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반유대주의 역사

여기서 반유대주의에 대해 잠깐 논하고 가겠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의 인종주의의 처음과 끝이며, 나치당의 존립 기반이 되는 핵심 강령이었다. 홀로코스트는 반유대주의의 완성된 최종 결과물이었다. 히틀러와 독일이 왜 그토록 유대인을 증오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라도 이해해보자는 차원에서 유대인 탄압의 역사를 뒤져보겠다. 유대인이라는 특정 민족에 대해 독일을 비롯한 유럽이 왜 그토록 모질게 탄압을 했을까.

반유대주의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오래된 현상이다. 로마 교황청을 따르는 서유럽에서 그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는 반면 동방정교회가 주류를 이루는 동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나타난다. 유럽 기독교 문화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으로 반유대주의 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반유대주의를 처음으로 설파한 사람은 기원후 380년 경 초기 기독교 성립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톰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원후 325년 니케아 공회의에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후 수많은 시행착오와 저항을 겪으며 정립되어 가고 있던 시기였다.

당시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기독교의 신학적 체계를 이끌어 가던 신학자이기도 했던 크리소스톰이 유대인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터키와 그리스를 거쳐 로마까지 이동하여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비판의 근거는 유대인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성경의 내용이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유대인이며 따라서 기독교 최대의 적은 유대인이라는 논리이다. 사실 이 논리를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허점 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구원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죽음이 없었다면 부활과 구원은 존재할 수 없다. 또한 예수와 12사도 그리고 바오로도 유대인이었다. 단순히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는 논리는 억지라는 것이다. 사실 예수를 죽게 한 것은 - 아버지 뜻대로 한 -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였다. 그리고 예수에게 사형을 명령한 빌라도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었던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가 동방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는 사실은 당시 동로마제국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관계가 있으며, 결국 크리소스톰이 총대를 메고 정무적 행위로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옳다.

유대인에 대한 크리소스톰의 비판은 매우 자극적이다.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것이다. 마귀와 춤추는 자들, 선천적으로 악한 자들, 음탕하고 탐욕스러운 자들, 세속적이고 육적인 자들, 상습적인 살인자들 등등을 종합하면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해도 다름이 없다. 유대인은 존재하지 말아야 할 악마이다.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그의 입에서 이런 독하고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대단히 의도적이라는 뜻이다.

또한 크리소스톰과 함께 당대 신학계의 거목이며, 고백록의 작가이고 가톨릭 성인이기도 한 아우구스티누스도 크리소스톰의 주장에 한마디 거든다. 유대인은 예수를 고발한 가롯 유다와 같고, 타락한 자들이며, 영원히 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고, 그리고 유대인과 이 사회를 위해서라도 그 민족 자체를 종으로 격하시켜야 한다고 점잖게 말했다. 이런 표현을 볼 때 그는 당시 종교 정치적 분위기를 거부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편승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당시 반유대 정서는 생각보다 완고했음을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논리는 800년 후 기독교에 헬레니즘 철학을 접목시켜 이론적 체계를 성립한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어받아 유대인은 노예로 삼아야 하는 종족이라고 폄하하였다. 이스라엘 땅을 떠나 유럽으로 간 유대인은 1000년이 지나도 안착하지 못하고 영원한 이방인으로 유럽인에게 핍박을 받고 있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의 배타성과 자존성이 유별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개종하지 않고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간직한 채 소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유대인들이 유럽인들의 눈에는 결코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동체 의식과 연대의식이 취약하여 이웃으로서 화학적 결합을 원활하게 하지 못했다. 또한 유별난 선민의식이 생존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사회로부터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하여튼 지금 생각해보아도 2천 년 동안 극악스러운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인 종교와 문화를 지켜며 살아남은 유대인은 참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기독교 유럽은 유대교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국교가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성경의 실재론을 그 당시 신학자들이 인정하였지만,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위정자들은 그 유대교를 믿는 민족이 보잘것없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에는 거부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파괴하여 유대인을 말살했는데 그들이 믿는 신이 자신이 믿는 신과 동일하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를 할지 그들은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유일신이 바로 자신들이 믿는 유일신이지 않는가.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더라도 그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며, 아브라함의 하느님도 같은 하느님이며, 모세의 하느님도 같은 하느님이지 않은가. 그리고 유대인의 선민사상은 성경에도 나오는 사실인데 그러면 유럽인은 선민이 될 수 없는 것인지 여러 가지 풀지 못한 문제들이 많았고, 그것은 신앙적 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을 만들게 했다.

