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DMZ-4 특과병

DMZ 2015. 11. 19. 13:32

GP에는 수색대원만 있는 건 아니다. 군견병, 의무병, 방송병1,2 등 특과병들이 우리와 함께 부대끼면서 생활한다. 의무병과 군견병까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방송병이란 병과가 있다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정말 특수부대였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테니스병, 바둑병, 심지어 BOQ 연탄병도 있었다. 

하여튼 그들은 각자 근무하는 위치와 취침하는 내무반은 다르지만 같은 벙커에서 생활하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그리고 3~4개월 주기로 바뀌는 수색대와 달리 그들은 6개월 이상 1년 가까이 GP에서 근무하며 휴가도 가고 교육도 갔다가 온다. 터줏대감이면서, GP장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는 독립된 임무 수행 등으로 인해 우리와 묘한 관계가 형성된다. 그래서인지 그들과 우리는 일정 부분 이상 친숙해질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실을 며칠 후 알게 된다. 아마도 그들과 우리는 씨가 다른 종자라는, 섞이지 못하는 일종의 이질적인 요소가 많았는지 모른다.

나는 처음 한동안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친하다는 의미는 인간적이거나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교감이 아니라 단순한 오락적인 교감이었다. 왕고참인 나와 1분대장인 정 하사만이 그 분위기에 탐닉했다. 소대장도 알고는 있었지만 차단하지는 않았다.

방송병은 두 명이었다. 그 중에 병장(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만년 병장이었다)을 달고 있는 방송병1이 우리가 GP에 온 지 며칠 안 되었을 때 왕고참인 나를 방송실로 조용히 불러 다이제스트 과자를 주며 접근을 했다. 처음 들어가 본 방송실은 숙소와 방송 장비들이 함께 있는 아담한 공간이었다. 그곳엔 과자, 라면, 담배, 소설책 등이 수북했고, 센데이서울은 물론이고 페트하우스 같은 도색잡지도 꼬불쳐두고 있었다. 한마디로 슈퍼마켓이었다. 마치 이등병 때 잠깐 있었던 땅굴예상지역의 포대 오피 벙커 같았다. 그곳은 여기보다 레벨이 더 높은 만물상이었다. 판매까지 했으니까. 

발단이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방송실에 당연히 화투도 있었으며 우린 그들과 두 명이 누우면 딱 맞는 방바닥에 5명이 둘러 앉아 자연스럽게 밤마다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멤버는 나와 정하사 그리고 방송병1,2와 군견병 그렇게 5명이었고 때론 그 중에 한 명이 빠지기도 했다. 그냥 심심풀이 게임이었다. 그 게임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우린 약간의 돈을 투자했다. 사실 GP에서는 돈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우린 당시 월급 5천원과 생명수당 3천원을 아낌없이 그 게임 베팅했다. 다 잃어야 8천원이었다.

방송병1은 타짜였다. 2년여 동안 방송병 생활하면서 터득한 생존의 법칙인지 모른다. 녀석의 실력으로 보아 아마도 여기를 거쳐 간 우리 같은 수색대원들의 호주머니를 다 털어냈을 게 분명했다. 이겨보려고 정하사와 거의 짜다시피 해서 게임을 하기도 했지만 녀석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나중에 이해한 것은 그렇게 실력이 월등하지 않았다면 화투 자체가 거기에 없었다는 거다. 결과적으로 우린 녀석의 무료한 시간을 위해 몸과 돈을 바쳐 헌신한 꼴이었다. 생명수당까지 바치면서.

그래도 방송병 때문에 이 살풍경 넘실대는 비무장지대에서 생각지도 않게 여군을 볼 수 있었다. 페바는 물론이고 군 입대 후 한 번도 보지 못한 여군을 여기서 볼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라이브 대북방송을 위해 지피까지 들어 온 2명의 여군은 북한군을 향한 심리전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위문공연이 목적이었다고 우리는 격하게 주장했다. 중사 정도면 어림잡아 나이로도 우리와 같은 또래였다. 군대용어로 여기서 표현할 수는 없지만 국방부장관님께 큰절을 백번 올려도 모자람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냥 다 예뻤다.

