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 때 비교적 따뜻했던 지중해 부근에 살면서 동굴 벽화를 그렸던 동굴인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그 정도의 문화적 소양을 가졌다면 그 후 보다 진보된 문화를 형성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문명의 주도권을 근동지역에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추정해보지만, 그런 개연성은 문학적 상상력의 영역에 불과하다. 유럽의 인류학자들 중에는 - 예를 들어 다산의 신으로 불리는 비너스 조각상이 근동지역에서 발굴되었다는 근거를 들며 – 35,000년 전 오리냐크 문화권의 크로마뇽인이 빙기를 피해 근동지역으로 이주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호모 사피엔스의 문화 네트워크와 이동의 메커니즘 등을 현재의 시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선사시대 고고학은 가설의 미학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현생인류가 나타나고부터 그런 소규모 문화가 고립되고, 소멸되고, 생성되는 사이클은 수없이 반복되어 온 현상이다.

 

1994년, 터키 동남쪽 시리아 국경과 가까운 하란 평야 북부지역에서 전대미문의 유적이 발견된다. 바로 괴베클리 테페 유적이다. 1963년 미국의 고고학자 피터 베네딕트가 처음 시도했다가 일부 드러난 석주를 흔한 묘표로 오인하여 철수했고, 그로부터 31년이 지난 후 당시 괴베클리 테페에서 몇십 킬로미터 떨어진 네발리 초리에서 유적 발굴에 참여하고 있던 독일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가 어떤 계시를 받고 주도하여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의 직감은 적중했다. 그 유적은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9,600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시기는, 지구 북반구에 짧은 시간 동안 평균 기온이 –6도까지 하강하는 영거 드라이아스(12,900년 ~ 11,600년)라 불리는 빙기의 마지막 절정이 끝나고, 그 후 본격적으로 온난한 간빙기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괴베클리 테페는 그렇게 지질학적 대격변을 격은 후 아나톨리아 지역에 세워졌으며, 지구 상에 건립된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기록된다. 예리코와 차탈회위크 유적보다 최소 1,000년 이상 앞서는 것이다. 더구나 그 유적들은 주거지역이었지만 괴베클리 테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든 건축물이었다. 1,000년이라는 간격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 기준으로 볼 때 고려시대 초까지 과거로 올라가는 시간이며, 유럽은 중세의 암흑시대가 정점을 찍고 있을 때이다.

출처: 유네스코 / 괴베클리 테페 유적지

위에서 언급했듯이 괴베클리 테페는 주거지역에서 벗어난 외진 지역에 있는 건축물이다. 발굴 책임자 클라우스 슈미트를 비롯해 많은 고고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어떤 형태의 제의가 이루어지는 사원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유적의 구조를 보면 평지에 처음 사원을 만들고, 시간이 지난 후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기존의 사원을 흙으로 묻고 그 위에 다시 사원을 건립했고, 그리고 또 긴 시간이 지난 뒤 2번째 사원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사원을 또 지은 매우 복잡한 중첩 구조이다. 처음 그 유적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구릉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 많은 언덕배기 밭에 불과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언덕은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3층짜리 사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의아한 것은 기원전 9,600 ~ 기원전 8,200까지 3차에 거쳐 건립을 했는데, 건축물이 오래된 것일수록 오히려 조형적으로 더 우수하다는 것이다. 1,400년이란 기간 동안 발전한 것이 아니라 퇴보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8.2 kiloyear event 같은 지구환경의 예상치 못한 급변으로 인해 삶이 질이 떨어진 결과라는 설이 있지만 그건 가설일 뿐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당시 인간의 삶에서 기후 환경은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나중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기후 환경으로 인해 인류 문명은 수많은 부침을 겪으며 매우 더디게 발전하였다.