에클레시아와 시나고가라는 단어가 있다. 전자는 기독교 교리를 뜻하고 후자는 유대인 회랑을 뜻한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에 있는 중세 때 지은 성당에 가보면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 눈을 천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조각을 볼 수 있다. 물론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띠지는 않는다. 이 조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지나친다.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은 기독교를 상징하고, 눈을 천으로 가린 사람은 유대인을 상징한다. 기독교는 세상의 주인이며 유대인은 눈을 잃고 방랑하는 민족이라는, 극히 반유대적인 조각이다. 기독교로부터 시작한 반유대주의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인 박해로 발전을 한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 유대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 일어난 때는 십자군 원정 초기였다.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한 이슬람 국가 셀주크투르크에 의해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지 순례를 할 수 없게 되자 비잔틴 제국은 1095년 서로마제국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성지를 되찾을 것을 청하였다. 정치적 야망이 컷 던 교황은 그 청을 수락하고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예루살렘 성지 회복 원정을 정식으로 승인한다. 성전이 시작된 것이다.

교황은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는 누구든지 죄를 사하여주고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교시하였다. 또한 기사들이 점령한 이슬람 도시의 전리품은 물론 통치할 권한도 주었고, 기독교 이외의 이교도들을 죽이더라도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포하였다. 그 이교도에 유대교도 포함되었다.

이런 교황의 교지가 유럽에 퍼지자 조용히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동요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유대인들은 십자군 참전 기사들에게 돈을 주고 목숨을 부지하거나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하지만 기독교 광신도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십자군 사이에서 예수를 죽인 유대인을 처단해야 한다는 반유대 기류가 퍼지기 시작했다. 반유대 운동은 순식간에 집단의식화 되어 확산되었다. 성전을 위해서는 먼저 이슬람을 치기 전에 유대인을 처단하자는 극단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1096년 독일 라인란트에 거주하고 있던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3천여 명을 살육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독일의 보름스, 마인즈, 쾰른 등 여러 도시에서 발생하여 1차 십자군 원정 시작 전에 만 학살당한 유대인이 만 명이 넘었다.

그래도 십자군 전쟁 전까지는 반유대주의가 이후보다 상대적으로 완고하지는 않았다. 조선인이 일본에서 사는 정도의 차별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유대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고착화되었고 또한 유럽 경제 문화가 발전되면서 반대급부로 차별의 정도는 심해지기 시작한다. 12세기에 화폐가 통용되고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유대인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경제활동을 못하게 한 것이다. 당시 경제의 절대적인 조직이었던 길드에 참여하지 못한 유대인은 자연스럽게 그들의 허락 하에 대금업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생존하기 위해 높은 이자를 받았다. 이로 인해 유대인은 악덕 고리대업자라는 이미지가 고착되었다. 그들만의 생존을 위한 궁여지책이었던 것이다. 유대인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대금업과 생산성 없는 의학과 법학과 예술 등이었다. 이런 제한적 경제활동이 19세기 이후 어떠한 결과를 만드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유대인이 유럽에서 어떠한 핍박을 받았는지 시대순과 형태에 따라 열거를 하겠다. 1천 년 동안 집요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생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논하기는 너무 양이 많아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1215년 가톨릭 제4차 라테란 공회의에서 유대인에게 고깔모자와 별 모양의 노란 배지 착용 의무, 유대인과의 모든 성행위 금지가 선포된다.

