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0년 전

호모사피엔스 2023. 8. 8. 10:10

2,000년 전에는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정확히 2,000년 ~ 2,500년, 지구 곳곳에서는 대전환기적인 사건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인류의 문화 정신사적인 대혁명이 활화산처럼 폭발하던 시기였다. 인간은 최초로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내적 세계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종교와 철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우리는 그 시대를 축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로서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순자 등이 등장하여 백가쟁명의 시대를 열었고, 인도에서는 베다 경전을 해석한 우파니샤드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 수많은 형태의 개인의 성찰 운동이 민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중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나타나 고집멸도를 설파하였다. 또한  그리스에서는 흔히 궤변론자라고 부르는 소피스트들과 피타고라스 학파, 엘레아 학파, 소포클레스로 대표되는 문학과 비극, 그리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스토아학파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철학과 과학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정신사적인 혁명의 시대였다. 그리고 유다 지역의 나자렛 출신 예수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설파하며 목마른 자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유랑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운동의 공통점은 인간과 나에 대한 탐구였다.

 

그리고 5,000년 전 지구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당시는 동과 주석을 합금해서 사용하던 청동기 시절이었다. 이집트에서는 제1왕조 시절로서 절대 왕권을 가진 파라오들이 피라미드에 집착하기 시작할 때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최초로 문자를 만들고, 최초로 신화를 창조하고, 최초로 새로운 사회의 질서를 수립한 수메르가 강력한 도시국가를 확립할 때였다. 인도에서는 목욕 시설과 급배수 관계시설 등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편의시설의 개념을 발견했던 하라파 문명이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당시 상대적으로 미개했던 지중해의 에게에서는 미노스 문명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제 지구의 문명은 되돌릴 수 없이 빠르고 견고하게 발전되고 축척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인간의 욕망이 가장 강하게 표출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청동기로 만든 칼과 창과 활 같은 무기들이 발명되면서 힘을 상징하는 영웅이 만들어지고 강한 권력자가 등장하면서 사회의 계층화가 확립되었으며, 그 조직의 힘으로 주변의 도시와 전쟁을 벌여 영토와 곡식과 재물과 그리고 여자를 약탈하는 야만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럼 10,000년 전의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을까. 마지막 빙기가 끝난 12,000년 전 지구의 자연환경은 인간에게 보다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었으며 인류의 대 이동이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시 홀로세인들의 유적이 가장 많이 발굴되는 지역이 아나톨리아 남부와 시리아 북부 지역이 접하는 곳이었다. 기온이 올라가자 레반트 남쪽에 살던 사람들은 북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아나톨리아 남부 지역은 가젤, 야생말, 들소 등이 많이 서식했고 구릉으로 이루어진 땅에는 자연산 식용 식물이 많이 서식하고 있어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제격이었다. 그들은 네발리 초리(nevali cori), 차요누 테페시(cayonu tepesi), 자데 엘 무가라(djade el mughara) 등에 돌과 진흙을 사용하여 정착지를 만들었고 보다 연대감이 강한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삶이 안정되자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 같은 T자형 석주의 신탁을 만들어 종교적인 제의를 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보리, 밀 같은 작물을 경작하기 시작했고 동물도 사육하면서 자급자족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물론 수렵 채집도 병행했다. 식량을 저장하여 안정된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고, 잉여의 시간에는 문화 활동이나 종교적인 활동에 매진하였다. 사실 농경은 인간을 편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수렵 채집 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다. 수렵 채집과 농경은 한동안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이루어진 문화를 토기 없는 신석기시대라고 명명한다. 토기만 없을 뿐 전반적인 사회 형태는 신석기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문화는 몇 천 년이 지난 후 자연환경이 보다 호전되자 일부는 서쪽의 유럽지역으로 이주하였고, 대개의 많은 부류는 남쪽의 유프라테스 강 쪽으로 확산되어 보다 진보된 할라프 문명을 형성했다. 고고학적 개연성을 보면 그들의 문화가 현재까지 이어졌다고 해도 무리한 주장은 아니다. 지구 상에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사라진 문명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되돌릴 수 없는 강고한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데 40,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이 지구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이제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다. 10,000년 전에 대해 얘기하다가 갑자기 초광속 워프처럼 40,000년으로 점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전 30,000년에서 기원전 15,000년 사이에는 마지막 빙기로서 가장 혹독한 추위가 몰아닥쳤고 그로 인해 문화적 공백이 있었다는 게 고고학계의 정설이다. 당시는 문화의 암흑기와 같은 시간이었다. 물론 그런 환경에서도 호모 사피엔스는 연명을 하면서 최소한의 문화를 유지했지만 선조와 같은 수준 높은 문화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완성도 있는 문화를 생산 하긴 했었는데 현재 인간들이 발견을 못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현재 상황은 전자를 뒤집을 수 있는 유물은 없는 상태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서 탈출을 시도한 횟수가 2번이라고 한다. 처음은 110,000년~120,000년 전 탈출을 시도했으나 레반트 회랑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귀향했었다. 두 번째는 60,000년 전, 보수적으로는 50,000년 전 보다 진화된 호모 사피엔스가 탈출에 성공하여 일부는 유럽으로 가고 일부는 동쪽 유라시아로 진출했으며, 이보다 이른 시기에 또 다른 무리는 아라비아 남부를 지나 동남아와 순다랜드에 당도하였고, 다시 수심이 깊은 윌리스 해협을 건너 어떠한 구인류도 가지 못한 미지의 대륙 오스트레일리아에 당도하였다. 이 신인류의 확산 루트가 현재까지는 정설이지만 미래에 상대성 이론 같은 획기적인 고고학적 발견이 나타난다면 이 공식은 폐기될 수도 있다.

