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유물들은 지구 곳곳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굴되고 있다. 2003년 한반도에 위치한 충주시 소로리에서도 15,000년 전의 볍씨 30여 개가 발굴되어 최초의 쌀농사를 어디에서 지었느냐는 전 지구적인 고고학 경쟁에서 대한민국이 최고를 경신했다고 대대적 홍보를 했었다. 갑론을박 끝에 국내외 유수의 전문가들로부터 승인을 받은 ‘세계 최고의 볍씨’는 영국의 BBC방송에도 보도되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실었다. 볍씨 하나로 고고학적 쾌거라고 자랑할 정도이니 '아이 가잘'에서 출토된 진흙으로 만든 인간의 조각상 같은 것이라도 발굴된다면 정말 중국처럼 난리를 칠지도 모른다. 사실 중국의 고고학이 외면당하는 이유는 철저하게 국가주의에 기반을 두고 폐쇄적이면서 동북공정처럼 중화 정신을 노골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이다. 여하튼 '토기를 사용하지 않은 신석기시대' 이전의 유적은 지구 상에서 많이 발굴되지만 미학적인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유적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집터와 여러 가지 석기류들이 발굴되는 유적은 많이 있지만 그것은 고고학적 상상력을 작동시키기엔 너무나 미약하다. 가령 의미심장한 조각상이나 벽화 같은 것이라도 발굴된다면 여러 가지 추정과 서사를 엮을 수 있지만, 석기류가 아무리 많이 출토된다고 해서 상상력이 그만큼 발휘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풍성한 서사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신사적 가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며 또한 역사적 맥락을 추적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과학적 추론은 눈에 보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차탈회위크 유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58년대 영국의 제임스 멜라트에 의해 처음 발굴하기 시작했지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30년 동안 중단되어 있다가 1993년 영국의 이안 호더에 의해 다시 발굴이 재개되어 2018년 60년 만에 발굴이 끝났다고 한다. 고고학계의 파란만장한 흑역사를 격은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차탈회위크는 메가 사이트라고 불릴 정도로 전반적인 유적의 사이즈나 퀄리티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기원전 7,400년에서 기원전 5,500년까지 주거지를 유지한 차탈회위크는 최하 3,000명에서 최고 10,000명이 넘는 홀로세인들이 살았으며, 가장 오래된 도시급 주거지인 예리코 보다 규모 면에서 두세배 이상 크고, 주거지 형태는 매우 독창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발굴된 세부적인 유물들도 매우 다양하고 세련되었다. 그리고 최초의 고대도시와 최초의 지도를 만들었다는 칭호를 받기도 한다.

 

차탈회위크 주거지 유적은 터키 남부 챠루샴바 강 지류 옆에 자리 잡고 있다. 두 개의 야트막한 언덕에 각각 나뉘어 위치하고 있으며 아마도 동쪽 마을에 처음 정착한 후 살다가 인구가 늘어나자 옆 동산으로 분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쪽을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한 결과 약 1,000년 정도 시간 간격이 있다고 한다.  마을의 구조를 보면 매우 복잡하다. 처음 어디서 온 부족인지 모를 그들은 강변에 처음 주거지를 형성했지만 지형의 특성상 강이 범람하는 경우도 있었고 지반도 퇴적층이라 불안하였다. 주변이 숲과 초지가 적당히 혼재해 있어서 농경과 수렵 채집을 하기에 최적이었기 때문이 그들은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 주거지를 야트막한 언덕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삶의 질이 높아지자 떠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존의 주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다시 집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주택의 현관문을 측면에 만든 것이 아니라 옥상 슬라브에 만들어 사다리를 타고 출입했다.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각각의 주택들이 골목길도 없이 밀착해 있고, 출입문은 지붕에 있으며, 다른 집을 방문한다던가 일을 하기 위해 외출할 때는 각각의 지붕을 타고 이동하였다. 1,2층짜리 집들이 불규칙하게 접해 있어 지붕의 높낮이가 평평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지붕을 타고 동네 골목처럼 자유자재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생활이 윤택해지자 인구는 생각지도 않게 증가했고 그렇게 그들은 계속 집을 허물고 또 지었다. 2,000년 가까이 지나는 동안 18~20번 반복되었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100년에 한 번 꼴로 다시 개축을 한 것이다. 예리코 주거지도 10번이 넘게 중첩이 되어 있는 구조지만 그곳은 차탈회위크처럼 하나의 부족이 계속 거주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부족이 기존의 주거지를 허물고 다른 형태의 문화를 형성한 구조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처음 차탈회위크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이지만 마지막으로 마무리한 시점은 2018년이다. 처음에는 과학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는 시기였지만 40여 년이 지난 뒤에는 최첨단 측정기기들을 총동원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보다 정밀한 발굴 조사 결과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이테크놀로지를 동원하여 고고학자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고 그런 결과로 인해 깊이 있고 다양한 서사를 엮을 수 있게 되었다.

