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 출신 아브라함의 자손인 히브리인들은 위대한 선지자 모세의 강력한 지도력에 의해 이집트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탈출한다. 구약성경은 그 탈출을 엑소더스 혹은 출애굽기라고 칭한다. 하느님이 계시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가기 위해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 광야에서 노숙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도자 모세는 영광을 보지 못하고 노환으로 죽는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로 선정된 여호수아는 그날을 위해 강병 양성에 매진한 결과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드디어 가나안 땅 예리코를 공격한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예리코 성은 견고하여 쉽게 함락할 수 있는 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야훼의 계시를 받은 히브리인은 성을 7번 돌고, 제사장이 나팔을 불고, 야훼를 칭송한 끝에 난공불락이었던 예리코 성을 무너트리는 초유의 전과를 올린다. 제대로 된 공성전을 하기도 전에 성이 무너진 현상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나돌지만 아무튼 예리코 성은 함락되고 원주민은 몰살된다. 히브리인 입장에서 보면 민족사적으로 처음 자신들이 정착할 수 있는 도시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기원전 1,300년 경이었다.

 

그렇게 여호수아가 함락한 예리코에서는 그 당시 기준으로 이미 7,7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예리코의 역사는 신화처럼 까마득히 오래된 과거였다. 토기도 없고 구리도 없던 아득히 먼 시절부터 누군가가 집을 짓고, 그리고 누군가가 곡식이 풍부했던 그곳을 점령하고 한동안 정착했으며 그런 현상은 때론 긴 시간을 두고 때론 짧은 시간 동안 반복되었다. 그러니까 구석기 말기에서 신석기와 청동기시대를 관통하여 철기시대까지 지구사적 연대기를 통과해 온 것이다. 그곳은 현재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그만큼 사람이 살기 좋은 터라는 것을 방증한다. 동양의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명당 터인 것 같기도 하다. 염분 농도가 바다보다 훨씬 높은 죽음의 호수 사해가 옆에 있고, 지대가 해발 –250미터로 낮아 바람도 없이 매우 더웠지만 성경에도 나오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오아시스가 형성되어 있어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정주하기에 적합했다. 히브리인이 예리코를 함락하고 굶주린 배를 마음껏 채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도시였던 것 같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형성되던 초기인 1952년,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 캐슬린 케년에 의해 본격적으로 예리코 유적을 발굴되기 시작했다. 1868년 처음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당시 급변하는 세계사 때문에 지지부진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거의 90년 만에 당시 현대적인 기술을 도입하여 광범위하게 발굴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리코가 있는 레반트 지역은 플라이스토세 말기에서 홀로세 초기인 기원전 13,000년부터 기원전 9,500년 가까이 후기 구석기시대 문화를 형성했던 나투피안 문화권에 속하는 도시로서 20세기 초부터 그 존재에 대해 말로만 무성했던 초고대 유적이었는데 20세기 중반에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땅을 파면 팔수록 생각지도 못한 선명한 유물들이 나타났으며, 그런 유물들은 나투피안 문화권의 다른 지역에서 아직까지 발굴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고고학계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덩달아 기독교계에서도 구약에 등장하는 예리코 함락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로서 해석하였으며 성지로 설정하여 많은 기독교인이 순례를 하기 시작했다.  