1239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유대인 서적 소각을 명령한다.

1267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유대교를 이단으로 공식 발표한다. 이후 유럽 각국에서 추방을 비롯하여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된다.

유덴자우

독일어로 유대인 암퇘지라는 뜻이다. 유대인이 돼지 항문에 얼굴을 대고 핥으며 똥을 먹는 조각인데, 지금도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에 가면 그 조각을 볼 수 있다. 비텐베르크 교회뿐만 아니라 독일과 프랑스에 있는 여러 교회에서도 그 조각을 볼 수 있으며 현존하는 그림도 수없이 많이 남아 있다. 유대인은 더럽고 불결하다는 조롱과 멸시의 상징이다. 종교개혁의 루터도 그 조각을 보고 감명을 받아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거기에 있는 돼지 새끼와 그것을 핥고 있는 유대인이 있다. 암퇘지 뒤에는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랍비가 서있는데 그의 왼손으로 돼지의 꼬리를 잡아당기고 마치 돼지처럼 열심히 꼬리 아래에 있는 탈무드를 본다. 마치 무언가 세밀하고 특별한 것을 읽고 이해하길 원하는 거처럼’ 비텐베르크 교회는 루터가 95개의 대자보를 붙인 바로 그 유명한 교회이다. 당시 독일에서는 유덴자우에 대한 연극도 동네에서 많이 공연되었다고 한다.

블러드 라이벌(Blood Libel)

흔히 피의 중상, 피의 비방이라고 표현되는 단어이다. 지금도 그 단어는 유럽에서 중상모략 ‘거짓 뉴스’라는 뜻의 정치적인 용어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 단어의 어원은 반유대주의에서 나왔다. 유대인이 어린아이를 잡아 피를 전부 뽑아내 유월절 제식에 사용하는 빵을 만드는 데 썼다는 유언비어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동네 어느 어린아이가 행방불명된다든지 의문의 유아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마녀 사냥처럼 인근의 유대인을 잡아 죽였다. 이런 종류의 사건과 소문은 전 유럽에 퍼져 있었으며, 그림 또한 현재도 많아 남아 있다. 마치 과거 대한민국에서 회자되었던 중국 음식점 인육 사건처럼, 존재하지 않는 사건을 만들어 유대인을 미신과 악마가 혼합된 마녀와 같은 두려움의 존재로 극대화시켰다. 유대인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종족이라는 상징적인 이야기이다. 블러드 라이벌과 같은 사건은 계몽시대를 거쳐 놀랍게도 현재도 괴기스럽게 포장되어 세상에 떠돌아다닌다.

페스트 사건

14세기 중엽 전 유럽에 페스트가 퍼져 인구의 20%가량 사망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다. 몽골제국이 침입할 때 살상용으로 쥐에 페스트균은 묻혀 와서 퍼트렸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있지만, 페스트로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을 때 유대인 독약설이 퍼진다. 당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유럽을 강타하자 시민들의 심리적인 동요를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마을 우물에 유대인이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이다. 유대인은 악하기 때문에 능히 그러고도 남는다는 당위성이 통했다. 그로 인해 독일에서만 1천 명에 가까운 유대인이 학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류의 학살은 가까운 일본에서도 일어났다. 바로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스페인의 유대인 대추방

1492년 스페인에서 알람브라 칙령이 공포되어 자국에 있는 유대인을 추방하는 일련의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에 대해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던 스페인은 국왕의 정치적인 이유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과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무아인은 모두 스페인을 떠나라고 하는 왕명을 내린 것이다. 당시 스페인도 전 유럽에 퍼진 반유대주의를 거부할 수 없었다. 30만 명에 가까운 유대인이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스페인에 남았으며, 이를 거부한 5만여 명은 스페인에서 완전히 추방당했다. 유대인 없는 무결점의 스페인이 된 것이다.