 

그렇게 똑똑해진 현생인류가 유럽 땅을 밟고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45,000년 전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300,000년 전부터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하는 구인류가 살고 있었다. 두 인류는 서로의 조우에 대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조우하여 어떤 관계를 형성했는지 모르지만 처음엔 대단한 경계심을 가지고 대립했을 것이 분명하다. 정설에 의하면 두 종은 적어도 5,000년 동안은 같은 지역에서 어떤 형태든 공존했을 것이라고 한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은 지난 편에서 자세하게 얘기했지만 여러모로 호모 사피엔스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했다. 과연 두 종이 어떻게 공존했는지에 대해 수많은 추정과 설들이 떠돌고 있지만 팩트는 모른다이다.  바로 그 공존 시기에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아프리카에서 온 유럽 이민자인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 중에 하나는 예술적 감각이었다. 현재의 미학적 관점에서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조형미를 갖춘 많은 작품들을 창작한 것이다. 실재 모델을 정확하게 회화나 조각으로 표현해 내는 구상 능력은 현재 지구인의 원형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든다, 40,000년 전의 그들이 바로 현재 지구인의 조상이라는 인과관계가 불가역적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물을 보고 머리에서 되살리는 상상력과 그리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능력은 현대인과 다르지 않다. 이제 그들이 만든 작품들을 만나보겠다.

 