 

차탈회위크인들은 협소한 동산에 2,000년 동안 대대손손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2,000년이라는 기간은 한반도에 고구려, 신라, 백제가 막 생성된 시기이다. 그렇게 장구한 시간 동안 그들은 중간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곳을 지켰다. 그만큼 그곳에는 그들의 삶의 흔적들이 다양하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현재 차탈회위크의 상상도를 보면 주택들이 대부분 백색으로 칠해져 있고 내부도 백색으로 도장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발굴과정에서 내외부 벽과 바닥도 석회석으로 만든 회반죽을 미장한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재현한 것이다. 그리고 점토 벽돌을 그냥 건조해서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불에 구워서 가공한 후 점토 모르타르를 발라 조적을 한 것이었다. 그런 건축 공법은 몇 천 년 후 수메르 문명권에서 발견된다. 점토를 불에 구우면 강도가 강해진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외로 그런 구조의 건물은 튼튼하고 오래간다. 그리고 살기 좋은 그곳에 주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옥의 구조나 디자인 등도 발전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후반기에 접어들면 퇴보한 흔적들이 드러나지만 번성기에는 지금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된 주택이었다.

 

내부 구조는 간단하다. 직육면체 공간에 기본적으로 두 칸으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이며, 한쪽은 음식물과 여러 가지 농기구와 생활 용품들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사용한 것 같고, 다른 방은 화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룸 구조처럼 주방과 거실과 침실을 병행해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땔감에서 발생되는 연기는 천정 출입구를 통해 배출되었다고 하는데, 출토된 유골들을 분석한 결과 그들은 상당한 일산화탄소에 노출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각종 오물 즉 사람의 배설물 같은 유기물이 집과 집 사이 좁은 공간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으로 보아 각종 배설물이나 생활 쓰레기 같은 것을 그곳에 버리지 않았나 하고 추정한다. 마을의 공동 쓰레기장인 셈이다. 냄새가 진동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불과 200년 전만 해도 프랑스 파리도 오배수 관로시설이 되어있지 않아서 온 도시가 냄새에 시달렸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프랑스에서 발달된 것이 향수라고 한다.

 

레반트 지역에서 기원전 15,000년 ~ 기원전 11,000년 정도까지 존속했던 나투프 문화의 공통점 중에 하나가 가족의 유골을 집에 안치하는 매장 풍습이었다. 예리코 주거지와 아인 가잘 등 대표적은 나투프 문화권에서 불굴된 유적을 보면 그런 매장 풍습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레반트 지역에서만 발견되었던 그런 매장 풍습이 차탈회위크에서도 발굴된 것이다. 예리코와 똑같지는 않지만 수적인 면에서 보면 그곳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한 주택에서 60여 개의 해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예리코 매장 풍습처럼 해골에 점토를 발라 생전의 얼굴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흔적만 남아있을 뿐 대게는 유골 상태였고, 특이한 점은 매장할 때 시신을 잔뜩 웅크리게 만들어 부피를 최소화하려고 한 것이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가족 중에 누군가 사망하면 먼저 시신을 웅크리게 역은 후 들에 방치해 조장을 하였고, 그런 후 유골만 남은 시신을 집 바닥에 묻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조장과 매장이 병합된 매장 풍습이었다.