 

괴베클리 테페 건축물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기존의 선사시대 개념을 통렬하게 깨트린다. 기원전 5,000년 정도에 토기를 만드는 신석기시대라고 해야 원시인의 틀을 벗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괴베클리 테페는 그런 고정관념을 깨끗이 무너트린 것이다. 그보다 5,000년 전 토기도 없는 석기시대에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문화가 존재했었다는 것을 학습시켜준 중요한 유적이다. 먼저 규모를 보면 축구장 13개 정도의 면적이고, 현재는 직경 10m~30m 정도 크기의 불규칙적인 원형 구조물 4개와 10개의 직사각형 작은 방이 발굴되었고, 그 원형 내부에 무게 7~20톤, 최대 높이 6m인 T자형 돌기둥 50개가 서있다. 그것은 일부에 불과하고 아래 지층에는 초음파 검사를 한 결과 아직 발굴되지 않은 16개의 원형 구조물과 150개가 넘는 T자형 돌기둥이 묻혀 있다고 한다. 드러난 것은 일부분일 뿐 땅에 묻혀 있는 건축물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럼 그 건축물을 어떻게 지었을까. 먼저 거석문화에 대해 잠깐만 설명하자면, 어림잡아 10,000년 전에 제작된 10톤 정도의 단일 암석 유물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괴베클리 테페는 거석문화의 시작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고인돌 문화가 전 지구적으로 유행하던 신석기시대를 거쳐, 거석문화의 지존은 기원전 1,300년대 이집트에서 발견된다. 맴논의 석상을 만들기 위해 700톤짜리 모노리스를 카이로 부근에 있는 채석장에서 남쪽으로 640km 떨어진 룩소르 신전까지 끌고 왔으며, 또한 람세스 신전을 짓기 위해 아스완 채석장에서 1,000톤짜리 모노리스를 나일강으로 배를 이용해 270km 거리를 운반했다고 역사는 전한다. 거석문화의 마지막 지존급이 아닐 수 없다. 그 바위 사이즈를 보면 피라미드에 사용한 돌은 레고 블록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미친 듯이 모노리스를 나르고 깎고 들어 올려서 건물을 짓고 또한 조각상을 만들었다. 고대 로마는 모노리스를 들어 올리는 기중기를 현장에서 직접 제작해 사용했다고 한다. 고대인들은 인류세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을 잘 다루었다. 그리고 호기심 많은 인류세는 20세기 초부터 세계 곳곳에서 모노리스를 어떻게 운반했는지 직접 재연하는 붐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하여튼 형태적 모노리스라는 개념은 수천 년 후의 일이고 지금은 12,000년 전에 주목하겠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 터에서 백여 미터 떨어진 석회암 채석장에 80% 정도 완성된 50톤 규모의 T자형 기둥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 1차 가공한 후 운반하였을 게 분명하다. 모노리스라고 하기엔 크기가 좀 작지만, 그래도 운반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힘은 물론 기술적인 메커니즘도 있어야 하고, 제작가공에 있어서도 개개인의 능력과 노동 집약적인 요소가 필수적이며 이런 토목 건축물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수백 명의 집중적인 노동력이 필요하다. 고고학자들은 500명을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많은 인원이 숙박할 수 있는 시설이 있어야 하고, 먹고 마시는 보급에 대한 시스템도 있어야 하며, 전반적인 계획과 공사를 관리하는 체계도 필요로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느 정도 규모의 도시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각자 삶을 영위하는 씨족이나 부족들이 서로 연합해서 그런 규모의 협동력을 발휘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몇십 명 되는 씨족 사회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최하 몇 천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도시급 단일 정착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인구의 도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규범과 위계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유추해 보았을 때 강력한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중심이 되고 그 아래에 각각의 파트를 담당하는 참모들이 있어야 괴베클리 테페 같은 건축물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현재도 그렇지만 조직력과 관리가 부실하면 정상적인 건물을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출처:독일 고고학 연구소

