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가 남긴 창작물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은 일설에는 70,000년 전이라고 하지만 정설은 50,000년 전 ~ 45,000년 전 구석기시대에 남긴 동굴벽화이다. 대표적으로 스페인 엘 카스티요 동굴에는 그 당시 호모 사피엔스의 손바닥을 스텐실 기법(물감을 입으로 뿌려서 형태를 만드는 기법)으로 새긴 작품이 벽에 남아 있다. 그리고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전유물이었던 동굴 벽화가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 섬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시기가 엘 카스티요 동굴 벽화와 비슷한 45,000년 전이라고 한다. 당시 그 지역에 살았던 멧돼지 그림과 엘 카스티요 동굴벽화와 흡사한 스텐실 기법의 손바닥 작품도 함께 발견되었다.

 

구석기시대의 호모 사피엔스는 토기를 발명하기 전에, 동굴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다 수많은 벽화와 암각화를 그렸다. 처음엔 손가락으로 간단한 그림을 그리던 동굴인은 10,000여 년이 지난 후부터는 목탄과 광물 등을 이용해 많은 동물들의 구상화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특히 석회암 동굴이 발달되어 있는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지중해안을 따라서도 드물게 분포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32,000년 전의 쇼베 동굴벽화를 비롯해, 17,000년 전 이후에 창작된 수중 동굴벽화로 유명한 코스케, 피카소가 사랑했던 라스코, 인류세의 고정관념을 깨트린 알타미라, 그리고 니오, 폰 드 고옴 등의 많은 동굴 벽에 사자, 매머드, 들소, 말, 사슴, 코뿔소 등의 그림들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상대적으로 호모 사피엔스 자신들의 모습은 원라인 그로잉처럼 형태만 이미지화한 듯 간단한 선으로만 묘사하였지만 동물들은 구상화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현재 발견된 300여 개의 동굴 유물들 중에서 벽화가 있는 동굴은 50여 개라고 하는데, 아마도 찾지 못한 동굴벽화는 그 보다 더 많을 것이다. 

라스코 동굴벽화

특히 후기 구석기시대는 동굴벽화의 황금시대였다. 그 당시는 마치 동굴벽화의 클래식 시대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미적 감각이 풍부하고 정교하고 웅장하다. 여러 가지 회화 기법과 화려한 다채색을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사실적이면서 역동적이고 그리고 추상적 표현까지 겸비하여 인간의 지적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20세기 인간 피카소도 그 벽화들을 보고 감탄한 후 영감을 얻어서 모방 그림을 즐겨 그렸고 그 과정에서 피카소 특유의 추상화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피카소에게 영감을 줄 정도로 구석기시대의 동굴 벽화는 예사롭지가 않고, 후대 홀로세인들은 ‘보편적 예술의 정점“이라고 극찬했다. 그리고 미학적인 식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벽화를 보는 순간 예술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느낀다.

 

현재 인류세들이 볼 때 좀 과장된 면도 있지만, 그 당시 동굴벽화의 미학적 수준은 15,000년 이상 시간적 공백기을 거쳐 기원후 14세기 르네상스 발흥기 때 재창조되었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주장한다. 쇼베 동굴벽화를 시작으로 라스코와 알타미라를 거쳐 약 12,000년 전 구석기시대 말기에 이르면, 영거 드리이아스라는 치명적인 빙기가 몰아치면서 그로 인해 삶의 환경은 더욱 척박해지고 벽화의 특징은 샤머니즘적인 표현을 구현하고, 구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컬트적인 추상적 도형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즉 미학적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쇼베 동굴벽화

구석기인들이 동굴에서 살 때, 그러니까 12,000년 이전에는 지구는 빙하기였다. 약 300만 년 전에 시작된 플라이스토세 대부분은 빙하기와 간빙기가 이어지는 매우 추운 시기여서 평균적으로 위도 40도까지는 얼음이 덥혀 있었으며, 예를 들어 심할 때는 캐나다 전체와 미국 북부 그리고 유럽 대륙에서는 독일 중부지역까지 빙하가 내려왔다고 한다. 그로 인해 해수면이 지금보다 100미터 이상 낮아져 베링해협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고, 황해와 동해도 존재하지 않았고, 동남아시아 해역과 인도네시아의 많은 섬들이 하나로 묶여 순다랜드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아 섬도 땅으로 연결되어 있던 시기였다. 21세기 지구의 평균 온도가 섭씨 14도라고 하는데 약 20,000년 전 당시에는 현재 보다 6도 정도 낮은 영상 7.8도였다고 한다. -6도의 변화가 실감이 잘 안 나겠지만, 현재 지구 온난화로 평균기온 +2도가 올라가면 지구가 망할 것처럼 전문가들이 설파하는 것을 보면 –6도가 낮아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빙하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나마 따뜻한 간빙기 때 아프리카에 살던 호모 에렉투스들이 멋도 모르고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빙기가 닥치자 후손들은 개고생을 하는 꼴이 되었다. 그래도 느리지만 진화를 거듭하여 호모 사피엔스가 된 100,000년 전 구석기인들은 인류사에서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살았으며, 채집도 변변치 않고 수렵이 주를 이루는 질 낮은 삶을 영유할 수밖에 없었다. 구석기시대 전 기간은 사회문화적인 진화가 매우 느리게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그들의 주거시설은 대부분 동굴이나 움막이었다. 홀로세인이 생각해 보아도 동굴은 최적의 장소였다. 특히 비교적 빙하지역을 피해 지중해 연안과 접해 있으면서 석회암 동굴이 많은 현재의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지역에 크로마뇽이라고 불리는 호모 사피엔스들이 많이 살았다. 아마도 동굴이 없었다면 유럽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그곳에 남아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가설과 복합적인 이유가 있지만, 간단하게 추론해보면 동굴 벽화가 동굴 중에서도 깊은 곳에 그려졌다는 것은 그곳이 추위로부터 피할 수 있고,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란 것을 의미한다. 자연환경과 생존 방법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석회암 지역의 특성상 입구는 좁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넓다. 추위와 위험으로부터 피하기에는 최적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만약 아주 먼 조상들이 발명한 불이 없었다면 동굴의 발견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런 동굴에서 몇만 년 동안 살았다. 

