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홀로코스트로 가는 길

1920년 2월 기존의 독일노동자당과 툴레회의 그리고 31살의 떠오르는 별 히틀러가 결합하여 나치당이 탄생했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실증한 대표적인 인물이 히틀러였으며, 그의 정치적 레토릭과 웅변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말로서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기술적 요인을 완벽하게 갖춘 히틀러는 거리와 맥주집에서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였고 자연스럽게 당의 중심이 되어 갔다. 이에 당수였던 드렉슬러는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당을 떠났다. 히틀러가 이제 나치당의 당수가 된 것이다. 뮌헨의 허름한 맥주집에서 드렉슬러의 눈에 띄어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1년 만이었다.

히틀러는 기존의 국가사회주의 강령에 자신의 고유한 옷을 디자인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합리주의, 기본권과 인권, 베르사유조약, 국제협약과 평화를 거부함을 선언한다. 그리고 반볼세비키즘, 반유대주의, 보수적 민족주의와 사회적 급진주의의 결합, 개인의 종속, 맹목적 복종, 강함을 숭배하고 약함을 경멸하고, 아리아인의 우성과 유대인 슬라브인 등의 열성을 구별하는 우생학, 폭력의 정당성, 전체주의, 지도자 숭배 등으로 무장을 하고 대중 속으로 파고든다.

이런 비상식적인 논리는 선동이라는 엔진에 의해 움직일 수 있었다. 종교와 윤리, 보편적 진실성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작동원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선동에 대해 자세하게 설파한다. 선동은 대중이 우매하다는 전제 하에 시작한다. 대중이 우매하지 않다면 선동은 작동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대중은 여자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숭배하고, 자유의지가 희박하고, 정신적인 폭력에도 취약하고, 소외감에 잘 빠지고, 선과 악의 구별에 대한 판단 능력이 미약하고, 정보 수용 능력이 제한적이어서 이해력이 약하고 잘 잊어버린다.

이처럼 대중은 이성보다 감정에 취약하여,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 증오는 혐오보다 오래 지속되며, 변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은 과학적인 인식보다 대중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광신과 히스테리이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은 객관성과 의지의 힘이며, 이성적인 담론이나 메시지보다 대중의 감정에 주위를 기울이는 단편적이며 디테일한 장치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전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가장 아둔한 사람을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주입해야 한다. 그것의 결과만이 선전의 그름과 옳음을 판단하는 근거이다. 그 결과가 진실이라는 것이다. 지식인을 만족시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대중은 합리적인 이성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애매한 선전에 움직인다고 확신했으며 그 확신은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대중은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고 내용이 진실에 위배된다고 하더라도 선전선동으로 진실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한 것이다. 이 논리를 실행에 옮겨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히틀러를 선지자로 모신 요세프 괴벨스였다.

지금부터 중요한 연도순으로 이야기를 집약하겠다. 뮌헨의 허름한 맥주집에서 태어난 보잘것없었던 나치가 기존의 위정자들의 멸시를 받으며 어떻게 극우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하여 세계를 피의 도가니로 몰고 갔는지 지금부터 간략하게 이야기하겠다.

1923년

그해 11월 히틀러는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 프랑스와 석탄 채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르크화를 무작정 찍어낸 결과 빵 하나에 4억 4천 마르크가 될 정도로 고공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실업자 수가 급증하여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당시 나치당의 당원 수는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확장되어 있었다. 혼란한 사회와 히틀러 개인의 역량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강한 카리스마로 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선동과 폭력성은 그의 강력한 무기였다.

히틀러는 건장하고 호전적인 당원을 선출하여 참전 용사 출신인 에른스트 룀을 중심으로 돌격대를 만들었다. 그 나치 돌격대(SA)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 선동과 폭력에 앞장을 섰고, SS 친위대와 쌍벽을 이루는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가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될 무렵 독일군에 편입된다.