현재의 독일 남부 지역에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슈바벤 쥬라(Swabian Jura)라고 불리는 동굴군이 있다. 복슈타인메서(Bocksteinmesser), 가이슨크뢰스텔러(Geissenklosterle), 홀레 펠스(Hohle Fels), 홀렌슈타인 슈타델(Hohlenstein Stadel), 시르겐슈타인(Sirgenstein), 포겔허드(Vogellherd) 등 6개의 동굴이 몇 킬로미터 반경에 모여 있다. 이 6개의 동굴은 호모 사피엔스의 최초의 문화 시기인, 유럽의 고고학자들이 석기층으로 시대를 구분한 오리나시안 문화의 핵심적인 유물이 발굴된 사이트이다. 이 동굴군은 20세기 전반기에 간헐적으로 조사가 진행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고고학 연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그중에 가장 오래된 조각상이 발굴된 동굴이 가이슨크뢰스텔러이다. 흔히 가이슨크뢰스텔러의 아도란트(예배자, 숭배자)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40,000년 전 매머드 상아로 조각한 높이 3.8cm 크기의 작은 사람상이다. 1979년에 발견된 이 작품은 두 팔을 올리는 동작을 조각한 것으로 보아 종교적인 행사를 취하는 주술사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조형적으로는 조잡하지만 매머드 상아에 자신들의 행위를 그림이 아닌 조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는 정신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모멘텀이 되는 사건이었다. 아직 기능적으로나 상상력의 측면에서 볼 때 부족하지만 그 의미는 간과할 수 없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또한 몇 년 전에는 그 동굴에서 백조 뼈로 만든 피리 2개와 매머드 상아로 만든 피리 1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요주에 조각상은 흔히 비너스상이라는 닉네임을 가진 여인상이다. 홀레 펠스 동굴에서 발굴된 이 손가락 크기만 한 조각상은 신석기시대 전까지 지구 상의 많은 지역에서 발굴된 비너스상의 원형이었다. 원형이라는 의미는 유방과 엉덩이를 극대화시키고 성기의 형태도 강조된 특징을 가진 조형물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주요 부위를 과도할 정도로 풍만하게 표현한 특징은 구석기시대 말기로 가면서 완화되지만, 27,000년 전의 빌렌도르프 비너스상처럼 중기까지는 그런 유형의 조각이 유행이었다. 고고학자들은 그런 과장된 표현에 대해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추정한다. 당시 40,000년 전에는 서유럽과 동유럽 전체에 호모 사피엔스의 인구가 평균 약 5,000명 정도밖에 안 되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추정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생존을 위한 출산은 지대한 관심사였을 것만큼은 분명하다. 씨족을 유지하기 위해 2세는 필수적이었고, 출산을 담당하는 여성의 중요성은 그만큼 필수불가결했을 것이다. 엄혹한 빙하기에서 살아가는 게 힘들었지만, 생존 본능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유전적 변이가 증폭되고 보다 강해지고 있었다. 다시는 아프리카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런 절박함의 표현이 비너스상이라는 논리이다.

출처:위키피디아

하지만 그렇게 다산을 염원하는 조각상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정말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작품을 남성이 만들었는지 여성이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세포가 분열을 하고 후손을 남기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물고기도 누가 시키지 않는 데도 수많은 알을 낳고, 수컷의 도움이 없어도 알을 낳은 동물도 많은 것을 보면 새끼를 낳은 것은 그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기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의 특징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산의 염원은 동물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이다. 그런 자연적인 현상을 볼 때 풍만한 비너스상은 남성의 성적 욕구의 표현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유인원 같은 수컷의 성적인 도발적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보다 진화된 남성의 성적 욕구가 반영된 여성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훗날 여성을 성적 도구로,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매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증거하고 있다. 성경에도 공공연히 등장하고, 수메르 시절에도 매춘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며,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 때부터 매매춘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팩트이다. 결과적으로 남성의 왕성한 성욕은 인간으로 가는 본능적 발현이며 그것은 자연선택적으로 인류를 빠르게 진화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사회학적으로도 남성의 성욕은 명암이 뚜렷하지만 결국은 개체수의 증가를 가져오는 기폭재가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홀레 펠스의 오리나시안 퇴적층에서 비너스상 외에 독수리 뼈로 만든 피리와 사슴뿔로 만든 천공된 '지휘봉'이라는 유물도 발굴되었다. 특히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가이슨크뢰스텔러 동굴에서도 동물 뼈로 만든 피리가 발굴된 것을 보면 피리는 당시 크로마뇽인에게는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하던 흔한 악기였던 것 같다. 홀레 펠스 피리는 인간이 만든 최초의 악기로 공식적이 승인을 받았다.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고 교과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구멍이 4개가 뚫린 이 피리를 지금 불어도 소리가 난다고 한다. 유튜브에 보면 악기 제작자들이 그 모양과 똑같이 직접 만들어 연주를 시연해 보이는 영상과 본격적으로 대중 앞에서 협주 공연을 보여주는 영상도 찾을 수 있다. 피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북 같은 타악기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음악이 어떤 형태든 연주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의미한다. 비록 세월이 흘러 뼈와 돌로 만든 기구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다양한 형태의 악기와 기구들을 만들어 사용했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독일어로 baton percs라고 불리는 의미심장한 기구이다. 이탈리아 북부 아렌 캉디드 동굴에서 발견된 27,000년 전 무덤의 주인공 가슴에도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족장을 상징하는 지휘봉이나 의장용으로 사용된 기구의 일부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암벽 장비인 카라비나처럼 밧줄을 어떤 물체와 연결할 때 사용하는 보조 기구하는 설과 활이나 창과 관련된 기구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크로마뇽이 직접 시범을 보이면 금방 아 하고 무릎을 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기구들을 만들어 실생활에 사용한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이 물건과 매우 흡사한 유물이 이후 몇 백 개가 더 발굴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용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출처:위키피디아