 

툰드라 지역 동토의 땅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보다 따뜻한 남쪽으로 가지 않고 왜 북극권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힘들게 사느냐고 따지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들은 영하 40도 이하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왔고, 삶의 터전이고, 완전히 적응을 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들의 고유한 문화가 된 것이다. 현재 보다 더 가혹한 환경이 그들에게 닥친다면 떠나지 말라고 해도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최소한의 환경 여건이 주어진다면 자신이 살던 터전에 머물며 희로애락을 공유하고 그런 삶의 가치를 존중하며 생존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동굴인도 빙기를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그 환경에서 자연선택적으로 지적 능력이 향상되었다. 아마도 버티지 못했다면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남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들은 불과 동굴이 있음으로 해서 매머드와 네안데르탈인을 절멸시킨 빙하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알타미라 동굴벽화

마지막 빙기인 약 20,000년~15,000년 사이에는 빙하기 중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추웠다고 하는데, 그 시기에 동굴인은 왕성하게 벽화를 그렸다. 환경이 악화될수록 사냥은 어려워지고 따라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했을 것이다.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동물에겐 먹는다는 것은 생존의 조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욕망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해서 폭력적으로 돌변하기 마련이다. 사바나의 포식자인 사자가 잡은 얼룩말을 하찮은 하이에나 무리가 빼앗는 것처럼 그들도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다른 씨족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때 구석기시대에 식인을 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런 현실을 추정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정글의 법칙은 그들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생존하기 위해 구성원의 개체수를 강제로 감소시켰다는 가설도 있는 것을 보면 식인 풍습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런 극한의 환경에서 동굴인들 중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내적으로 각성 심화된 르네상스적 호모 사피엔스들이 등장하여 상상력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생존과 죽음, 영적인 것과 지적인 것의 결합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자신들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를 상상해낸 것은 아닐까. 극한에 몰릴 때 그것을 극복하려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솟구쳤는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구한다는 것, 그것이 토템의 시작이었다. 동굴인은 생존의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염원을 원초적 대상인 동물들을 상징적으로 관념화시킨 것이다. 생존과 직결된 대상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상징화하고 숭배하면서 두려움을 해소하려고 했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거대한 천지창조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렸던 집념처럼 그 먼 옛날 라스코에 살던 어느 누군가도 깊은 동굴 안에서 희미한 등불의 힘을 빌려 천정에 천지창조와 같은 어떤 염원을 담은 동물들을 미친 듯이 그렸다. 그것은 절박함에서 발원한 고양된 정신의 발현이었다.  

 

그렇게 벽화에 탐닉한 동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가혹했던 빙기 이후 남유럽의 화려했던 벽화는 더 이상 찾을 수 없고 단지 다른 지역에서 그 시절보다 퇴보된 수준 낮은 벽화만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수천 동안 알타미라 동굴벽화와 같은 수준의 회화는 발견되지 않았다. 미학적으로 따졌을 때는 더 멀리 르네상스 때까지 벌어진다. 살아남은 동굴인들은 간빙기가 되자 동굴생활을 청산하고 초원으로 나온 것일까. 아니면 네안데르탈인이 그랬던 것처럼 혹독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절한 것은 아닐까. 물론 지구의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살아남은 누군가는 – 가설에 의하면 서아시아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보다 나은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 이동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에렉투스를 거처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게 만든 원동력이며 생존 본능이다.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홀로세를 지배하는 유일한 종으로 살아남은 동력은 노마드적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의 근간을 이루는 관념적 세계는 바로 벽화에서 보듯 생존에 대한 염원이며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욕망이다. 그것은 생체적 진화 후 격게 되는 진정한 인간으로 가는 정신활동의 자연선택적 진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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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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