나치당 내 돌격대라고 하지만 사실 당수를 경호하는 사설 폭력 조직이었다. 그 조직에는 전쟁에 참전했던 군 출신 당원들이 많았다. 그들은 동일한 군복을 입고 거리를 행군하며 뮌헨을 공포 분위기로 조장했다. 직접적인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폭동을 일으킬 정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살벌한 집회를 수시로 열었으며 당시 치안 경찰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경우 외에는 집회를 해산시키지 않았다. 집회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뮌헨의 정치 지형을 보았을 때 창당 4년 차에 불과한 나치당의 세력은 독일 공산당 보다도 약했다. 히틀러가 광장과 맥주집을 순회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세력 확장은 정체되어 있었다. 그해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로마를 진군하여 정권을 찬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히틀러도 자신의 우상인 파시즘의 원조 무솔리니를 본받아, 나치 독격대와 베르사유조약에 불만이 컸던 참전군인 연합과 그리고 전쟁 영웅인 루덴도르프와 결탁하여 뮌헨을 접수하기 위해 거리에 집결하고 경찰과 대치한다. 돌격 앞으로! 를 외친 히틀러의 명령으로 뮌헨은 폭동에 휩싸이고 결국 나치당원 1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체포된다. 도주하던 히틀러도 체포되어 쿠데타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된다. 사실 하루 만에 진압된 그 사건은 쿠데타이기보다는 불장난에 불과한 호전적인 극우정당의 폭동 수준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사건은 히틀러의 인지도를 전국적으로 넓히는 계기가 된다. 쿠데타 협의로 재판을 받으면서 히틀러는 자신이 왜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명쾌하게 논박한다. 베르사유조약의 후유증으로 독일 국민이 피폐되어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며, 이에 애국적인 차원에서 불가피하게 쿠데타를 도모했고, 당연히 쿠데타는 정상적인 정치적 행위라는 내용으로 설파를 했다. 히틀러의 압도하는 언변과 맞물린 이런 주장은 재판관들도 호의적으로 돌아설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재판 과정을 전국구 언론들이 기사화하면서 히틀러라는 이름이 정치 중심지 베를린과 전국에 퍼져나갔다. 바로 대중은 독일의 자존심을 히틀러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5년형을 선고받은 후 8개월 만에 가석방되고, 나치당도 해체되고, 히틀러에게 연설 금지명령을 내렸지만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이득은 히틀러의 전국구 데뷔였다.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론 도약을 위한 재정비 기간이었다.

이 사건으로 히틀러의 영원한 2인자 요제프 괴벨스를 만나는 계기가 된다. 유대계 출판사에서 조차 퇴짜를 받고 눈물을 곱씹던 무명작가이며 마르크스주의자인 괴벨스가 신문에서 히틀러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린다. 바로 자신의 우상을 만난 것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영혼의 스승을 만난 것이다.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몸과 영혼을 받친다. 그리고 나치 정권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나치 친위대(SS)의 사령관이면서 홀로코스트 설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도 쿠데타를 계기로 히틀러를 교주로 모시게 된다. 장량과 한신처럼 그들은 훗날 나치독일의 개국공신이 되어 마지막까지 함께한다.

쿠데타 당시 경찰을 향해 첫 방아쇠를 당겨 히틀러로부터 마지막까지 신임을 받았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가 슈트르머라는 주간지를 창간한다. 돌격대라는 뜻의 그 주간지는 10년 후 80만 부를 발행하는 독일을 대표하는 출판물로 성장한다. 슈트르머는 반유대주의로 시작해 반유대주의로 끝나는 반유대 전문 출판물이었다. 국가의 매춘 90%를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고, 경제 불황의 책임은 전적으로 유대인에게 있으며, 독일 여성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수출한다는 등의 원색적이고 저질스러운 기사들이 난무하는 잡지였다.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선동으로 점철되었으며, 1935년 뉘른베르트 인종법이 통과되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열렬한 나치 지지자들도 그의 기사들을 혐오스럽게 여겼다고 하니 기사의 저질 정도를 가름할 수 있다. 슈트라이허는 이에 공로가 인정되어 세계 2차 대전 후 있었던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교수형을 언도받는다.

히틀러는 8개월 동안 호텔 같은 감옥에 기거하면서 나치의 성서 ‘나의 투쟁’을 집필한다. 히틀러의 구술을 루돌프 헤스가 타자로 받아 쓴 나의 투쟁은 10년 후 독일인의 필독서가 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마르크스를 학습하는 정도의 탐독은 아니었지만 전 국민이 한 권이라도 안 사면 눈치기 보이는 상황이었다. 특히 친구나 가족이나 지인에게 줄 선물로서 많이 구입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성경을 능가하는 밀리언셀러였다.

당시 히틀러는 어느 저널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유대인을 교수형으로 몰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그 당시부터 20여 년 후에 있을 홀로코스트를 꿈꾸고 있었는지 모른다. 유대인 말살에 대한 꿈을.

1928년

뮌헨 쿠데타 발생 1년 후, 정치계에서 축출된 나치당은 독일민족자유당과 연합하여 재건을 위해 몸부림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다. 괴벨스와 히믈러를 비롯한 새로운 젊은 인재들이 들어와 당을 쇄신했으며, 대중연설이 금지된 히틀러도 2선으로 물러나는 등 전략도 바꾼다. 그렇게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톱을 숨기고 대중화에 힘을 기울 결과, 1928년 독일 제국의회 선거에서 나치당은 2.6%의 득표율을 얻어 12석의 의원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괴벨스와 괴링 그리고 4년 후 히틀러와 노선 투쟁 끝에 나치당을 탈당하는 오토 요한 슈트라서 등이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한 것이다. 제1당 독일사회민주당이 26% 131석을 획득했고, 공산당이 제4당으로 9% 45석을 얻었다. 나치당이 비록 꼴찌였지만 12석을 얻어 선거에 의해 정식으로 정치세계에 등장한 것이다. 바로 비례대표제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선거제도였다면 꿈도 꾸지 못한 결과였다. 하여튼 그 해 제국의회 선거는 나치당 역사에 기념비적인 위대한 날이었다.