그리고 T자형 직육면체 석주에는 당시 그곳에 살았음직한 동물들이 다수 양각되어 있다. 사자, 들소, 멧돼지, 여우, 가젤 등의 포유류와 독수리, 거위 같은 조류와 그리고 뱀, 이름을 알 수 없는 파충류, 거미, 전갈 등이 수십 개의 석주에 모두 양각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그 T자형 석주는 손이 앞으로 가지런히 모아진 것으로 보아 사람을 의인화한 것으로 보이며, 인클로저 중간에 가장 큰 석주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고, 외벽부 둘레에 그보다 작은 석주가 기둥처럼 10개 정도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연결되어 있는 게 기본적인 구조이다. 음각으로 조형의 형태를 만드는 것보다 직육면체 석판에 양각을 하는 작업이 시간적으로 훨씬 오래 걸리는데, 괴베클리인들은 그 어려운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고 더구나 27번 석주를 보면 사자가 멧돼지를 금방이라도 공격하려는 듯한 상황을 크로키처럼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였다. 그 사자의 형상이 독립된 조각처럼 완전하게 3차원 형태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과감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석회암이 다른 암석보다 무르다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금속이 아닌 석기 연장으로 바위 덩어리를 쪼아내는 작업은 고된 노동이며 종교처럼 강한 집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석재 중에서 강도가 가장 우수한 흑요석을 사용하더라도 철기 연장과는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양각 동물에 대해서도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 그런 동물 외에도 알파벳 H자 문양과 핸드백 같은 도형과 그리고 기하학적인 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많은 문양들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정말 인류세에게 많은 숙제를 남겨주고 있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의미 없이 조각한 것인지 우리는 모르며 도상학적으로도 해석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현재 우리가 거주하는 이 도시와 주택 내부에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문양이 있고 그 문양에 대다수는 무관심하듯이 해석은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괴베클리의 조각 장인이 의미 없이 시간이 남아 취미로 그렇게 고된 노동을 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유 없이 동물과 문양에 집착 할리 없다는 것은 인과관계를 신봉하는 인간계에서는 당연한 논리이다. 절박한 그 무엇이 장인의 내면에 존재했을 것만큼은 분명하다.

출처:위키피아 / 토템상

이밖에도 절구와 공이 그리고 여러 가지 석기류가 발굴된 것은 물론이고, 독립적으로 만든 파충류와 멧돼지와 사자 조각상도 발굴되었고, '토템'이라고 별명을 지어준 사람과 동물이 뒤섞인 반인반수 조각상도 발굴되었다. 특히 2번 방에서 발견된 '토템' 같은 조각상은 인근의 '카라한 테페'에서도 많아 발굴되었는데 인간이 거대한 짐승의 손아귀에 잡혀있는 듯한 모양이 전형적인 토템의 흔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4 각형 방 구조물 바닥에 깔겨있는 회반죽인데, 마치 테라조 마감재처럼 미장이 되어 있다. 회반죽을 발라 마감처리를 했다는 것은 당시 건축물과 조형물 제작에 석회가 포괄적으로 사용되어 왔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주변이 온통 석회암 지대인 것을 보면 그들의 지적 능력이 결코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클라우스 슈미트를 비롯한 주류 고고학계는 괴베클리 테페를 토템과 샤머니즘적인 제의가 행해지던 장소가 틀림없다고 전한다. 그 증거로 양각된 동물들은 대게 괴베클리인들에게 식량자원의 역할을 할 수 없고 오히려 두려움의 대상인 짐승들이어서 자신들의 안위와 결부된 경배의 대상로서의 상징이 아닐까 하고 주장한다. 사실 대자연의 노여움도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사나운 짐승들도 두려움의 대상이니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사원 옆 기도나 대기실 정도로 보이는 여러 개의 방에서 음식물 쓰레기 같은 작은 동물 뼈들이 수만 개가 발견되었고, 2017년에는 머리에 구멍이 난 인간의 두개골이 발견된 점을 들어 고고학자들은 죽은 자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사원이라고 확신한다. 1,400년 동안 그곳에 몇 차례에 걸쳐 계속 사원을 건립한 것을 보면 그곳은 인근 지역 전체에서 중심적인 사원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전 순례처럼 몰려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사실 여러 종류의 동물과 해독할 수 없는 도형들이 빼곡하게 부조되어 있는 것은 그들만의 종교적 도그마를 형성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토템이든 샤먼이든 어떠한 형태의 컬트적인 제의가 그 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괴베클리 테페 건축물은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사실 그 정도 기술을 갖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시간 동안 기술이 축척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느림의 미학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도 뉴튼이 어느 날 갑자기 신의 계시를 받아 만든 것이 아니라 멀게는 탈레스와 가깝게는 갈릴레오와 데카르트 등의 과학적 사고와 지식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따라서 괴베클리 테페인들의 건축 기술 수준은 최하 수천 년 전부터 축척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이다. 32,000년 전 쇼베 동굴인이 예술적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누군가에 의해 희미하고 느리지만, 20,000년이란 시공간을 이어지게 했을 것이다.