루터의 반유대주의

가톨릭 수사였던 루터가 로마 교황청의 부도덕성을 비난하며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유인물을 붙이며 종교개혁을 이끈다. 처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는 책을 쓸 정도로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다. 반유대주의 정서가 가장 완고했던 독일로서는 획기적인 반전이었다. 당시 루터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칼뱅도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어서, 그 영향으로 개신교와 청교도가 시작된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유대인의 경제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발전한 계기가 된다. 유대인을 1000년 이상 박해했던 로마 교황청과 작별하는 혁명적 상황에서 유대인을 받아주는 것은 당연한 논리였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543년 루터는 말년에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돌변한다.

1. 모든 유대인의 교회를 불태우라

2. 유대인의 거주지를 파괴하라

3. 유대인의 성경을 압수하라

4.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라

5. 유대인의 여행을 금지하라

6. 유대인이 비유대인에게 돈을 빌릴 째 이자를 금지하고 유대인의 재산을 압수하라

7. 유대인에게 육체적 노동을 시켜라

8. 기독교인들이 사는 곳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라

그리고, 유대인은 거짓말쟁이, 피에 굶주린 개 때, 피에 굶주리고 복수심에 들끓는 족속, 비유대인을 살인하고 절멸시켜야 한다고 믿고, 이방인을 말살하고 온 세상을 칼로 정복할 자들이라고 덧붙인다.

루터가 입장을 바꾼 것은 유대인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고한 자신의 권위가 무색할 만큼 그 비율이 현격히 낮자 이에 분개한 결과라고도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주창한 개혁이 강한 저항을 받아 주춤거리고, 수녀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여 얻은 딸 막달레나가 죽는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그에 매일 폭음을 하고, 이런 세속적인 상황에 처하자 믿음이 약해져 구원을 의심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좌절하고, 또한 다혈질적이고 조증적인 성격이 더해져 세속적인 분노가 폭발한 표현이 바로 위의 글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성서로 돌아가라고 설파했듯, 이웃의 사랑을 중시하는 그에게도 유대인만큼은 인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다분히 개인사적인 감정을 표출한 이 글이 400년 후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의 참고서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드레퓌스 사건

대표적인 유대인 탄압 사건이다. 1894년 독일계 프랑스 유대인이었던 알프레도 드레퓌스 장교가 독일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간첩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0여 년 동안 고초를 격은 사건이다. 개종한 유대인의 후예이며 착실하게 군 복무를 하고 있던 드레퓌시 대위는 어느 날 프랑스군 군사 기밀을 독일 대사관 군무관에게 팔아넘겼다고 고발되어 재판을 받는다. 증거가 너무나 허접하여 유죄가 날 가능성이 전혀 없었지만 재판부는 종신형을 선고하고 그를 ‘악마의 섬’이라 불리는 악명 높은 감옥에 감금시킨다.

이 사건은 급기야 프랑스를 반드레퓌시파와 드레퓌시파로 양분하게 만들어 치열하게 대립하게 한다. 반드레퓌시파는 민족주의적 보수 성향이 강했고 드레퓌시파는 자유주의적인 개혁 성향이었다. 논쟁을 즐기는 프랑스인답게 반유대주의와 정치 이데올로기가 혼재한 불꽃 튀는 공방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1898년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백한다’라는 드레퓌스 옹호 글을 ‘오로르’라는 신문에 기고하고 그 날 20여만 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한다. 그로 인해 에밀 졸라는 재판을 받는 고초를 겪지만 오히려 그 재판으로 인해 드레퓌시 사건은 다시 파리 전체에 부각되어 사건의 상황이 역전되는 계기가 된다. 그해 8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중압감을 가진 진범들이 심리적 동요로 인해 한 명은 자살하고 다른 한 명도 국외로 도망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드레퓌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1906년 드레퓌시는 이 사건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당시 이 사건은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반유대주의 정서가 완고하지 않았던 프랑스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파리 지성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며 수많은 민중의 주검으로 왕정을 무너트린 위대한 프랑스이지 않는가. 인종차별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난 그 사건으로 지성계는 자성하고 각성한다. 하지만 지성계와는 다르게 대중은 아직도 반유대 정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유대인에 대한 폭동까지 일어난 것을 보면 반유대 정서가 대중의 무의식에 얼마만큼 뿌리 깊게 남아 있는지 가름할 수 있다. 유럽에서의 반유대 정서는 2천 년의 역사만큼이나 깊었던 것이다. 하지만 40년 후 우리는 집단 무의식화 된 거대한 반유대 지옥을 보게 된다.