당시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양 우리로 들어가는 늑대처럼 의회에 입성했다.’ 대다수의 상식적인 대중은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드는 힘은 광신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괴벨스의 악마적 교활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런 괴벨스와 히틀러를 미치광이 취급을 했고 정치 주변을 떠돌다 결국엔 주저앉을 것이라고 과소평가했다. 어느 사회든 극과 극에 보편성과 상식을 벗어나는 괴물 같은 세력이 미미하게 존재하기 마련이며 이들은 활개를 치는 듯하다 제풀에 사라지는 현상은 흔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가진 대중이라면 폭력과 선동을 대놓게 해 대는 정치세력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인지사정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낙관론은 5년 후 나치 일당 독재시대가 열린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히틀러를 사회악으로 취급했던 그들도 그 절대악을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1930년

한스 뮐러 내각은 1929년 세계적 대공황의 여파로 내각에 분열이 생겨 다시 총선을 실시한다. 나치당은 이 선거에서 18.3% 득표율에 107석을 획득하여 153석을 얻은 사민당에 이어 2위를 기록한다. 그리고 나치당의 정적인 공산당이 3위를 한다. 나치당은 2년 만에 9위, 즉 꼴찌에서 일약 2위로 도약을 하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1929년 미국 발 대공항은 독일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 세계 1차 대전 후유증에서 벗어나는 듯했던 경제 상황을 다시 악화시켰다. 히틀러는 그런 위기 상황에서 가난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회주의적인 복지와 실업률 감소를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웠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히틀러는 대중을 선동하였고 그 부분이 먹힌 것이다. 처음엔 공포와 폭력과 선동으로 당의 세력을 넓혔다면 그 해 선거는 그런 전략을 반면교사로 삼아 하층민을 겨냥한 선거 전략이 일정 부분 성공한 것이었다.

2년 만에 제2당으로 급성장한 히틀러는 그 기세를 몰아 국가사회주의를 기반 한 선전선동정치에 올인한다. 그 선봉장은 요제프 괴벨스였다. 히틀러에게 전속 사진사 하인리히 호프만을 붙여 히틀러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이고 수만 명의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 등을 촬영하여 영화관에서 상영하였다. 이런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광고의 극대화를 이끌었다. 이런 류의 선동적 전략은 대중에게 세뇌되어 히틀러를 신격화시키고 집단적 광기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히틀러는 수많은 대중 집회를 열면서 그 자신이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하고 계획했다. 귀빈석의 좌석배치나 조명등의 시설을 직접 꼼꼼히 점검하고 여러 가지 효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당의 연설자들이 집회의 서론 부분을 항상 장식했다. 집회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히틀러의 모습을 보고자 하는 대중들을 애태우고 기다리게 했다. 청중들이 기다림에 목말라할 때쯤 히틀러는 구세주처럼 그들 앞에 등장하곤 했다. 무대 위에 오직 하나의 불빛만 히틀러를 비추어 히틀러는 마치 고독한 그렇지만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였고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쬘 때 마치 구세주의 모습처럼 등장하기도 했다.”

대중은 서서히 나치교의 광신도가 되어 갔다. 바그너의 서곡에 맞추어 군복을 입은 수만 명의 돌격대와 친위대원들이 만장 깃발을 들고 거대한 강줄기처럼 이어져 시가지를 행진한다, 그 위용에 대중은 열광한다. 밤에도 그들은 횃불을 들고 ‘폭력의 찬가’를 부르며 도심을 광기의 도가니로 만든다. 그들은 히틀러를 향해 하이 히틀러! 를 외치고, 히틀러는 거만하게 팔을 들어 답례를 한다. 거리와 광장에 모여드는 대중은 수십만으로 불어났으며 그들은 일제히 히틀러를 향해 열광한다. 광기는 이제 종교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나치당의 지지율을 분석해 보면 50%가 넘는 지지층이 놀랍게도 중산층이었다. 그중에서도 교사들이 핵심층이었다. 하층민에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준 반면, 중산층에겐 강한 아리아인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공감을 얻어낸 것이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국가를 만드는 데 중산층은 적극 동조했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중산층 공략의 성패가 권력 쟁취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1932년

그해 3월 드디어 히틀러가 대통령에 출마한다. 비록 힌덴부르크가 재선에 성공하지만 히틀러는 30% 이상 득표율을 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7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나치당이 37.3% 240석을 획득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제1당에 오른다. 사민당을 2위로 끌어내리고 1위를 탈환한 것이다. 창당 후 13년 만에 이룬 기적이었다. 삼류 화가 출신의 히틀러와 아웃사이더적 성향을 가진 중산층 세력이 만든 60명에 불과했던 독일노동당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권력 바로 앞에 도달한 것이다. 뮌헨 거리에서 날뛰다 제풀에 지쳐 사라질 극우정당쯤으로 여겼던 나치당이 이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에 도달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시간은 그들 편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히틀러는 공산당을 몰아내는 데 몰두한다. 공산당은 아직도 제3당을 차지할 정도로 무시하지 못하는 당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폭력성도 만만치 않았다. 선거 전후 히틀러는 자신의 친위대와 돌격대를 동원하여 제1당으로서의 권력을 배경 삼아 공산당을 무력으로 공격한다. 이런 불법적인 폭력에 나치당과 공산당은 극한 대립을 하고 결국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후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된다. 독일에서 우선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세력은 공산당이었다.

