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스페인에서 알타미라 동굴벽화가 발견되었을 때 전문가들은 20여 년 동안 그 벽화에 대한 고고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1만 5천 년 전에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벽화의 수준이 상당하였기 때문에 처음엔 누군가의 객기 어린 장난으로 치부하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기껏해야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시절 그러니까 5천 년 전의 회화 세계에 머물러 있던 당시의 식자들에겐 1만 년이나 더 오래된 그 벽화를 인정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 시절 그들에겐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의 벽화였으니까 말이다. 구석기인의 지적 수준을 너무 낮게 본 결과였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1,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혼란의 와중에서도 고고학 발굴은 계속 이어져왔다. 크고 작은 동굴벽화들이 발굴되는 가운데 1940년 9월 프랑스 남서부 지역 몽티냐크라는 작은 마을에서 라스코 동굴벽화가 발견된다. 독일 나치가 1940년 6월에 프랑스를 점령했는데, 그 와중에 주술적 판타지 세계에 빠진 어린 청년들이 발견한 라스코 동굴벽화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보다 시기가 2천 년 정도 앞섰고, 규모와 작품성 면에서도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당시는 전쟁통이라 정밀 조사를 하지 못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하여 언론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관광 상품으로도 개발하여 1963년까지(관람객들이 너무 많아 벽화가 오염되었기 때문에)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개방하였다. 라스코 동굴벽화 발굴은 센세이셔날 한 고고학적 쾌거였다. 특히 세계 미술계는 열광과 찬사를 보내며 인간의 예술사를 다시 근본적으로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카소처럼 당대의 많은 화가들이 라스코 동굴벽화의 미학적 세계를 추종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고학과 인류학계에서도 그들이 왜 그 깊은 동굴에 벽화를 그렸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기 위해 온갖 가설을 내놓았다. 후기 구석기시대의 문화적 현상에 대해 본격적인 담론이 펼쳐진 것이다.

라스코 동굴 벽화

하지만 라스코 동굴이 발견되고 54년이 지난 1994년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 강을 따라 형성된 석회암 지대에서 위 두 동굴벽화보다 무려 1만5천 년이나 빠른 3만 2천 년 전의 동굴벽화가 발견된다. 장 마리 쇼베라는 동굴 탐험전문가가 우연히 발견한 그 동굴은 약 1만 5천 년 전에 산사태로 굴러 떨어진 바위들이 당초 입구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2만 년 동안 인간의 발자취를 거부하고 깊이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동굴 입구가 잘 보이지 않았으며 통로가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수직 방향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그 틈 사이로 동굴 내부 공기가 미세하고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동굴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찾을 없는 현장 조건이었다. 아마도 쇼베가 아니었으면 쇼베 벽화는 영원히 땅속에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업적을 높이 사 동굴 정식 명칭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아무튼, 쇼베 동굴벽화는 구상적으로도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미학적으로도 인류세의 편견을 뒤집어버릴 정도로 탁월하고 독특하다. 위의 두 동굴벽화가 여러 가지 회화 기법과 철광석을 이용한 다채로운 색을 활용하여 화려하게 보이지만, 흑백의 수묵화처럼 목탄으로 그린 쇼베 동굴벽화는 사실성과 상상력과 역동성 면에서는 오히려 두 동굴보다 우수하다. 당시는 유럽 구석기시대 중 오리냐크 문화기(43,000년 전 ~26,000년 전)로서 20세기 들어 유럽 지역에서 여러 종류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발굴되고 있었다, 특히 독일 남부 홀렌슈타인 슈타델 동굴에서 발굴된 매머드 상아로 만든 사자 인간상, 말, 매머드, 사자 같은 동물 조형물과 그리고 홀레 펠스 동굴에서 발굴된 다산의 여신이라 불리는 비너스 상과 독수리 다리뼈로 만든 인류 최초의 악기 피리 등이 있다. 그 밖의 지역에서도 매머드 상아로 만든 수많은 작은 장식용 세공품들이 발굴된 시기이며, 쇼베 동굴벽화도 그 화려한 오리냐크 문화기에 속한다.

쇼베 동굴 벽화

먼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오리냐크 문화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가겠다. 오리냐크 문화권은 지금의 서유럽과 독일 남부와 서부 러시아를 포함하는 구석기시대의 문화이다. 그 문화의 주인은 6만 년 전 아프리카를 탈출하여 레반트 지역을 거쳐 유럽 지역에 당도한 호모 사피엔스이며, 그들이 세운 첫 번째 문화이다. 고도로 진화한 그들은 당시 레반트와 유럽에서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과 역사적인 조우를 한 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4만 년 전에 네안데르탈인은 멸종되고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가 처음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에 대해 많은 가설이 있지만 아무튼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크로마뇽인이라고도 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유럽을 포함한 유라시아를 지배하던 시기에 쇼베 동굴벽화가 탄생했다. 현대성을 함축한 문화가 처음 탄생한 시기였다. 비로써 인류세가 그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놀라운 발견이었던 것이다.