인류세의 전문가들은 그런 매장 풍습에 조상숭배라는 거창한 가치를 부여하지만 사실은 죽은 자에 대한 산자의 예를 표하는 방법 중에 하나라고 본다. 일정기간 고인의 화장한 유골과 위패를 집에 모시는 일본의 장례 문화처럼 가족 간의 삶과 죽음의 연대감은 인류의 공통적인 예의 일종이다. 조선시대에서도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산자로서 최고의 예를 표했고 지금도 조상을 섬기는 행위는 이어지고 있다. 이런 유교적인 관습을 차탈회위크인들이 본다면 아마도 형식보다도 내용과 의미면에서 깊은 공감을 가질지 모른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차탈회위크의 매장 풍습이 예리코와 거의 같다는 것은 문화의 이동을 의미한다. 고고학자들이 신석기시대에서 문화의 이동을 확증하는 증거로 토기의 형태와 문양을 비교하는 것처럼 두 문화권의 매장 풍습이 비슷하다는 것은 예리코인들이 북쪽으로 이동해 아이 가잘을 거쳐 아나톨리아 남쪽에 정착을 했다는 것이다. 조금 더 합리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강력한 무력을 가진 유목민이 쳐들어와 보금자리를 강탈당한 예리코인들은 생존을 위해 북으로 이동을 하였다. 일부는 머레이벳(Mureybey)에 정착하고 일부는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그곳은 수메르 문명이 시작된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었다. 그리고 일부는 머레이벳(Mureybey)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 구릉지대로 들어갔으며, 그렇게 이동하던 중 챠르샴바 강기슭에 아름답고 살기 좋은 장소를 발견하고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숲이 풍부해 식물 열매가 풍부했고, 가젤 같은 야생 동물들도 많았다. 또한 완만한 구릉지대는 비옥하여 밀과 보리와 렌털 콩 등을 재배하는 데도 제격이었다. 하지만 다른 예리코인들은 전설로만 전해오던 동굴인의 발자취를 따라 그러니까 해가 지는 서쪽으로 여정을 계속 이어갔다. 인류의 위대한 이동이었다.

 

차탈회위크 주거지에서 발굴된 유기물을 보면, 가장 많이 출토된 육식성 뼈는 가젤의 뼈이고 곡식 중에서는 밀이 80%이고 나머지는 보리, 완두콩, 렌틸 등이다. 당시 아나톨리아 구릉지대에는 가젤이 때로 방목하는 것처럼 몰려다녀 육식성 음식을 섭취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고, 각각의 집에서 양과 염소 뼈도 발굴된 것을 보면 가축화의 증거라고 추정한다. 육류가 상상외로 풍부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녘에는 자연산 밀과 보리가 많았지만 원주민들은 경작을 하여 곡식을 소출하였으며 저장이라는 기술적인 노하우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바로 앞에 강이 흘러 물고기도 먹을 만큼 잡을 수 있었고, 식수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인간이 살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주거지가 다소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그런 것은 예전에 조상들이 살던 메마른 나투피안 보다는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음식의 양과 질을 자신들이 직접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문명사적으로 볼 때 대전환의 시작점이었다. 동물을 가축화하고 곡물을 경작할 수 있는 능력은 조물주도 생각하지 못한 위대한 진화의 결과였다. 그럼으로써 의식주에 매몰되어 있던 인식의 세계가 그로 인해 확장되었고, 그런 현상은 바로 진정한 문화를 양산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었다. 이제 금속과 문자를 만들 날도 멀지 않았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역사는 매우 느리게 흐른다는 것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으로 4천 년이 더 지나야 청동과 문자가 발명되니까 말이다.

 