전체주의 독재국가를 만들기 위해 히틀러는 국회의 민주적인 절차를 방해하고 정국의 혼란을 조장한다. 1당이지만 득표율이 40%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한계를 통감하고 있었다. 이에 국회를 해산하기 위해 정국을 혼돈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해 11월 히틀러의 뜻에 따라 국회가 해산되고 다시 총선이 치러진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33% 196석을 얻어 오히려 의석수가 줄어드는 성적표를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결과는 한숨 쉬어가는 것일 뿐 히틀러의 정치적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이미 독일은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 지형으로 볼 때 상위 세 당이 서로 연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총리 내각을 만들 수 없어 대통령 내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치당이 사민당과 연합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더더욱 3당인 공산당과는 연합할 수 없었다. 또한 그 외의 소수당도 나치당과의 연합을 회피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히틀러는 어떠한 당과도 연합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통령 힌덴브르크가 요구한 총리직을 히틀러는 받지 않았던 것이다. 히틀러의 목표는 일당 독재였기 때문이다.

이미 80살이 넘은 고령의 힌덴부르크는 허수아비 대통령이었고 권력의 핵심은 히틀러였다. 히틀러의 광기를 알고 있던 지식인들은 그에게서 ‘피의 냄새’가 진동한다고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한바탕 광풍이 몰아칠 것 같은 전운이 감돌았다. 아직도 망나니 히틀러가 독일의 권력을 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기득권층에는 많이 남아 있었다. 설마, 이 위대한 독일이 그따위 망나니한테 어찌 되겠는가...

하지만 대중에겐 히틀러는 자신들을 구원할 구세주였다. ‘유대인에게 죽음’을 외치며 증오의 수치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 광기에 대중은 술의 도움도 없이 취해갔고, 위대한 아리아인만이 이 세상을 지배할 권리가 있노라고 외쳤고, 이에 폭력과 선동 그리고 전체주의와 독재는 합당한 것이라고 예속을 공식화했다.

1933년

전 해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총리직 지명을 수락하지 않았던 히틀러는 새해가 되자마자 반강제적으로 총리에 임명된다. 선거를 통해 의회를 장악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행정 권력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계획을 수정한 것이었다. 1월에 히틀러가 총리가 되고 다음 달 2월에 독일 의사당 화재 사건이 발생한다. 히틀러 정부는 의사당 화재는 공산당의 소행이며 이는 혁명을 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발표를 하고 힌덴브르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대대적인 공산당 사냥에 나선다. 당시 공산당 당수였던 에른스크 텔만을 비룻한 당 간부 등 4천여 명이 체포된다.

의사당 방화사건

그리고 3월 히틀러 정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다시 총선으로 내본다. 입법부를 장악하기 위한 집요한 획책이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대 실망이었다. 전체 의석에 44% 288석을 획득하여 과반수 달성에 또 실패한 것이다. 사민당 20.4% 121석, 공산당 16.9% 100석, 그리고 나머지는 군소 정당이 차지하였다. 공산당을 와해시킬 정도의 타격을 가했는데도 오히려 전보다 3% 정도가 더 오른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런 결과에 당황한 히틀러는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민주적인 선거로 의회를 장악하는 것을 포기하고, 행정 권력으로 의회 권력을 삼켜버리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행정력으로 입법부를 무너트리는 쿠데타의 일종이었다. 그로부터 11월까지 이르는 기간은 독일 역사에서 가장 폭력과 선동이 난무한 시기였으며, 유대인 탄압도 행동으로 본격 시작된다.

결국 히틀러는 공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한 법원을 이용하여 공산당을 불법 정당으로 만들어 해산시킨다. 그리고 소수 정당들도 해산시키고 마지막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탄생시킨 기득권의 상징인 사회민주당도 숨통을 끊어놓는다. 강하고 새로운 독일을 위해서라면 대중에겐 민주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독재정권으로 인한 폭력과 공포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 상황에서 반나치 운동을 전개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나치의 선동정치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하여튼 이제 독일에서 합법적인 정당은 나치당 하나밖에 없었다.