사실 논란은 있지만 대중적인 관심도가 가장 높은 유물은 홀렌슈타인 슈타델에서 발굴된 로벤멘쉬 즉 사자 인간상이다. 이 입상 조각상은 고고학사적인 서사로 더 유명하다. 20세기 초 홀렌슈타인 슈타델 동굴에서 지질학자들이 무언지 모르는 작은 상아 조각들을 발견하고 직업병적으로 모아두었다가 세계사적인 격변으로 모두에게 잊어져 있었는데, 1969년 요아킴 한이라는 고고학자가 신의 계시를 받고 200여 개의 상아 파편들을 복잡한 퍼즐을 맞추듯이 이어 붙였다. 집념 어린 노력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완성한 결과 지금의 사자 인간상이 조합된 것이다. 그 조각이 실재 사자 인간상인지 선입견으로 억지로 끼어 맞춘 것인지 논란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계로 부터 사자 인간상으로 인정을 받았다. 사실 파편들은 100% 아니라 50%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50%의 파편으로 인정을 받은 셈이다. 

 

하여튼 머리는 사자, 몸은 인간인 형상은 선사시대 주술사들의 의례 복식의 일종이라고 하는데 그 원형이 바로 로벤멘쉬라고 할 수 있다. 사자는 이미 40,000년 전부터 인간과 영적인 교통을 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최상위 포식자로서의 위용은 당시에도 압도적이었고, 인간은 그런 사자를 신성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몸은 사자이고 얼굴은 인간인 스핑크스가 청동기시대 때 이집트를 비룻한 그리스와 근동 문화권 신화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사자라는 동물은 인류사적으로 범상치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의 36,00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어떠한 형태든 사자는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 온 것이다.

출처:위키피디아

 

호모 사피엔스의 미술 작품 중에서 동굴벽화나 돌에 음각한 그림은 많이 있으나 부싯돌로 깎아서 만든 조각품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포겔허드 동굴에서 출토된 상아 조각상은 그것을 단번에 불식시킨다. 40,000살 된 홀레 펠스 여인 조각보다도 더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비너스 조각상보다 몇 천 년 후에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조형미나 기능적인 면에서 현대성에 손색없는 미학적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먼저 포겔허드 동굴의 동물 조각상을 얘기하기 전에 동굴 바닥 퇴적층에 대해서 잠깐 논하고 가겠다. 빙하기 시절 석회암 동굴은 호모 사피엔스가 살기에 차선의 조건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아마도 석회암 지대가 아니었다면 호모 사피엔스들은 유럽에서 전부 떠났을 것이다. 그런 소중한 보금자리인 동굴은 이미 몇 십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이 살았고, 그들의 살던 터를 호모 사피엔스가 이어받아 혹독한 빙하기가 끝날 때까지 30,000년 이상 여러 문화기를 거쳐 살았다. 동굴 바닥에는 그들이 대대로 살았던 흔적들이 층층이 퇴적되었는데 바로 대표적인 동굴이 포겔허드 동굴이다. 그 동굴 가장 낮은 층은 130,000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무스테리안 층으로서 다양한 동물 뼈와 석기류들이 출토되었고, 40,000년에서 10,000년 사이 즉 오리나시안 층에서 막달레나 층까지 모두 8단계의 퇴적층에서 돌과 상아로 만든 기구, 석공예품 파편, 500kg이 넘는 동물 뼈, 상아로 만든 장식품 파편, 그리고 피리 파편 등 수십만 개의 유물들을 수거하였다. 그중에 오리나시안 층에서 상아로 만든 동물 조각상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던 것이다.

