔았다는 것은 삼류 화가라는 의미이다. 당시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어디에도 명함을 내밀 수 없었다. 미술학교에 여러 번 낙방한 것도 세상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원망해야 할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었다는 방증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엽서 화가로서 그는 빈의 뒷골목 허름한 하숙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그마저 돈이 떨어지면 쫓겨나 노숙자가 되기도 했다. 정말 앞날이 암담했다.

빈에서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멀지 않은 독일 바이에른의 뮌헨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모색한다. 그리고 일 년도 안 되어 히틀러는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뮌헨은 검은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짙은 전운이 감돌던 1개월 후 드디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한다.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히틀러의 나이 25살 때였다. 오스트리아 국적인 히틀러는 자국의 군 소집을 거부하고 독일제국인으로 지원 입대를 한다.

그가 왜 오스트리아군이 아니라 독일군으로 전쟁에 참전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뮌헨 생활 1년은 ‘나의 투쟁’이나 여러 평전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궁박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숨기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투쟁’에 의하면 오스트리아 빈은 게르만인 외 유대인 슬라브인 헝가리인 집시 등 여러 인종들이 모여 사는 관계로 민족의 주체성을 찾을 수 없었고, 이에 강한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과 국가사회주의를 좇아 독일로 넘어갔다는 투로 말한다. 하지만 그 당시 히틀러의 지적 깊이를 볼 때 그런 논리는 각색에 불과할 뿐이다. 그의 지적 능력을 과대망상적으로 부풀렸다고 보아야 옳다. 실업계 고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어떠한 인문학적인 소양이 있다는 근거도 없고, 세상을 보는 탁월한 능력에 대한 기록도 없고, 예술에 대한 심미안적인 통찰의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궁박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대도시 뮌헨으로 이사를 갔고,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군 보다 강한 독일군에 입대하여 자신의 안위를 도모했을 뿐이다.

여기서 바이에른의 뮌헨에 대해 잠깐 얘기하고 가겠다. 히틀러에게 뮌헨은 정치적 고향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뮌헨으로 왔지만 그는 그곳에서 독일군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였고, 무공훈장도 받았고, 제대 후 혼란한 뮌헨을 떠나지 않고 남아 독일 노동자 당에 가입하여 정치 세계에 뛰어들었으며, 그곳에서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폭동을 일으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감방에 갇히는 등 뮌헨은 그의 정치적 성지였다. 뮌헨을 논하지 않고 히틀러를 얘기할 수 없다.

전쟁에 참전한 그는 프랑스 접경지역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서부전선의 특징은 참호전으로서 우리의 한국전쟁 말기 고지전과 같은 밀고 댕기는 지루한 공방이 연일 벌어지는 전선이었다. 히틀러는 참호와 참호를 연결하는 일종의 통신병으로 충직하게 군 복무에 임했다. 미술 이외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몸이 약하다는 핑계로 오스트리아 입영을 회피했던 히틀러는 이상하리만치 전쟁터에서는 에너지가 솟구쳤다. 허약한 외모와 망각 속에 빠져 있는 듯한 눈빛은 사라지고 내면에서 강한 에너지가 분출되고 있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전쟁터는 그에게 생명을 주었다. 히틀러도 자신의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고 있었다.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그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독일을 위해 싸웠다. 그리고 전쟁 말미에 그는 눈에 부상을 입고 후방 병원으로 후송을 간다. 당시 그는 철십자 훈장을 받는데, 그 훈장은 그가 독일 총통이 되어서도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그 정도로 그는 1차 대전 참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나의 투쟁’에서 전쟁은 ‘장엄했노’라고 사자후를 토했다. 그에게 있어서 세계 1차 대전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주의와 약육강식의 우생학과 반유대주의 등 그동안 타인에 의해 듣기만 했던 내용들이 마치 바오로의 회심처럼 그의 의식세계를 점령해 버렸다. 새로운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전쟁은 히틀러를 전혀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었다.

1918년 11월,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중들이 거리로 나서 빌헤름 2세를 몰아내는 11월 혁명이 발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출범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한다. 당시 군 병원에 입원해 있던 히틀러는 항복 선언에 울분을 토하면서 독일을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위대한 독일을 회복하겠다는 계시를 받는다. 이 계시는 ‘나의 투쟁’에 나오는 내용이다.