그해 7월에 열등한 사람, 정신지체자와 정신병자와 기타 장애인들을 강제적으로 불임을 해야 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이 법에 적용되어 실질적으로 불임하는 사람들이 40만 명이 이르렀다. 그리고 유대인 기업 불매운동이 나치당의 선동에 의해 일어났지만 하루 만에 마감을 한다. 또한 유대인은 의사, 법률가, 농장 경영자 등을 할 수 없는 법안인 전문공무회복에 관한 법이 통과되는 데, 그 법은 나치 독일이 태어난 후 첫 번째 반유대법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언론은 이런 히틀러를 향해 맹비난했다. 그동안 독일의 정국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유럽 언론은 폭력과 공포의 칼날을 휘두르며 파시즘으로 몰고 가는 히틀러의 욕망을 간파하고 경고의 메시지를 강하게 토해냈다. 히틀러는 뭇소리니 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검은 광풍을 몰고 올 것 같은 기운이 유럽에 감돌고 있었다.

그해 11월 국회는 해산되고 다시 총선이 치러진다. 선거에 나선 당은 나치당 하나였다. 득표율 92%에 총 의원수 661명 중 661명이 당선된다. 바이마르 제국이 마감되고 나치 독일이 시작된 것이다. 이 선거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시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전권 위임법도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한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히틀러는 그것을 전제로 국제연맹 탈퇴 건을 국민투표에 올리고, 역시 통과시킨다. 위대한 히틀러의 독일이 탄생한 것이다. 바그너의 리엔치가 독일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고부터 유대인 탄압은 말에서 행동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해 5월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트,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유대인이 쓴 서적이 괴벨스의 선동에 의해 34개 대학에서 화형식이 거행되고, 멘델스존과 쇤베르그의 음악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1938년 브레히트는 당시 상황을 풍자한 ‘분서’라는 시를 미국에서 발표한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나의 책을 불태워 다오...’ 20세기 문명국가에서 벌어진 영혼의 정화식이라 불린 이 분서 사건은 진시황의 분서 사건과 비교하며 두고두고 역사에 회자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탈 독일이 시작된다. 현대판 출애굽기였다. 금융인 변호사 사업가 의사 등과 그리고 세계적 명성의 과학자 철학자 예술가들이 영국과 미국과 남미 등 세계 각지로 떠난다. 독일에서 유대인이 산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광기 가득한 분위기가 얼마나 숨이 막히는지, 그런 압박감이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목을 죄고 있었다. 자신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부터 동화되어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유대인은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독일에 계속 남아 온갖 박해를 겪다가 게토라는 집단 거주지에 수용되었고 결국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된다.

1933년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미국 망명을 시작으로 유력한 유대인 과학자와 문화예술인들의 탈 독일이 이어진다. 20기 초 양자역학의 새 장을 연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 중 슈뢰딩거 방정식과 슈뢰딩거 고양이로 유명한 에르빈 슈뢰딩거와 올리비아 뉴톤 존의 외할아버지이며 양자역학에 수학을 체계화시킨 막스 보른이 영국으로 망명하고, 1934년에는 원자폭탄 제조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수소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에드워드 텔러가 미국으로 망명하고, 1938년에는 원자핵 분열을 처음으로 발견한 여성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가 스웨덴으로 떠난다. 그리고 1940년에는 베타 원리와 중성미자를 발견한 볼프강 파울리가 미국으로 떠난다. 그 외에도 맨해튼 프로젝트에 관여한 물리학자인 루돌프 파이얼스와 실라르드 레오도 독일을 떠나고, 아내가 유대인인 이탈리아의 엔리코 페르미도 아내를 따라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제 독일에는 하이젠베르크 외에 물리학자다운 물리학자가 남아있지 않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기존의 뉴튼 물리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20세 물리학계를 이끌어온 쌍두마차였는데, 그 물리학계에서 동거 동락하며 연구하던 물리학 도반들이 이제 히틀러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과학계뿐 만 아니라 문화예술계도 탈출 러시가 시작된다. 일명 프랑크푸르트 학파라고 불리는 당대 독일의 석학 중에, ‘존재냐 소유냐’의 저자이며 파시즘을 인간의 사회학적 심리를 통해 분석한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저자 에리히 프롬, ‘계몽의 변증법’을 공저한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 등이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들은 나치 지배와 유대인 박해를 처음으로 사회 철학적으로 고찰한 사회철학자들이다. 이성의 독일이 왜 증오와 광기의 독일이 되었는지 분석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무의식을 설파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1938년 빈에서 노후를 보내던 그는 점령군 나치에 의해 빈의 정신분석학회가 해산당하고 책과 재산을 몰수당하는 수모를 격은 끝에 그해 6월 노구를 이끌고 영국으로 망명을 떠난다.

그리고 무성 영화계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프리츠 랑과 누아르 영화의 거장이며 각본가인 빌리 와일더,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놀드 쇤베르그도 미국으로 망명을 하여 미국의 문화예술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만약 프란츠 카프가가 그 당시 살아있었다면 그도 역시 그 탈출기에 일원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이외도 독일과 유럽에서 살던 수많은 유대인 기술과학 문화예술인들이 미국 과 영국 등으로 탈출을 한다. 그렇게 탈유럽을 한 유대인들의 면면을 보면 각계에서 당대 최고의 대가들임을 알 수 있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나치의 탄압을 피해 유럽을 떠난 명망가들을 보면, 미국이 절대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문명의 새 질서가 형성되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의 최대 수혜국은 미국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히틀러로 인해 미국이란 초강대국이 탄생한 것이리라.