기원전 7,400년 처음 정착하고 2,000년 동안 그곳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그들의 장구한 역사에 대해  우리는 알 수가 없고 앞으로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에 대해 하는 것은 1%도 안 될지 모른다. 대부분은 모른다. 고고학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문장이 바로 모른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관할 수는 없다. 돌 하나, 그림 하나, 장신구 하나 등을 자세하게 드려다 보면 그들의 삶을 조금을 엿볼 수 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런 면에서 차탈회위크 유적은 굉장히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먼저 가장 눈에 띄는 발굴품은 들소의 두개골이다. 들소의 거대한 뿔과 두개골이 발굴되었는데, 그들은 집단 사냥으로 잡은 들소의 머리를 뿔과 두개골만 남게 처리한 후 벽에 걸어놓기도 하고, 두개골이 없는 경우에는 점토로 두개골을 만들고 뿔을 붙여서 거실 바닥에 장식을 했다. 점토 소머리를 바닥에 장식했다는 것은 무게 때문에 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다. 거대한 뿔을 가지고 있는 들소는 힘의 상징이었다. 그런 이미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동물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크고 에너지가 넘쳐 흐리지만 육식성이 아니어서 인간들이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 들소는 아직은 사육되지 않는 시기였다, 그런 힘의 상징인 들소의 머리를 집 벽에 걸어놓은 것은 남성성의 상징이며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어느 소집단의 리더쯤은 될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점토로 빚은 작은 장식품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특히 손에 쥘 정도로 작은 동물과 분절된 여인상들이 수백 개가 발굴되었다. 그런 작은 조각상은 장난감이나 장신구처럼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중성이 강한 조각품이었던 것이다. 그중에 고고학자들이 클레이 볼이라고 애칭을 붙여준 물품이 있다. 진흙으로 구운 테니스공 크기의 손난로의 일종으로서 추울 때 화덕에 뜨겁게 달군 후 몸에 품고 다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유명한 조각품은 바로 비너스상이다. 일명 지모신이라고 하는 그 조각상은 차탈회위크 문화 후반기 즉 기원전 5,700년 경에 점토로 빚은 구상 조형물이다. 35,000년 전 중유럽 오리냐크 문화권에서 최초로 발굴된 비너스 상은 거의 30,0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유럽과 근동지역에서 상당한 량이 생산되었는데 차탈회위크에서도 여지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출산하는 장면을 연출한 형태였다. 그렇게 비너스상이 어떠한 방식이든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면 문화의 소통이 분명 존재했음을 확실할 수 있다. 그 비너스상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두가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시대의 많은 고고학자들은 종족에 대한 보존 염원을 풍만한 육체파 여인상에 투영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현대의 회화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한데 10,000년 전의 조형물에 대해 현대의 시각으로 해석을 하는 것은 너무 편의적인 해석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소통 얘기가 나와서 한마디만 하자면, 화산에서 분출된 용암으로 형성된 돌이 흑요석이라고 하는데, 그 돌은 돌중에서 강도가 가장 강해서 석기를 만드는 연장으로 사용했다. 그 흑요석이 화산과 용암의 흔적이 없는 레반트 지역에서 발굴되어 고고학적 추적을 한 결과 최초의 생산지가 바로 차탈회위크라는 판정을 받았다. 화산과 용암이 있는 곳은 차탈회위크에서 100km 떨어진 하산 닥 화산이 유일했으며, 차탈회위크인들이 그 용암지대에서 흑요석을 채취하여 가공한 후 다른 도시와 교역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추정이지만 아나톨리아 지역과 레반트 지역은 어떤 형태이든 서로 경제 관계를 형성했고 따라서 문화적인 요소도 자연스럽게 뒤따랐으며 그 방증이 흑요석이다. 흑요석은 지금으로 말하면 하이테크놀로지 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차탈회위크에서 주목해야 할 미술작품은 벽화이다. 개인이 거주하는 공간은 아닌 것 같고, 마을의 회랑이나 어떤 모임이 있을 경우 사용했음직한 회관 같은 공간인데 그 집의 벽에 철광석을 희석해 만든 붉은색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복원되었다. 토기 없는 신석기 시절 지구 상에 존재했던 문화권에서 수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지만 회화 유물은 차탈회위크가 유일하다고 한다. 조각품은 셀 수 없이 많이 발굴되었지만 회화는 희귀했다. 물론 문명사적 추론을 해볼 때 차탈회위크의 회화가 유일하지 않을 것이고, 단지 장구한 시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훼손되고 사라졌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이 추앙받는 이유는 뛰어난 미학적 수준과 뛰어난 문학적 서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들소 같은 동물을 매머드처럼 크게 그렸고 상대적으로 자신들은 왜소하고 간단하게 묘사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동물의 주변에 등장하는 수십 명의 각기 다른 동작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한 머리 없는 사람은 또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등등. 월래 작가라는 직업상 아무런 의미 없이 그런 그림을 그렸을 리 없을 것이란 것은 자명하기 때문에 어떠한 이야기를 하려는 일종의 표현으로 보인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오래된 신화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무성영화처럼 시각적으로 표현할 의도로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그 벽화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들의 삶의 모습이 어떤 몽환적 형상처럼 꿈틀거리며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처음엔 추상적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구상적인 어떤 형태가 시야를 장악한다.  