 

대게의 전문가들은 괴베클리 테페를 인간의 종교와 진화의 관점에서 서사를 풀어가지만, 에리히 폰 데니켄이나 그의 후계자인 그레이엄 핸콕 같은 류의 속칭 지구 리셋설과 미스터리 현상을 신봉하는 부류들은 보는 관점이 전혀 다르다. 부조화된 동물과 도형과 그리고 T자형 석주들의 세워진 위치 등에 대해 그들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발전된 천문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그것보다 더 심화된 분류인 제카리아 시친 류들은 아예 외계인과 연결된 것이라고 설파한다. 특히 그들은 43번 석주에 주목한다. 양각된 동물들 즉 독수리와 전갈의 배치를 두고 하늘의 별자리와 짜 맞추기 위해 12,000년 전 별자리를 조사 분석 시뮬레이션을 하는 등 천문학 지식을 총동원하고 그에 따른 장황한 논문도 쓴다. 그리고 그것을 추종하는 광신도도 양산되었다. 핸콕 파에 의하면 12,000년 전 겨우 타제석기나 만들 줄 알던 구석기인이 그런 정교한 천문과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경이롭고 미스터리 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들이 하고 싶은 얘기는 지구 리셋설이 기반을 둔 초고대 문명설이다. 음모론과 현실론의 경계선에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음모론에 기울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시천파들은 12,000년 구석기인에겐 그런 지적 수준을 형성할 능력이 없었고 우주적인 어떤 힘에 의해 그런 건축물이 만들어졌다는 논리를 편다. 구석기인의 기술 축척 같은 인과관계는 인정하지 않는다. 괴베클리 테베 보다 수천 년이나 늦은 시기에 형성된 수메르 문명이나 이집트 문명도 외계인이 설계하고 만들었다고 노골적으로 설파할 정도이니 괴베클리 테베는 당연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시천파들의 주장은 백인 우월주의에 입각한 공상 소설에 불과할 뿐이며, 그런 소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초고대 문명설을 주장하는 핸콕 파들의 별자리 지도

완전한 간빙기에 진입했을 무렵 지구는 온난해지고 인류는 본격적인 문화의 진화에 한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근동의 어느 살기 좋은 지역에 씨족이 연합된 부락이 만들어지고,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이 시작되면서 도시급 부락이 구축되었다. 자연적으로 리더십에 필요해졌으며, 어느 강력한 권위와 지도력을 가진 위인이 나타나 그 부락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삶의 질이 향상되고, 잉여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대자연에 대한 경외심 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런 정신적 각성은 세상을 보는 그들의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영적인 존재에 끌리게 되고 그리하여 신탁 같은 건축물을 짓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것은 일찍이 겪어보지 않았던 갈망이었다. 자신들의 목숨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그 욕망은 강열했다. 그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신탁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정립한 최초의 인간이었다.

 

그 당시는 수렵 채집과 농경이 복합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석기 기술도 매우 정밀해지고 곡식을 가공하고 저장할 수 있는 농기구도 만들기 시작한 대 패러다임의 시기였다. 후세인들은 그 당시를 토기 없는 신석기시대라고 칭한다. 아직까지는 괴베클리 테페 근처에 정주생활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단히 큰 규모의 도시급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모든 고고학자들은 확신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을 버리고 떠났다. 자신들의 염원을 담아 지은 사원을 흙으로 묻고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방치하고 떠나도 되는데 왜 굳이 힘든 노역을 마다하지 않았는가. 무엇이 그들을 떠나게 했는가. 극심한 가뭄으로 땅이 황폐해진 것일까. 공동체 내부에 분열이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남쪽에서 발원한 유목민에게 점령당하여 몰살된 것은 아닐까.