히틀러가 집권할 무렵부터 독일 내에서는 그에 저항하는 반나치 운동이 전개되었다. 히틀러의 정적 탄압은 유대인 탄압에 견주어 약하지 않아서 독일 공산당 지도자급은 모조리 처형을 했고, 나치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 또한 폭력으로 탄압하였다. 이에 유대인만 탈 독일을 한 것이 아니라 반나치 운동을 하던 정치인들도 박해를 받고 독일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대표적인 인물이 1970년대 폴란드를 방문하여 유대인 게토 추념탑에 무릎을 꿇었던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였다. 나치 독일 시절 젊은 정치 초년병이었던 브란트는 나치의 집요한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을 했다. 그리고 종전 후 서베를린 시장을 지낸 에른스트 로이터, 사민당 당수였던 오토 벨즈, 1950년대 사민당 당수를 지낸 에리히 올렌하워 등이 망명을 하였다. 또한 사민당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인 쿠르트 슈마허와 파울 로베 등은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고, 종전 후 초대 총리가 되는 아데나워는 대중과 접촉을 끊는 감금 생활을 했다. 유대인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지만 반나치 운동을 하던 정치인들은 강력한 저항을 하면서 망명과 강제수용소와 가택 연금과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하이 히틀러’를 외쳤다.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나치 독일의 역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이 만들어지고,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고, 1941년 본격적인 홀로코스트가 시작되고, 그리고 1945년 4월 30 일 히틀러가 자살하면서 그 광기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600만 명의 유대인과 200만 명의 소련 포로, 숫자도 파악할 수 없는 동유럽 슬라브인과 그리고 수많은 집시와 장애인과 동성애자 등이 이유도 없이 학살당하는 홀로코스트가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끝났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유대인의 멸망과 열등한 인종에 대한 청소를 실행에 옳긴 ‘최종 해결’이 집행되고 ‘죽음의 행군’을 거쳐 그렇게 꿈이 거의 다 실현될 무렵, 악도 무너졌다.

여기서 홀로코스트에 대해 자세하게 논하지 않겠다. 나치에게 학살된 현황만 얘기하겠다. 유대인 600만 명(폴란드에 살던 유대인의 90%, 유럽 전체의 70%), 소련군 포로 250명, 폴란드인 200만 명, 장애인 27만 명, 집시 22만 명, 슬로베니아인 2.5만 명, 프리메이슨 22만 명, 동성애자 1천5백 명, 여호와의 증인 5천 명, 그 외 5천 명, 전체 약 1100만 명이 홀로코스트의 공식적인 학살자 수다. 소련에 있던 유대인을 포함한 러시아인을 합하면 그 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약 2600만 명으로 추산한다고 한다. 소련에서 학살된 러시아인은 그 수가 너무 많아 계산이 안 될 지경이었다. 물론 전쟁에서 전사한 사망자 전몰자 수는 포함하지 않은 수이다. 너무나 많이 죽었다.

이 홀로코스트를 구상하고 설계하고 집행한 사람은, 선전선동정치의 집행자이며 죽음의 천사라 불리던 요세프 괴벨스, 반유대주의 인종주의의 이론가 알프레도 로젠베르크,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 사령관이며 유대인 멸망을 꿈꾼 실행자 하인리히 히믈러, 프라하의 도살자 및 피에 젓은 사형집행인이라 불리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유대인 이송 최고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 이 모든 계획을 수용소에서 집행한 말단 실무자들, 또한 인종청소를 무관심하게 지켜보았던 나치 독일 대중과 관료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장했으며 그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아돌프 히틀러이다.

처음 반유대주의가 형성된 것은 종교적인 이유였다. 1700년 전 초기 기독교가 형성되어 갈 무렵 종교적 결집을 위해 대주교 크리소스톰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예수를 죽인 자들이 유대인이며 그들은 탄압을 받아야 할 사탄이라고 설파를 했다. 당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교화한 유대인이 유렵에 살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와 상관없는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도 상존하고 있었다. 동일한 유일신을 믿는 두 종교를 다 인정할 수 없었던 교구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유대인을 탄압해야 만했다. 하지만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은 유럽의 기독교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들 문화를 고집했으며 개종도 거부하는 개성이 너무 강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의 500년 노예생활을 거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수많은 이민족과 싸우면서 살아남았고, 마지막엔 로마의 예루살렘 대학살로 나라를 잃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범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반유대주의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지만 그런 사실을 논박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성경과 관계된 서적은 성직자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맹률이 90%에 달했다고 하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계몽시대까지 성경은 백성들이 읽지도 보지도 못했다. 더구나 성경은 라틴어로 된 성경만이 성경 취급을 받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침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도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대중에겐 미사 때 성직자가 읽어주는 것을 듣는 것이 성경의 전부였다. 지금처럼 누구나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 인한 편협한 성경해석이 반유대주의를 비판할 수 없게 한 원인 중에 하나였다.

