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DMZ 1 - 통문

DMZ 2015. 10. 17. 16:40

오래전이다. 그 해 3월 어느 날, 오전 내내 짱짱하던 하늘이 오후부터 금방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검은 장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완전군장을 꾸린 우리는 2년간 정들었던 페바부대를 떠나 철책으로 야간행군을 하기 시작했다. 2년 전 이맘때 우린 철책에서 이곳으로 이동하였고, 오늘 다시 예전 있던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북쪽에 있는 부대는 주기적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1년 후 우리 중 상당수는 다시 다른 페바부대로 이동할 것이다. 그건 전투사단 보병의 숙명이다.

대대 병력 전체가 부대를 빠져나가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군화 소리는 점점 크게 허공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슨 전쟁터로 나가는 듯 우리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긴장감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부대를 나와 가다 서기를 반복하면서 마을을 지나 삼거리 평택집에 이르렀을 때 가게 미닫이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는 춘자의 모습이 붉은빛 현관 등 시야 한쪽에 포착되었지만 우린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이등병 때 일명 개나리라도 불리던 땅굴 예상지역에서 이곳 페바로 내려온 후 우린 2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처음 완전군장 10킬로 구보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모두 토악질을 해댔고, 대간첩작전에 투입되어 한여름 달포 동안 야전에서 생활해야 했고, 3소대 남기복 병장이 임진강가에 매복 났다가 익사하는 사고도 있었고, 한겨울 혹한기 훈련 때 소주를 마셔대며 밤새도록 분침호를 파던 우리 모습이, 그리고 부대 옆 가게 주인의 음흉한 너스레와 삼거리 평택집 춘자의 코맹맹이 소리도 이젠 기억이 되었다.

3개월 전 어느 날 소대장은 나를 중대 행정반을 불렀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게 빨고 재떨이에 눌러 끄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 나하고 GP에 가야겠다. 머 선택의 여지는 없다는 거 알지. 소대 하나를 당장 만들어야 하니까 같이 들어갈 애들 생각해보고…. 정원은 20명이니까 예비분 포함해서 25명 정도 똘똘한 애들 골라보자고 내일부터."

군의 전략적 차원에서 DMZ GP 수를 늘렸고, 그에 따른 수색대 병력 충원이 필요하여 각 보병 중대에서 수색소대를 하나씩 만든다는 소문이 얼마 전부터 펴져 있었는데 그게 나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GP에서 교체되는 시점이 나의 제대 시점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색소대에 병장 하나는 필요한데 중대 통틀어 바로 내 밑에 후임병은 철책 투입 시점인 3월이 되도 상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짬밥 수로 볼 때 나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거의 뜬눈으로 지새웠다. DMZ, 철책, GP…. 앞으로 펼쳐질 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병장을 달고 평온하게 군 생활을 마무리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끝까지 역마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젠 GP까지….

이제 마지막이 될 행군은 드디어 여명과 함께 마감했다. 밤새 걸어 지오피 대대에 도착한 우리는 인수인계하느라 어수선한 부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방 특유의 좁은 연병장에서 전투식량으로 대충 아침밥을 때운 후 드디어 각자 소대별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새로운 세계와 맞닥트리는 것이었다.

우린 다시 한 시간 반 정도를 더 걸어 산속 깊숙이 들어갔다. 대남방송소리가 점점 맹렬히 커지고 있었다. 2년 만에 맡아보는 철책 냄새였다. 그 특유의 황량함은 여전했다. 초봄의 을씨년스런 잡목들과 비포장도로 바닥에서 맴도는 습한 흙먼지 등은 어제 오후부터 짓누르고 있던 검은 장막 하늘과 합해져 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산허리를 돌아 마지막 능선에 올라서자 축구장 거리 정도에서 철책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너머는 안개가 낀 듯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밤새 행군으로 지친 우리는 산 정상에 오르듯 마지막 숨을 거칠게 뿜어대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그곳은 아직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아직도 봄은 요원해 보였다. 페바부대는 그래도 3월 중순이 되면 봄기운이 감돌았지만, 직선거리로 불과 20km 정도 북쪽에 있는 철책은 여전히 겨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전 눈이 왔는지 산 아래는 없던 눈들이 곳곳에 지척이었다. 제설작업을 해 놓은 시커먼 눈에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젖었던 등에서 한기가 돌았다.