쇼베 동굴벽화 중 사자 애니메이션

회화적인 안목이 없더라도 쇼베 벽화는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당시 남유럽에 서식했던 동굴사자와 코뿔소와 매머드 그리고 말, 사슴, 들소, 곰 등을 비롯해 많은 동물들의 그림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탁월한 그림은 단연 동굴사자 벽화이다. 지금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암사자와 거의 같은 모습인데 형태적으로도 완벽하고 사실적이며 특히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역동성을 발산시키고 있다. 사자가 고개를 앞으로 내밀고 걷는 특유의 움직임을 스틸 사진처럼 생동감 있게 묘사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 연장선에서 형상을 중첩하여 그림으로서 애니메이션 효과를 내려고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움직임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움직일 것 같은 현실감을 역어낸다. 사자뿐만 아니라 말과 코뿔소 그림에도 그런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코뿔소 그림은 저속촬영 사진을 찍듯 생생한 움직임을 보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연속동작을 표현하려고 한 그 발상이 3만 2천 년 전 구석기 동굴인의  정신세계에 존재했다는 게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그 당시의 구석기 유물들은 세계 곳곳에서 많이 발견되었지만 단순한 형태의 벽화나 암각화로서 회화적으로 따졌을 때 유치원생 그림 수준에 불과하다. 심지어 3만 년 후의 인류도 그런 애니메이션적 발상을 하지 못했다. 5,000년 전 이집트와 수메르 문명이 개화되는 시점에 그린 벽화들을 보면 어떤 신화에 대한 서사와 그에 따른 정형화에 역점을 두었을 뿐 예술적 역동성이라는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회화의 기술적인 면에서는 우월할지 모르지만 예술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3만 년 전의 오리냐크 문화 즉 쇼베 동굴인들이 더 우월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쇼베 동굴 벽화

예술적 영감은 고도의 상상력의 발현이다. 풍부한 상상력은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선에서 어떤 형태를 표현할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고 그 에너지는 예술적 영감을 각성시킨다. 인식과 이성이 아닌 느낌과 감성의 힘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만 그 유는 세계의 현상을 극복한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은 자유를 추구하며, 그리고 그런 능력은 후천적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불멸의 예술가들을 보면 보편성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신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기존의 질서를 비틀고 또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일종의 사회문화적 돌연변이일 수도 있고 새로운 인간형일 수도 있다.

 

그 벽화를 그린 호모 사피엔스는 누구였을까. 한 사람이 그린 것은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많은 시간 동안 그렸을 것이다. 단테와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많은 예술가 등이 주축이 된 정신사적 대혁명의 시기를 일명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것처럼 쇼베 동굴벽화를 그린 부류들도 르네상스적 인류였을지도 모른다. 고대 중세를 거치면서 그동안 무시되어 왔던 인간의 예술적 정신이 그들에 의해 화산처럼 폭발했듯이 쇼베 동굴 화가도 새로운 예술사적 도약을 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쇼베 동굴벽화를 비룻해 3만 2천 년 전 오리냐크 문화기에 만들어진 조각품들을 보면 놀라운 상상력과 농축된 인식의 세계와 그리고 뛰어난 지적 수준을 엿볼 수 있다. 호미니드처럼 생존하기 위해 수렵 채집만 하는 무지한 원시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잉여의 시간과 공간이 존재했고 그 틈을 이용해 정신활동에 몰입했다는 점이다. 그런 행위들이 원시 신앙의 표현이라고 설명하더라도 인간의 예술적 발현은 그 자체만으로 존중을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샤머니즘적 환각 상태에서 벽화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런 발상은 인류세의 관점에서 그들의 문화 수준을 평가절하하는 단순한 편견에 불과하다. 현대의 예술 작품 중에서도 알코올과 환각성 물질의 도움을  받은 작품이 상당수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아무튼 쇼베 동굴인은 호모 사피엔스의 지적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자연의 힘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문화를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인간은 아프리카를 떠나고부터 수많은 자연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왔다. 자연 앞에 원시인들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였고, 굴복은 종교처럼 성스러운 것이었다. 태양을 숭배하고 달과 바람과 땅과 하늘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쇼베 동굴인을 비롯해 오리냐크 문화도 더 이상 진일보하지 못하고 1만 년이라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고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도 보였다. 그보다 수준이 높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수준의 벽화가 발견된 것은 1만 5천 년이 지난 후였으니까 말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지적 수준이 본격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던 때가 문자가 발명된 5,000년 전부터인데, 1만 5천 년은 그보다 3배나 많은 시간이다. 진화는 매우 더디게 수많은 부침을 거듭하며 한발 한발 내딛고 있었던 것이다.

쇼베 동굴 벽화 / 석회암 종유석 벽화. 여자의 하체 부분이 그려져 있다.

쇼베 동굴에서 벽화를 그리던 그 누군가를 상상해본다. 그는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선대에도 화쟁이들이 있었고, 그들이 쇼베 동굴과 다른 동굴에도 벽화를 그렸지만 그의 능력치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들의 벽화나 암각화는 사냥에 대한 기억을 기록해 놓는 정도로 단순했으며 사람들의 감흥을 일으키게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선조들에게 없었던 고도의 상상력과 뜨거운 영감이 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마치 3만 년 후 미켈란젤로처럼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고양된 예술은 고루한 정신세계를 각성시키고 보다 나은 인간의 문화적 소양을 배양시킨다. 칠흑 같은 어둠이 침잠해 있는 깊은 동굴에 희미한 등불이 그 어둠을 지우고 있고, 사자처럼 어둠 속에서 안광을 발산하며, 그는 목탄으로 영혼 속에 있는 사자를 그리기 시작한다. 뜨거운 열기가 그의 등에서 일렁이고, 어떤 주체하지 못하는 광기가 그의 몸에서 발산되고, 목탄의 거친 검은 선은 그의 영감의 지시에 따라 무언가 황홀경에 빠진 듯 석회석 벽면을 긋고 있었다. 서서히 사자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종교적 색채를 거부한 최초의 화가였으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호모 사피엔스였다. 비록 그 영감의 불꽃이 뜨겁게 타오르다 꺼졌지만 그래도 불씨는 남아 아주 먼 미래에 전달되었다. 한때 이 지구에 불꽃처럼 살았던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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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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