그렇게 천년 동안 종교적인 이유로 박해를 받아왔다면 계몽주의 시대부터는 인종적인 이유로 박해를 연장한다. 종교적인 문제가 희석되었다고 하여도 천년 동안 이어져 온 박해에 대한 인식은 이미 집단 무의식화 되어 있었다. 유대인을 박해했던 로마 가톨릭을 95개 조항으로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이룩한 루터도 말년에는 유대인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종자들이라고 힐난한 것을 보면 당시 세속적으로 인종주의가 사회 전반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인식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덕 고리대금업자라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표출된다. 자기들끼리만 놀고, 인간미라곤 털끝만큼도 없고, 돈 만 아는 독종으로 대중은 유대인을 자신의 인식 틀 안에 격리시켰던 것이다. 그러면서 시기와 미움과 증오심을 키웠다. 특히 이런 현상은 루터의 나라 독일에서 유독 심했다.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 무시 못 할 정도로 기반을 다져가고 있던 18세기 중엽에 이미 영국과 네덜란드는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주는 등 형식상으로는 반유대주의를 철폐했다. 이런 현상은 상대적으로 유대인에게 관대했던 칼뱅의 영향이 컸다. 물론 대중의 밑바닥에서는 우리가 중국인을 ‘때국놈’이라고 비하하듯 아직도 유대인에 대한 곱지 않은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그런 유화적인 변화는 독일에도 영향을 미쳐 멘델스존 가문이 18~19세기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배경이 된다. 물론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멘델스존 가문은 철저하게 짓밟히지만 말이다.

그리고 19세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독일 각계에서 뛰어난 유대인들이 나타났다. 경제 금융계는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영향력이 강했고, 아인슈타인이 나타나 물리학계를 뒤집어버렸고, 쇤베르그가 현대음악의 장을 열었고,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을 체계화시키며 무의식의 세계를 설파하는 등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정도의 파괴력 있는 거물들이 각계각층에 등장한 것이다. 또한 법학과 철학은 물론이고 특히 의학계에는 유독 유대인들이 많아 독일 대중과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초등학교 동기였던 비트겐쉬타인을 공부 잘하는 부잣집 유대인 아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당시 유대인은 독일 사회 저변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독일인들에게서 유대인에 대한 시기심과 질투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에서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히틀러가 유대인을 미워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불과 이백 년 전까지만 해도 무식하고 이기적이고 돈 만 밝히는 때국놈들이라고 멸시를 받던 유대인들이 이젠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의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국민적 경계심과 위기감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유의 멸시는 양태는 다르지만 민족성이 강한 국가에서 잘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본과 대한민국에서도 그런 현상은 잘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그런 분위기가 심화되면 극우적인 성향을 가진 대중에게서 원인 불명의 증오라는 괴물을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혐한 현상이 그 예이다.

그리고 독일에서 유독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던 이유는 루터 때문이었다. 루터가 말년에 조금만 자제력을 발휘했다면 그토록 피비린내 나는 광적인 유대인 박해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히틀러는 인생 낙오자였다. 육체적으로 건장하지도 않았고, 사업을 할 정도로 성격이 활달하지도 않았고, 회사에 취업해 사람과 부대끼면 살 정도로 친화성도 없었다. 따라서 떳떳한 직업을 가질 만한 변변한 조건 하나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저 엽서 정도를 그려 팔아 동가식서가숙 하며 근근이 먹고사는 삼류 화가에 불과했다. 그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누구도 관심이 없는 루저였다. 세계 1차 대전이 없었다면 그는 극장 간판이나 그리면서 상업 화가로 삶을 영위했을지 모른다.

그런 히틀러의 무의식에는 열등감이란 어떤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열등감이란 욕망과 분노가 강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감정적인 현상이다. 욕망과 분노는 열등감과 비례한다. 욕망과 분노가 약하다면 열등감도 비례하여 약하게 발생되고, 욕망과 분노가 없다면 당연히 열등감이 생산되지 않는다. 열등감이 없다는 것은 가슴에 분노가 없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히틀러에겐 형체가 모호한 기형적인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부모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근친상간은 신체적인 기형아가 태어날 확률이 높은 것만은 아니고 정신세계가 특이한 기형아도 생산될 가능성이 높다. 그 욕망은 형체가 불분명한, 불교에서 말하는 갈애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히틀러 자신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의식 밑바닥에 숨겨져 있었다. 에이리언이 숙주 안에서 서서히 자라고 있었으며 히틀러 자신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무언가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이 강력했지만 현실은 그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그에겐 상대적으로 열등감만 더 커질 뿐이었다. 자신의 비루한 능력과 신분 상승의 욕망은 서로 뒤엉켜 열등감이 형성되고 그것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분노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정신이 빈궁해진다는 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절망이라는 정신상태와 형태면에서 같을지 모른다.