능선을 잠시 따라가다 대공초소가 보이는가 싶더니 그 아래에 통문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히듯, 통문은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우리를 삼킬 채비를 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몸짓으로 우리는 그 통문을 향해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 시큼한 철 냄새가 눈을 파고들었다. 지독한 철 냄새였다.

통문 통과절차를 마친 우리는 방탄복을 입고 실탄을 지급 받은 후 장전을 하고 통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침묵이 무겁게 우리를 누르고 있었다. 대남방송 소리만이 머리 위에서 형체도 없이 맴돌고 있었다. 무슨 소린지도 모를 윙윙거리는 소리, 순간 저 안에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갔다.

드디어 통문 장교가 첫 번째 통문 자물쇠를 풀고 시꺼먼 철문을 연다. 쇠 끌리는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그리고 두 번째 문도 똑같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이번엔 쇠 끌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그 통문 사이로 옅은 눈이 덮여 있는 검은 길이 보였다. 그 길은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통문 장교가 철문 옆으로 비켜서자 우린 지체없이 양옆으로 갈라져 그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지향사격자세를 취하고 좌우 경계를 하며 통문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디찬 공기가 코끝을 스치고 있었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우리는 드디어 DMZ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15분이면 갈 시간을 30분 이상 소비하며 GP에 도착한 우리는 쉴 틈도 없이 기존 부대와 인수인계 작업을 시작했다. 두 소대장은 ROTC 동기인 듯 서로 친밀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기재계인 송 상병은 차 일병과 강 일병을 데리고 장부에 있는 물품 수량을 세느라 여념이 없었고, 나 상병은 대공용 M50기관총을 인수 하느라 대공초소에 올라가 내려올 줄을 몰랐고, 취사병 오 일병은 지하 취사장에서 취사도구와 식량을 인수 하였고, 방 상병은 전기, 급수, 난방시설 등의 위치를 확인하고 사용방법을 습득하고 있었다.

좁은 GP는 부산했다. 점심을 대충 먹고도 우리는 한 시간 이상 더 작업했다. 나와 분대장 둘은 기존 부대 선임하사와 함께 벙커와 군 시설물을 돌아보며 이 GP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다. 선임하사는 한 시간 이상을 떠들어 댔지만, 귀에 새겨들은 것은 몇 마디뿐이 안 되었다. 그는 벙커 내부 벽에 파인 콘크리트 흔적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이게 무엇인 줄 아느냐고 물었고, 대답은 필요 없다는 듯 북한에서 날아온 총탄의 흔적이라고 말을 이었다.

"저 새끼들은 그만큼 조준을 해서 쏜다는 거지. 우린 말이야 교전이 붙으며 총구가 어디로 향하는 줄 알아. 머 하늘을 향하고 마구 쏘아대는 거야 제기랄. 너희는 쟤들을 보고 쏠 거 같지? 그게 쉽지가 않다는 거야."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터지면 여기가 너희 무덤이야 무덤. 후퇴한다고 저 뒤에 있는 통문은 열리지 않아. 머 그럴 시간도 없겠다. 이 GP에만 조준된 저 새끼들 포탄이 수백 발은 될 거니까. 그리니까 분명한 건 너흰 첫 몽둥이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초개와 같이 사라진다는 거야."

우린 그의 말에 놀라지는 않았다. 겁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과장되었다고 단정하지도 않았다.

북적거리던 GP는 기존 부대가 떠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우리는 피곤함을 잊은 채 각자 내무반과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고, 기재계, 취사병, 상황병, 관측병 등도 인수 한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저녁 먹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방송소리만이 그 침묵을 이완시키고 있었다.

GP 분위기가 생경하여 모든 게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게 분명했다. 처음엔 다 그렇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우린 이곳에 완벽하게 적응할 것이다. 며칠 후면 귀도 마비되어 저 지긋지긋한 방송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나는 상황실로 올라가 난간대를 잡고 북쪽을 보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검은 장막이었다. 앞에 보여야 할 북한 GP는 아직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에는 보일 것이다. 남과 북에서 쏘아대는 방송소리는 여전히 머리 위에서 뒤엉켜 윙윙거리고 있었다. 순간 졸음이 왔다. 그러고 보니까 24시간 동안 한잠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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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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