 

조각품들은 당시 실재했던 동물들이었다. 지금은 현존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왕성하게 생존하던 매머드, 동굴사자, 동굴곰, 바이슨, 야생말 등을 매머드 상아를 깍아 조각을 했다. 모든 조각품들이 3.7cm~5.6cm 정도로 아주 작고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말 조각을 보면 몸통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목의 곡선이 현재의 최상위 종마처럼 귀풍스럽다. 마치 마장마술에 등장하는 위풍당당한 말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매머드 조각도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갈 정도의 크기인데도 사진으로 보면 거대한 느낌이 들고 금방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동굴사자는 어떠한가. 쇼베 동굴벽화의 주인공인 사자처럼 고개를 앞으로 뻗고 걸어가는 모습은 위엄이 넘치며, 등과 얼굴에 격자무늬처럼 무늬를 넣어 긴 털을 사실감 있게 묘사했다. 다른 동물들도 그에 못지않게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21세기 어느 조각가의 작품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전혀 의심을 하지 않을 정도로 조형미나 형태의 리얼리티가 완벽하다. 미술에 대해 무뢰한인 사람들도 금방 친근감이 들어 40,000년이란 시간을 의심하게 만든다.

출처:위키피디아
출처:위키피디아

고고학자들이 조각가에게 당시의 연장과 재료를 이용한다는 조건으로 이와 흡사한 조각품을 의뢰했는데 무려 3개월이나 걸렸다고 한다. 주먹 도끼로 형체를 대충 절단하고 손가락만 한 부싯돌로 쪼개거나 긁어내는 작업을 수없이 반복한 후 마지막에는 길고 지루한 연마 작업를 해야 했다. 부싯돌이 날카롭고 단단한 석기라고 하지만 현재의 금속재에 비하면 내구성이 결코 앞설 수는 없다. 더구나 크기도 작아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동굴에서는 어두워 작업을 할 수 없고 날씨 좋은 날 낮에 쭈그리고 않자 연신 상아와 부싯돌과 씨름을 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포겔허드 동물뿐만 아니라 홀레 펠스 비너스도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완벽한 조형물을 조각하기 위해서는 예술적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조각가로서의 기능도 습득을 해야 한다. 댓생은 기본이고 보다 큰 재료를 이용해 조각의 기본도 연마를 해야 이 정도의 작은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썩어 흙이 되었겠지만 가령 나무를 재료로 해서 다양한 조각품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무는 당시 돌과 뼈보다 훨씬 더 많이 생활에 이용을 했다는 게 고고학자들의 통론이다.

 

그럼 그들은 왜 이렇게 작은 조각품을 만들었을까. 상아는 지금도 귀하지만 그 당시도 귀한 물질이었다. 20,000년 후 그들의 후손들이 매머드를 남획하여 결국은 멸종하게 만들었지만 당시에는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 때였다. 그리고 그들은 어렵게 잡은 매머드의 상아가 다른 동물 뼈처럼 생활 용품으로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조각품의 재료로 적당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조각하기는 어렵지만 한번 만들어 놓으면 변하지 않고 오래간다는 사실을 안 그들은 귀금속을 세공하듯이 상아를 연마했을 것이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각품은 휴대용 액세서리나 귀중품 같은 것으로 간주를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부적 같이 몸에 지니고 다녔을 것이다.