 

클라우스 슈미트가 예언했던 것처럼, 2014년 그가 심장마비로 급사한 후 2017년 괴베클리 테페와 자매 유적지로 불리는 카라한 테페가 발굴되었다. 그리고 그 2개의 유적을 포함해 전체 12개의 원형 유물 구역이 있는 것으로 조사 결과가 나왔고 현재도 발 빠르게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12개 테페 중에서 괴베클리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슈미트가 조사 발굴을 시작할 당시는 별 관심이 없었던 터키 당국이 직접 나서 2021년 10월에 프로젝트 명 ‘타쉬 테펠러(Tas Tepeler)’라는 직경 100km가 넘는 신석기시대 유적 관광 벨트를 만들겠노라고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12개 유적을 하나로 묶는 광대한 영역이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상상을 뛰어넘는 유적들이 묻혀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자 당국이 직접 나선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작심하고 관광화를 하겠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한 것은 너무 상업화에 치중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우려를 표하는 전문가들이 많다고 한다. 연간 500만 명을 끌어들이겠다고 포부를 밝히고, 더구나 날짜를 정해 고속으로 발굴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 업계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타쉬 테펠러에 속하는 유적은 1,000년 전 이곳으로 이주한 트루크인 것이 아니라 전 지구인의 유적이므로 보다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정부 당국이 나서 신석기시대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보수적인 고고학계를 긴장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국 내에서 10,000년 전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며 호들갑을 떨고 또한 인류의 진화에서 아프리카 기원설을 거부하고 다지역 기원설을 주장하며 자국의 문화적 위대함을 설파하는 중국처럼 따라가는 것은 옳지 않고 지구적인 차원에서 관리되어야 하는 게 타당하다. 원시 투르크인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유럽과 근동에 정착한 시기가 불과 2,000년도 안되는데 그보다 5배나 많은 10,000년이라는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문자가 있는 역사도 애매한 내용이 많은데, 문자가 없는 아주 먼 선사시대의 역사를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문화와 과학 등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본질을 왜곡하기 십상이다.

출처:위키피아

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사실 괴베클리 테페의 문화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 고고학, 인류학, 분자생물학 등을 총동원하더라도 발굴된 돌과 뼈만으로 그들의 문화를 1%도 밝힐 수 없다. 너무나 매력적인 유적이지만 어쩔 수 없다. 문자가 있던 2,000년 전의 역사도 극히 일부분만 알 수 있는데 그보다 6배나 더 오래되고 문자도 없던 그들의 세계를 어떻게 알겠는가. 과학이 현재보다 몇십 배 발달한 미래라고 해도 인류는 그들의 세계를 밝힐 수 없다. “의미란 항상 문학적으로 속박되는 법이다”라고 어느 고고학자가 말했듯 1%의 현상을 가지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괴베클리 테페인들은 12,000년 후의 인간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선사한 것만큼은 분명하며, 우리는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도 행복한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많이 알면 불편할지도 모른다. “많이 알면 알수록 상상할 수 있는 범위는 줄어든다.”

 

괴베클리 테페인이 1,400년 동안 자신의 문화를 일정한 형태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없는 어떤 사회적 응집력이 그 세계에 상존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수많은 곡절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슬기롭게 극복해 갔고 보다 만족할 수 있는 세상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 강열한 욕망은 성전을 유지하는 원초적인 에너지였다. 의식주를 해결하려는 본능적 욕구와 자신을 위협하는 세상과의 피 말리는 투쟁 상황을 극복하려는, 그 어떤 정신 활동이 상징성을 함축한 추상적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정신과 물질의 혼합된 결정체가 바로 괴베클리 테페 건축물이었다. 현재 우리에게로 가는 대장정의 첫걸음이었는지 모른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거대한 바위를 쪼고 있는 검게 그을린 어느 석공을 상상해 본다.

 

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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