나는 유일한 병장이라는 신분을 내새워 가능하면 여군과 지척에 있으려고 모든 권한을 행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에스코트하는 방송병과 소대장 틈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오감을 집중했다. 광채가 나는 얼굴과 한 올 흐트러짐이 없는 팽팽함 머릿결과 대뇌를 혼미하게 하는 목소리, 옅은 화장품 냄새 등이 삭막한 사병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었다.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세 시간 후 그녀들은 우리를 남겨두고 홀연히 떠났다. 나는 마지막까지 그녀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경호분대에 끼어 통문까지 아낌없이 에스코트했다. 물론 왕고참이란 신분을 이용했음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동이 틀 무렵이면 군견병은 군견을 데리고 매일 운동을 시켰다. 가능하면 민정경찰들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그 둘은 좁은 지피 공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철책을 돌기도 하고, 정문 쪽 연병장에서 여러 가지 동작과 운동을 했다.

셰퍼트인 그놈은 몸집이 거대하고 사나워서 우리들에게 개로서 취급을 못 받았다. 수색, 추적, 경계, 탐지 등의 임무를 가진 군견들 중 그놈은 비교적 약한 경계견이었는데도 말이다. GOP에서 추적견이라는 셰퍼트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놈은 한마디로 사자와 곰을 합쳐 놓은 거대한 괴물이었다.

GP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주인 몰래 그 놈을 보러갔다가 기겁을 하고 도망쳤었다. 우리가 아는 개의 수준이 아니라 괴수였다. 그리고 어느 날 군견병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는 나를 데리고 그놈한데 가서 정식으로 인사를 시켜주었다. 그렇다고 그놈과 내가 친해진다는 건 아니었다. 월래 개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런 사나운 개를 좋아할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이놈은 사람을 물지 않아요. 아주 착한 놈이죠. 이름이 춘자예요. 촌스럽죠. 누가 처음 붙였는지 모르지만 춘자라고 불려왔어요. 놈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지금 7살인데, 1년이나 길어야 2년이면 은퇴를 해야 하거든요. 이 개 값이 얼만지 아세요? 아마 내 목숨 값보다 비쌀걸요. 이 놈 먹는 것도 장난이 아녀요." 

군견은 군견병 없이 존재할 수 없고, 군견병 또한 군견 없이 존재의 의미가 없다.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라는 것이다. 개 하나에 군인 한 명을 필요로 하는 게 상식적으론 납득할 수 없지만, 군대이기에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른다.

군견은 예사로운 개가 아니기 때문에 군견병 이외의 다른 사람과는 가능하면 접촉을 차단한다. 우리 춘자도 GP 내에서 가장 후미진 곳, 사람 눈에 안 띄는 곳에 기거를 했고, 처음 그곳에 들어가서 인수인계 할 때 접근금지 교육을 받았었다.

하지만 인간만사 규율 대로 되는 것은 없다. 결국은 정일병과 군견병이 한바탕 싸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요일 오후 하릴없이 GP를 거닐던 정일병은 춘자집을 지나치지 못하고 특유의 장난기에 발동을 걸었다. 키는 작지만 깡다구 하나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은 녀석은 줄이 끊어질 듯 무섭게 달려드는 춘자를 향해 장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춘자는 정말 말뚝을 뽑아버릴 것처럼 광분했다. 그 소리에 놀란 군견병이 득달같이 달려와서야 춘자는 진정을 했고 정일병도 그 때서야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를 떴다.

그날 저녁 그것을 빌미로 벙커에서 둘이 붙은 것이다. 다행히 주위에 소대원들이 있어 욕설과 멱살잡이 정도에서 끝이 났지 그렇지 않았다면 군견병은 아마 정일병에게 치도곤을 당했을 것이다. 

" 예 발정기에요 발정기, 그러다가 개줄이 끊어져버리면... 상상을 해보세요. 그 후에 벌어질 일은 정말 끔찍하잖아요. 춘자가 아무리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하지만 저 정도로 광분하면 사람 하나는 정말 아작이에요 아작... 그럼 누가 책임지겠어요. 저예요 저!"

취침 무렵, 위로차 자신의 방에 찾아간 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씩씩거리며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GP라는 곳은 여러 병과를 가진 사병들이 생활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산만한 것은 사실이었다. 옆 GP는 포대 OP까지 겸하고 있어 우리보다 대여섯 명이 더 많았다. 더구나 OP장은 장교였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서로 부딪히지 않으려고 자중을 하지만 때론 본의 아니게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곤 한다. 펄펄 끓는 청춘들이 좁고 고립된 공간에 갇혀 있으니 오죽 답답하겠는가.

하지만 불문율은 있다. 서로 다투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넘어선 안 될 선을 모두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특과병이든 아니든 비무장지대에 있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불문율이었다. 조금만 그 긴장감이 이완된다면 끔직한 총기사고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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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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