 

슈바벤 쥬라 지역은 알프스 산맥과 빙하 지역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볼 때 거주 조건이 열악할 것 같지만 의외로 사람이 살기에 괜찮았을 것이라고 지질학자들이 분석한다. 사실 100,000년 동안의 삶의 흔적이 한 동굴에 층층이 퇴적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분석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슈바벤 쥬라의 동굴들이고 그중에서도 시르겐슈타인 동굴이 대표적이다. 위에서 얘기한 포겔허드 동굴도 층서학적인 유물 정도가 상당하지만 시르겐슈타인 동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미 15세기 때부터 지역의 지식인들부터 예사로운 동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에, 드디어 20세기 초 독일의 고고학자 슈미트가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고, 무스테리안부터 막달레니아까지 모두 8개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독일 고고학계는 프랑스와의 고고학 경쟁에서 상대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이 동굴을 발굴하고서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완전한 층서학적 순서를 확인했고, 인간 존재의 지표를 확인하는 증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튼 시르겐슈타인 동굴에서 처음 네안데르탈인이 경쟁자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호모 사피엔스에게 쫓겨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30,000년 동안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들이 대대로 생활한 흔적들이 8개의 층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이 사용한 난로와 석기와 동물 뼈들이 맨 아래층에서 출토되었다. 역시 호모 사피엔스가 남긴 부싯돌을 비롯한 석기류와 동물 뼈로 만든 도구와 수많은 각종 동물의 해체된 뼈 조각들이 발굴되었으며, 마지막에는 신석기인의 대피소로서도 이용된 흔적도 나타났다. 그중에 오리나시안 층에서 매머드 상아로 만든 구멍 뚫린 구술과 인간의 치아 몇 개, 코뿔소 등의 동물 뼈들이 다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구멍 뚫린 구술을 보면 매머드 상아는 당시 장신구나 피규어를 만드는 귀한 재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물 조각도 그렇지만 상아 장신구들은 당시 생활 수준이 생존하는 데 급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삶에 여유가 어느 정도는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쇼베 동굴벽화

그리고 슈바벤 쥬라 동굴군의 문화적 가치도 상당하지만 당시 동굴 예술의 정수는 쇼베 동굴벽화라고 할 수 있다. 슈바벤 쥬라 동굴은 조각품의 보고라고 한다면 쇼베 동굴은 회화의 보고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중에 쇼베 동굴벽화에 대해 별도로 자세하게 논겠지만, 쇼베는 오리나시안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인류 최초로 예술다운 작품이 40,000년 전, 아프리카를 탈출하여 유럽에 정착한 지 불과 5,000년 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 정도의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최소한 20,000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포겔허드의 정교한 상아 조각 같은 작품은 기원전 10,000년까지 지구 상에서 발굴된 적이 없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 기간은 예술의 암흑기였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문화예술의 시대가 단절되었을까. 물론 나무나 다른 재료를 써서 탁월한 작품을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현재의 고고학적 발견은 그것을 밟힐 만한 단서를 주지 못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많은 고고학자들이 지구적인 급격한 기후 변화, 즉 빙하기 마지막 최후빙하극성기(Last Glacial Maximum)로 인한 최악의 환경을 들먹이며 설명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지만 삶의 질이 현격하게 떨어지면서 문화생활 수준도 낮아졌다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가 사실이라면, 그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의 개체수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당시의 인구는 전 유럽을 다 합친다 해도 평균 5,000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적은 수의 인구로는 공동체적 건강성을 유지하기 어렵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흡수한 결정적인 이유도 개체수가 월등했기 때문이듯 개체수가 적으면 급변하는 환경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공진화론에 따르면 개체수는 진화의 핵심적인 조건이라고 한다. 만약 당시에 개체수가 몇 배 많았다면 인류의 문명은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40,000년 전에는 동굴이라는 공간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최적의 삶의 장소였다. 불 다음으로 중요한 삶의 요소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처음 유럽에 도착했을 때는 간빙기여서 사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곧바로 빙기가 들이닥쳐다. 혹독한 추위를 피해 유럽을 탈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실패를 했다. 이미 그곳을 빠져나기에 늦었다는 것을 인식한 그들은 생존 본능을 극대화하였고 최적의 공간을 발견했는데 그곳이 동굴이었다. 이미 전에 네안데르탈인이 주거용으로 사용하던 동굴을 어떠한 형태든 이어받기도 하고 새로운 동굴을 발견하는데 집중하였다. 겨울 한철을 동굴에서 나기도 해서 동굴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빙기 때는 절대적인 공간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동굴은 가장 중요한 삶의 공간이 되었고, 그런 동굴 생활에 익숙해지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동굴에 그림을 그리고 언저리에서 수많은 조각품을 만들었다. 포겔허드 동굴의 동물 조각과 같은 수준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보다 수십 배가 많은 연습 작품이 필요로 했다. 사실 발견을 못해서 그렇지 현대인이 찾지 못한 작품들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동굴은 그들에게 안락한 생활과 문화적인 행위를 보장했다. 만약 유럽에 동굴이 많지 않았다면 그런 유물들은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고 인류의 진화는 기존의 속도보다 더 느리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동굴은 절대적인 생존 공간이자 정신사적인 안식처였다.