히틀러의 ‘해방과 회복’의 방법론에 드디어 유대인이 등장한다. 패전의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이 유대인의 농간이었다는 논리이다. 블러드 라이벌, 즉 전형적인 ‘피의 비방’이었다. 14세기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어 인구의 20% 정도가 죽었을 때도 유대인이 웃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당시 독일에서만 8000명 정도가 학살을 당했는데 바로 그런 개념의 비방이 당시 히틀러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 횡횡했었다. 한 예로, 1930년대 일본 관동 대지진 때도 조선인이 일본인의 온갖 유언비어와 중상모략에 의해 수천 명이 학살당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종전 후 패전국 독일은 혼돈의 도가니에 빠진다. 빌헤름 2세가 물러난 자리에 바이마르 초대 대통령 루덴도르프가 선출되어 왕정을 버리고 본격적인 공화정 시대를 열었지만 독일은 혼란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특히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의 경제는 회복 불능 사태에 빠졌고 여러 가지 국가적 자존심을 해치는 조약 내용으로 공분을 사고 있었다. 조약 후 몇 년 동안 조약 무효 시위가 베를린과 뮌헨 등 대도시에서 연일 일어나고 있었다.

여기서 지루하겠지만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간략하게 짚어보고 가겠다. 첫 번째 영토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전 영토의 15%가 인접국에게 잘려 나갔다. 그중에 중요한 것은 폴란드와의 관계이다. 백여 년 전에 되찾은 일명 폴란드 회랑이라고 일컫는, 귄터 그라스의 영철북의 배경 도시로 유명한 단치히 지역을 폴란드로 반환한 것이다. 발트해와 접해있는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독일과 폴란드의 분쟁지역이었는데, 연합국이 패전국 독일의 책임을 물어 폴란드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독도를 두고 일본과 한국이 민족적 자존심을 걸고 다투듯이 영토는 국가 간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1939년 9월 1일 세계 2차 대전의 서막을 올린 것도 폴란드 침공이었다. 전쟁의 명분으로서 독일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범은 없었다.

두 번째는 군사력과 관련된 조항을 보면, 대포 5000문, 전투기 포함 비행기 2500대, 장갑차, 함선과 잠수함, 각종 무기를 연합군에 양도하는 내용이 있다. 그 외의 무기들도 분해하여 고철로 만들었다. 그리고 육해공군 합계 10만 명 이상 군 병력을 보유할 수 없다는 조항도 있다. 군대의 해체나 다름없었다.

세 번째는 독일인의 피부에 와 닿는 경제에 관한 조항이다. 1320억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보상금을 50여 년 할부로 연합군에게 납부를 해야 하고, 과학기술과 관련된 수많은 특허권을 포기하고, 관세도 포기하고, 연합군에 농산물을 공급해야 하고, 그리고 중요한 석탄 채굴권도 포기해야 하는 등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내용이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식민지 포기 조항이다. 독일제국의 팽창정책으로 획득한 아프리카의 카메룬, 르완다, 탄자니아, 토고 등과 오세아니아에 있는 파푸아뉴기니를 포기하는 내용이다.