몇 년에 걸쳐 땅을 판 결과 가장 아래층 바닥에 있는 집터를 당시 막 발명된 방사선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했는데, 놀랍게도 기원전 9,000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규모도 2,000명~3,000명 정도가 주거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 할 크기의 도시급 마을이었다. 그 당시 호모 사피엔스가 정주하던 주거 유적들이 한반도를 비룻해 중국,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등 전 지구에서 발굴되었지만 그 규모가 몇십 명 단위에 불과했고 이처럼 큰 거주지는 지구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기원전 9,000이면 신석기시대에 돌입하기 전이었다. 그 당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아마도 괴베클리 테페 성전을 만든 사람들이 거주하던 부락이 그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해본다. 아무튼,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중간 2,000년~3,000년 사이를 중석기시대라고 세분화하는데, 바로 그 시기에 만들어진 주거지였다. 요즘은 그 시기를 토기 없는 신석기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석회암이나 사암으로 만든 저장 용기가 발굴되었을 뿐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토기는 발굴되지 않았다. 그리고 주택 구조물들이 인위적으로 층층이 흙으로 매워져 있었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유지한 상태로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다른 주거지처럼 노출된 상태였다면 이미 풍화와 인간에 의해 붕괴되고 기껏해야 터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약 8,000년 동안 10번 이상 주거시설들이 중첩하여 건축된 구조여서 전체를 파악하는 데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2차원적인 다른 주거지와는 달리 3차원 이상의 상상력이 필요할 정도로 매우 복잡하여 해석하는 데만도 상당한 인류학적 분석이 뒤따라야 했다. 먼저 가장 낮은 곳의 유적을 보면, 주거지 둘레에 돌과 진흙을 썩어서 쌓은 성곽인지 방책인지 애매한 구조물이 보인다. 처음 것은 높이가 몇 미터 정도 불과하지만 층층이 올라갈수록 성의 바깥에 더 높은 성벽을 쌓았고 마지막에는 그 높이가 6.5미터에 이르렀다. 자연히 성벽의 폭은 넓어졌다. 세부적으로 분석을 하면 크게 나누어 3차에 거쳐 증축을 하였고 외부에는 폭 8m의 도랑도 있었다. 바로 그 성곽이 성서고고학의 대표적인 유물인 구약성경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예리코 성벽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을 중앙쯤에 지름 9미터 2중 원형으로 된 탑 기초 모양의 건축물이 발굴되었는데, 탑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서 해골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어떤 제의를 위한 목적으로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의 원형이 아닐까 하고 추정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또한 사람 한 명 정도가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과 성벽과 연결하는 많은 계단들이 곳곳에서 위치하고 있고 그리고 공동 창고 같은 건축물도 여러 개 발굴되었다. 꽤 의미심장한 것은 주택이나 건물들이 다들 고만고만하고 족장이나 어떤 지도자급이 거주할 정도의 큰 주거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류학자들은 그곳이 평등한 사회였다고 해석하지만 꼭 그럴 것인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당시보다 2만 년 전 유럽의 오리냐크 문화권에서 발굴된 비너스상이 여기서도 발굴되었다. 몸과 절단된 얼굴만 발굴되었는데 이목구비가 구상적으로 온전한 형태였다. 얼굴 형태만 보면 과하게 풍만하지는 않은 것 같고, 그 조각이 비너스상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확정적이지는 않지만 여인의 형상임을 가만하며 비너스상의 개념 하고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그와 매우 흡사한 형태의 여인상이 예리코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오리냐크인이 나투프 문화권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고고학적 방증이 아닐 수 없다. 동굴벽화와 매머드 상아로 여러 가지 장식품을 만들었던 그들이 더욱 혹독해진 빙기를 피해 근동 아시아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란 학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인류의 이동과 확산의 역사는 생소한 현상은 아니다.

 

여기서 비너스상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가자면, 비너스상은 유럽과 레반트 문화권에서 공통적인 의미를 가진다. 월래 정식 명칭은 비너스 조각상이라고 하는데, 당초 의미와는 달리 후기 구석기시대에 만들어진 여인상을 일반적으로 비너스상이라고 통칭한다. 가장 오래된 비너스상은 독일에서 발견된 기원전 35,000년 홀레 펠스 여인상으로서 얼굴 형태는 거의 무시하고 가슴, 엉덩이, 성기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과장되게 표현한 게 특징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런 형태의 비너스상은 이후 유럽과 러시아 지역에서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특히 기원전 35,000년에서 기원전 20,000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매머드 상아로 만든 홀레 펠스 비너스상 외에 석회암으로 만든 빌렌도르프 비너스상, 매머드 상아로 만든 모라비니 비너스상, 점토를 소성한 돌니 베스토니체 비너스상, 특이하게 철광석의 일종인 적철광으로 조각한 페트르코비치 비너스상 등 수많은 여인상들이 유럽 각지에서 발굴되었다. 이런 여인상은 기나긴 시간을 거쳐 기원전 6,500년 ~ 기원전 5,000년에 발원한 근동의 신석기시대 할라프 문화기에도 등장한다. 연대와 장소에 따라 조형적으로 조금은 다르지만 종족의 안전과 성공 그리고 다산과 여신 등의 함축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비너스상의 의미는 30,000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에 거쳐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맥락을 가진 비너스상이 나투피안 문화 유적에서도 다수가 발굴된 것이다.

비너스상과 더불어 예리코 유적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매장 문화이다. 다른 유적처럼 여러 가지 석기류와 밀, 보리 같은 곡식 낱알과 동물뼈 등이 발굴되었지만 매장 방법은 다른 문화권에서 발견되지 않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론 당시 나투프 문화권에서 그런 매장 풍습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예리코 발굴 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인류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대 문명 풍습이 지구 도처에 많지만 예리코를 포함한 나투피안 문화권의 매장 풍습은 다른 곳에서 발견되지 않는 그들만의 독특한 풍습이었다. 주거지 바닥 아래에서 유골과 분리된 두개골들이 다량으로 발굴된 것이다.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구들장 밑에서 해골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그냥 두개골이 아니라 두개골 표면에 석고상 본을 뜨듯이 회반죽을 발라 생전의 얼굴 모양을 연출했고, 그 빰과 이마에 그들만이 알 수 있는 그림을 그렸고, 눈에도 조개껍질을 박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때론 컬트 영화처럼 괴기스럽게 보이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극정성이 묻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족 중에 누군가 사망하면 시신을 풍장처럼 외부에서 부패를 시킨 후 머리를 분리해, 위에서 말한 것처럼 두개골을 정성껏 치장을 하고 가옥 아래에 다 묻었다. 그리고 다른 가족이 또 죽으면 똑같은 방법으로 바닥에 묻었다. 고고학자나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그런 행위는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로써 조상숭배의 일환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인류세의 시각에서 보면 해석되지 않는 애매한 부분은 대게 신앙의 잣대를 들이밀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해석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숭배의 개념보다는 가족애의 표현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으면 사진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기도 하고 생전의 유품을 일정한 장소에 보관하는 사람들을 지금도 심심찮게 볼 수 있듯이 예리코 사람들도 그런 맥락에서 해골을 집 안에 보관했을지도 모른다.