 

문화적 행위 중에서 사물을 보고 구상적으로 정확하게 표현을 하는 창작 행위가 이미 40,000년 전에 행해지고 있었다. 쇼베 동굴인은 실제 모습을 정확하게 구상하는 것을 너머 움직이는 사자를 묘사하기 위해 상상력이란 메커니즘을 작동시켰다. 홀레 펠스 동굴인은 실제 여성의 육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장난기 가득한 영감을 발휘하여 한껏 부푼 풍선처럼 거대한 육체파 여인을 창조했다. 그리고 포겔허드 동굴인은 동굴사자와 매머드 같은 거대한 동물을 수십일 동안 깎고 연마하여 손아귀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앙증맞은 피규어를 만들었다. 그런 결과물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능적 예술적 소양이 축척되어 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결코 몇 세대를 거쳐서는 그런 완성도 있는 작품은 생산할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인의 상식적인 추론이지만 혹시 지구 밖의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습득하여 만들 수도 있겠고, 더 나아가 딱 까놓고 외계인이 만들었다는 시친류의 썰을 풀 수도 있을지 모른다.

 

예술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상상력의 밀도가 높아질 때 창작에 대한 영감이 솟구치고 어느 조각가의 손은 열정적으로 빨라진다. 그 상상력은 아마도 200,000년 전 아프리카 동부에 살던 어느 호모 사피엔스의 유전자에 돌연변이로 천착되어 진화되고, 느리게 축척되어 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호모 사피엔스로 하여금 인지능력의 향상을 결정하는 모멘텀이 되었으며, 그것은 지적 능력이란 거대한 정신세계를 구축하게 했고, 결국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솔로엔시스 등 구인류들을 몰아내고 이 지구를 평정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40,000년 전에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던 문화예술 혁명은 20,000년 이상 암흑기를 거쳤지만 그래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아주 먼 후세까지 이어졌다. 포겔허드 동굴에서 부싯돌로 작은 매머드 상아를 몰입에 빠져 한 톨 한 톨 깎아 내고 있는 어느 무명 조각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쇼베 동굴 석회암 벽에 동굴사자를 미친 듯이 그리고 있는 어느 무명 화가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당시 여러 가지 예술 행위를 했던 예술가들에게도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들의 행위 하나하나가 우리의 원형이며 유전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 혹독한 추위와 싸우면서도 무언가 소유하고 싶었던 강열한 욕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살아 있는 자로서 대신 말해주고 싶다.      

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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