포그롬

러시아에서 발생한 유대인 집단 약탈과 학살을 포그롬이라 한다. 독일과는 다른 형태의 유대인 탄압이었다. 18세기 중반 독일과 서유럽에서 탄압을 받던 유대인이 동방정교회 국가인 러시아로 대거 유입되어 기존의 유대인과 합류하면서 35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는 소수민족을 형성하였다. 독일과 서유럽에서 하던 형태의 경제 활동을 러시아에서도 지속하면서 유대인 세계는 여러 분야에서 빠르게 성장하였다. 1917년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레온 트로츠키 그리고 블라드미르 레닌 등 볼셰비키 혁명의 주역 80%가 유대인이었을 정도로 그들은 러시아의 중산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차르 시대에 유대인은 서유럽에서와 같은 이유로 슬라브 민족에게 시기와 미움을 사면서 반유대주의가 뒤늦게 형성된다. 1881년 차르 알렉산드로 2세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데, 배후에 유대인이 개입되어 있다는 헛소문이 퍼지면서 200여 개의 유대인 마을이 피습당하고 상당한 재산상의 피해를 입는 폭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1903년 결국 거대한 포그롬이 발생한다. 러시아 남부 도시 키시네프, 즉 현재의 몰도바 수도 키시네프에서 6살 어린아이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지역 신문에 범인이 유대인으로 추정된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에 반유대 정서가 팽배해 있던 시민들이 마침 정교회 부활절의 끝나고 축제를 하는 과정에서 술에 취해 과격해졌으며 이에 군중심리가 발동되어 유대인 마을을 쳐들어가 쑥대밭을 만들었던 것이다. 폭동은 수일간 이어져 45명이 학살당하고, 600여 명이 중경상을 입고, 700여채의 건물이 불태워졌다. 이런 무차별한 광란은 지역 경찰의 방조 하에 이루어졌으며, 추후 수습 과장에서 보여준 러시아 정부의 소극적인 행태는 두고두고 역사적 비난을 면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도 회자될 정도로 세계적으로 이슈화 되었으며 따라서 유럽의 반유대 정서를 재정비하게 만들었다. 러시아에서 유대인은 무의미한 존재이며, 독일에서 취급받은 것보다 더 악질적 인종주의였고, 무슬림보다도 못한 존재였다고 당시 언론은 전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의 유대인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생존 패러다임을 바꾼다. 순종과 무저항으로 유럽의 탄압을 이겨왔던 유대인이 러시아에서는 러시아화 되기 위해 개종도 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려고 화학적 결합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폭동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었다. 당시 20세기 초에는 영국,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 등에서 유대인 차별 정책을 폐기하는 등 유럽에 새로운 유대인 유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으며, 어느 국가도 괄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당시 러시아 포르롬이었으며 이에 놀란 유대인은 새로운 모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시오니즘과 아메리카로의 이주였다.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가자는 게 시오니즘이며, 당장의 이주를 원하는 것이 아메리카 이민이었다.

그 무렵 체코 프라하에 살고 있던 프란츠 카프카도 시오니즘에 심각하게 빠져 고민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카프카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그의 여동생들처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되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스라엘 건국의 추축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시오니즘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어서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은 미국으로의 이민이었다. 영국과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20세기 초 러시아와 유럽에 있는 유대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20세기 판 엑소더스였다. 한 예로,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갱스터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주인공들이 유럽에서 건너온 유대인 이민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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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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