과거에 있었던 7년 전쟁으로 맺은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하고 맺은 수차례의 파리 조약, 프랑스와 독일제국 전신인 프로이센의 보불전쟁으로 맺은 프랑크푸르트 조약 등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조약이 있었지만 베르사유 조약처럼 구체적이고 가혹한 조약은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 대중은 바이마르 정부가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연합군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그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울분을 토했다. 패전국의 설움을 톡톡히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가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반유대주의와 함께 선동의 단골 메뉴로 쓰일 정도로 그 조약은 대중적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천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할 만큼 전쟁의 피해는 유럽 국가 모두가 경악할 정도여서 패전 독일이 억울하더라도 거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1919년 종전 후의 패전 독일은 전쟁의 후폭풍으로 아수라장이었다. 더구나 베르사유 조약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실업자가 속출하고, 물가는 것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고, 돈이 있어도 생필품을 구할 수 없었고, 석탄 채굴권을 빼앗겨 석탄 전쟁이 일어날 정도였고, 정치는 좌익과 우익의 극한 대립으로 거리에는 매일 정치 집회가 일어났고, 크고 작은 폭력이 다반사였고, 치안은 엉망이었고, 국가의 기강은 사라진 혼돈의 독일이었다. 그나마 전쟁이 독일 내에서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히틀러는 제대를 미루고 의용군 형태의 군에 남아 있었다. 제대를 하려고 해도 그는 갈 곳이 없었다. 다시 궁박한 거리의 화가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었다. 더구나 지금은 뮌헨이나 빈은 전쟁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의용군에서 시키는 어떠한 일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정의롭지 않고 비굴한 어떤 명령도 그는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의용군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던 그에게 상관의 새로운 지시가 떨어졌다. 의용군 내에 확산되어 있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그 조직에 잠입하라는 지령이었다. 바로 프락치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 히틀러에게 프락치든 스파이든 연연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색출한 공산주의자를 사상교육을 하고 전향시키는 작업에도 동원되었다. 히틀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급자가 그의 언변술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자신의 말솜씨가 뛰어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실토한다. 히틀러 자신도 자신의 뛰어난 언변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삼류 화가로서의 재능만 가지고 있었다고 믿었던 그는 타인도 부러워하는 언변술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쟁은 그에게 의식의 대전환과 함께 대중을 선동하는 능력을 선사했던 것이다. 아니면 신의 장난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 히틀러는 정치 집단을 사찰하는 임무를 띠고 당시 정치 집회가 많이 열리던 맥주집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당신 독일은 맥주 국가답게 수많은 맥주집에서 아고라처럼 각양각색의 대중 정치 집회와 모임들이 열리고 있었다. 1919년 9월이었다. 당시 히틀러는 독일의 전통적인 국가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욱 극우적인 성향의 무언가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항상 그렇듯 그는 뮌헨의 어느 맥주집에서 열린 우파 성향의 정치 연설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뜻하지 않게 바우만이라는 교수의 연설 내용에 아니오라고 손을 들고일어나 열띤 토론을 하게 된다.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이 맥주홀에 있던 독일노동자당 당수인 드렉슬러의 눈이 띠었고, 그의 놀라운 언변에 매료되어 그날 자신의 당에 가입할 것을 권유받는다. 그리고 다음 날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에 정식으로 가입한다. 바로 정치 세계에 처음 발을 드려 놓은 것이다. 그의 나이 30살 때였다. 홀로코스트에 이르는 광기의 불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독일 의용군을 제대하고 독일노동자당에 가입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당세 확장에 열정을 쏟는다. 의용군 제대자들을 포섭하고 거리와 집회에서 찌라시를 돌리며 당원을 모집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의 언변은 60명밖에 안 되었던 당원수를 급격하게 늘리는 데 일조했다. 특히 당에 가입하고 몇 개월 지난 후 맥주집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그는 우리는 왜 유대인을 증오하는가라는 연설을 하는데, 그 연설은 그를 일약 아이돌급 스타로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히틀러의 명성은 당시 정치 모임 장소였던 맥주집들을 통해 급속도록 퍼진다. 국가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에 굶주려 있던 정치 미아들이 그를 쫓아 모여들었다.

그의 연설에는 마력이 있었다. 격정적인 그의 연설은 이성과 논리를 중요시하는 기존 정치인의 연설 방식을 압도하는 흡입력이 있었다. 전혀 새로운 방식의 대중 연설이었다. 군중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카리스마와 분노의 강약을 교묘하게 조절하는 격정적 연설은 바로 선동정치의 모범이었다. 기존의 정치적 행동양식을 허물어버리는 선동정치의 하이클래스를 히틀러가 보여준다. 지금 인터넷을 검색하면 히틀러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을 감상할 수 있다.

1920년 독일노동자당의 가입한 지 7개월 만에 60여 명이었던 당원 수는 2천 명이 되었고 그는 당의 핵심으로 성장한다. 이에 탄력을 받은 그는 당명을 바꾼다.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으로서 흔히 말하는 나치당이다. 광기의 서막이 올라간 것이다. 뮌헨의 허름한 맥주집에서 악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시작은 항상 미미하기 마련이다.

당시 독일노동자당을 뒤에서 지원하는 툴레라는 비밀결사 조직이 있었다. 툴레회는 국가사회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비밀 조직이었는데, 나치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조직을 확대하면서 그 강령을 흡수하여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반공주의, 반유대주의, 반민족주의,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신화화 등을 나치당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채택하였던 것이다. 이런 이론적 근거 외에도 툴레회의 멤버였던 루돌프 헤스, 알프레도 로젠베르크, 디트리히 에카르트, 헤르만 괴링 등 상당수의 인적 자원도 나치당에 합류한다. 그들은 대게 국가사회주의를 종교처럼 신봉하는 기득권층에 속한 부류였다. 히틀러와 같은 무산 계급과 괴링과 같은 유산계급이 결합한 폭력 지향적인 극우당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나치당의 코어가 되어 히틀러와 시작과 끝을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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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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