 

3,000명 정도가 조밀하게 모여 살면서 수렵 채집과 밀, 보리 같은 농작물을 재배하고, 돌과 진흙을 이용해 성곽을 쌓아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보호하고, 마을 중앙에 어떤 존재를 기리기 위한 탑을 쌓고, 아고라 같은 광장을 만들어 어떠한 형태의 소통을 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런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먼저 먹는 것이 해결되어야 한다. 신석기시대로 가는 여정에서 농작물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가 바로 그 당시에 이미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곡식과 고기를 담을 토기가 없었지만 저장이라는 개념을 일반화시켰을 것이고 그런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런 변화들은 인류 문명사의 한 획을 긋는 대도약이었다. 인간이 생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식량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더디지만 자연선택적으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잉여 식량과 잉여 노동이 그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당시 씨족의  구성원수는 50명에서 200명 사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최소한 10개가 넘는 씨족들이 예리코에 함께 모여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씨족들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씨족들 간에 연결하는 구심점과 연대감이 있어야 한다.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들은 조금씩 터득하였는지 모른다.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 행위는 다른 호미닌의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호모 사피엔스만의 진화적 행위이다. 바로 사회성의 시작이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그들은 인내하고 공감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은 연대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은 리더이다. 3,000명이 모여 살기 위해서는 존경받는 샤이흐급 지도자는 필수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가 나서서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공동체는 와해될 것이다. 그런 시행착오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정착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약속의 땅 예리코였다. 아마도 씨족 집단화에 대한 실험성이 강한 도시였을지도 모른다. 후세의 지도자들처럼 그 당시 예리코의 샤이흐에겐 큰 권력은 없었다. 지도자는 씨족장들이 모여 선출했고 자식에게 승계를 허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거지 내에 주택 규모가 다들 고만고만할 뿐 눈에 띄게 큰 집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을 상징하는 무덤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권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없다는 것은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대체적으로 평등한 사회였다는 것을 방증한다. 노예도 없고 귀족도 없는 공동체였을 것만큼은 분명하다. 아직은 권력을 가진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 시기였다. 선출된 부족장이 임기가 있는지, 어떤 결정적 사유가 발생할 때 비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영구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중에 누군가는 모세처럼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해 평등하고 풍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하며 발전을 도모했을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들의 선조처럼 월래 영혼이 자유로워서 어떠한 구속을 거부했을지도 모른다. 몇십 명 단위의 씨족 사회에서도 누군가는 반항끼 있는 일원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현상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씨족들이 여럿 모여서 부족을 이루면 그 사회는 감정이 뒤섞여 복잡해지고, 미래도 불투명해지고 때론 연대감도 일순간 무너진다. 그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어떤 규칙이 만들어지고 구성원은 무언의 합의서에 도장을 찍는다. 공동체를 이루며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최소한의 규범을 지키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호모 사피엔스들은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융화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그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규범을 정착시켰을 것이다. 수천 년 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제왕들이 등장하지만 말이다.

 

예리코는 지구 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급 주거지라는 것은 고고학계의 정론이다. 요르단 지역에서 1980년대 초에 발굴된 아인 가잘이라는 주거지는 예리코보다 규모가 몇 배 크지만 건립 시기는 그보다 2,000년 이후이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여호수아가 예리코를 점령한 게 기원전 1,300년인데 그보다 6배나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예리코인을 만날 수 있다. 이미 여호수아기 때 예리코는 아득이 먼 고대였고 땅속 깊이 묻혀 존재조차 모르는 전설이었다.  플라이스토세기 마지막 빙기, 일명 영거 드라이아스 혹은 최후빙하극성기라고 하는 지구환경의 급격한 변화를 극복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들은 걷고 또 걷고 지구 끝까지 이동을 했다. 그들의 고된 여정 중에 누군가가 예리코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는 것 또한 그만큼 더디고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그렇게 1만 년 전 그들의 삶의 향기를 찾아 떠나는 우리의 여정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처럼, 지구에서 사는 나는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어떤 순례적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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