그의 내면에서 마그마처럼 끓고 있던 분노가 마침내 찾은 표적은 바로 유대인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접하게 된 유대인들에게서, 역사적으로 보잘것없었던 유대인들이 빈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하릴없이 여러 극우적 정치 집회에 기웃거리면서 반유대주의에 대해 자의 반 타의 반 학습되었으며, 그런 것들이 자신의 궁핍한 삶과 비교되면서 시기심과 질투심이 맹렬히 타올랐던 것이다.

히틀러의 그런 분노는 형태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증오로 증폭된다. 형이상학적으로 그 증오를 설명할 수 없다. 그냥 증오라는 현상만 존재할 뿐이다. 사실 유대인을 왜 증오하는지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홀로코스트 이후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수많은 학자들이 분석을 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샤머니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히틀러가 많은 이유를 들어 유대인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인종이라고 설파했지만 그것은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선동에 불과했다. 진짜 원인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그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계 1차 대전은 독일 대중과 히틀러에게 새로운 독일을 여는 전환점이 되었다. 자신도 놀랐을 정도로 언변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식한 히틀러는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세계는 정치판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독일 대중의 분노와 히틀러의 분노가 만나 화학반응을 일으키자 마치 탄화 카바이드가 물과 화합하여 격렬하게 반응하듯 강력한 에너지가 만들어졌다.

히틀러의 첫 일성은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대중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단순했다.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볼 때 루터도 주장했듯 상종을 하지 말아야 인종이다. 그 종족은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킨 주범들이며, 그 볼셰비키가 세력이 커지면 독일을 삼킬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유대인은 볼셰비키와 같으며 지구 상에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강한 아리아인이 이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 강하고 새로운 독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볼셰비키의 척결이 우선이다. 이에 대중은 열광한다.

처음엔 그런 논리는 미약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집단적 무의식화 되어 있던 반유대주의 정서를 히틀러는 집요하게 자극하여 표면으로 끌어올린다. 그 촉매제가 복지와 실업자 해소였다. 세계 1차 대전으로 살기 힘들었던 대중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괴벨스를 앞세워 선동정치로 반유대주의를 부각시킨 것이다. 대중은 열광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부터 유대인 박해는 누구도 거슬릴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끝이 ‘최종 해결책’ 홀로코스트였다는 것은 이미 그때 예견하고 있었다.

이런 독일 정세에 많은 지식인들이 저항을 했지만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대중은 시간이 갈수록 히틀러 종교에 매몰되어갔다. 파시즘 체제에 대중은 예속을 욕망했다. 실업률은 제로에 가깝게 되고 복지는 확장되어 배고픔은 사라지고 그렇게 천국과 같은 낙원을 만들어준 히틀러는 그들의 구세주였다. 그들은 광신도로 변하여 갔다. 따라서 대중은 철저히 유대인 탄압에 동조했고 최소한 무관심했다. 이성을 의도적으로 마비시킨 것이다. 자신의 이웃이었던 유대인이 독일을 떠나고, 돌격대와 친위대의 폭력으로 가게가 불태워지고, 게토와 강제수용소에 감금되고, 그리고 대학살이 일어나고 있을 때도 그들은 침묵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침묵은 동조와 다름없었다.

그것은 광기였다. 카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해서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 원죄가 바로 광기였으며, 인간이 영혼과 감성을 가지면서 나타난 샤머니즘적 환각 또한 광기였다. 로마 콜로세움에서 노예들이 사자에게 잡혀 먹히는 장면을 보고 집단적으로 열광하는 것 또한 광기이다. 광기는 집단화되었을 때 그 효과가 핵분열처럼 극대화된다. 국가주의 체제를 갖춘 국가에서 민족성과 애국으로 대중을 결집시키고, 그것은 광기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학습해 왔다.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집단적 광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히틀러와 독일 대중의 광기는 즉흥적으로 발생된 현상이 아니라 오랜 기간 숙성되어 온 유럽의 반유대주에서 기원한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히틀러가 실행하고 독일 대중이 묵인했지만, 유럽의 적지 않은 대중도 그에 동조하였다는 여러 정황들이 있는 것을 보면 인종주의는 단순히 히틀러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유럽의 인종주의는 역사적 배경이 확고하며, 그것은 이미 살아있는 생물처럼 대중의 내면에 보편적 무의식화 되어 호시탐탐 표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21세기 현재도 유럽에서 극우당이 득세하고, 그 당을 추종하는 극우단체들에 의해 폭력적 인종차별 현상이 백주대낮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거대하게 집단화 된다면 그리고 그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난다면 또다시 잠재되어 있던 집단적 광기가 폭발하여 세계를 휩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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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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