여기서 작품 하나하나를 평론할 수는 없지만, 미술 전문가들이 볼 때 차탈회위크 유적은 미술품의 보고라고 극찬을 한다. 구상과 추상을 막론하고, 형식적인 면에서도 조각, 회화, 드로잉, 아상블라주, 콜라주, 그리고 설치미술까지 망라되어 있다고 한다. 종합 미술관이라 불리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예술적으로도 심도 있는 궁금증을 유발한다. 예를 들어 버드맨이라고 후세의 고고학자가 명명한 작은 점토 조상은 단순한 형태의 비구상 조형물로서 미학적 완성도가 대단히 뛰어나며, 그런 탁월한 조형미를 가춘 조각품은 수천 년이 지난 후 기원전 2,000년대에 지중해 문화권에서 다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예술은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유희라는 칸트적 관점에서 볼 때 지적인 개념을 벗어나 관조의 자유를 느낄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상상력의 확정된 자유를 차탈회위크 미술품에서 음미할 수 있다. ‘인간의 미적 욕구와 표현 양상은 선서시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차탈회위크인들은 예술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예술적인 유희를 즐기고 있었을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그들의 작품을 보면 충분히 그런 개연성을 확인 수 있으니까 말이다. 쇼베 동굴인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사자의 모습을 뛰어난 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형상화했듯이 그들도 본능적으로 확실한 자신들만의 미학적 세계를 추구했을지 모른다. 때론 아웃사이더적인 정신적 소외에서 예술적 영감이 피어오르기도 하지만, 대게는 평등과 다양성에서 예술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경직된 사회에서는 예술적 욕구의 통로가 막힐 수밖에 없고 창의성도 고갈시키기 마련이다. 살기 좋은 사회여야 잉여의 시간이 존재하고, 그럼으로써 창의성이 샘물처럼 솟아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탬프의 일종인 앙증맞은 조형물이 여러 개 발굴되었는데, 지금도 그 스탬프에 물감을 묻혀 종이에 찍으면 현재의 시각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조형 감각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탬프의 문양은 단순한 미학적 유희의 일종인데, 그렇게 심심풀이로 그런 문양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정서적으로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사시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유물이 발굴되는데, 그것은 바로 지도이다. 흔히 ‘차탈회위크 맵’이라고도 불리는 벽화가 발견되어 세계의 고고학계는 물론이고 지도 학계도 발칵 뒤집어지게 했다. 처음 발굴한 1960년대에는 풍경화나 표범의 무늬쯤으로 추정을 했지만, 2차 발굴 과정에서는 그 추정을 뒤집고 지구 최초의 지도라고 수정하였다. 선사시대의 조형물들의 대게 추상적이기도 하고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 있기도 해서 해석의 공백이 많은데, 그런 차원에서 차탈회위크 맵도 지도로서 조금은 부족한 형식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 최초의 지도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사실 그 벽화는 지도의 개념보다는 계획 조감도에 가깝다. 아마도 마을을 새로 조성하기 위한 취락 조감도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조감도 바로 위에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거대한 산이 그려져 있는데, 그 모양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중에 가장 정론에 가까운 해석은 현재의 지리학적인 관찰 결과와 화산학자들의 집요한 추적 끝에 그 산은 당시 분화 활동을 했던 하산 닥 산이라고 하며, 그 산은 마을로부터 100km 가까이 떨어져 있다고 한다. 실재는 그림처럼 상대적으로 크게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유적지에서 보면 그 산이 뒤로 보인다고 한다. 그것은 ' 화산은 인간과 지리적 사상 즉 사물과 현상 간의 공간적 관계를 보여주는 단초'가 되는 것이다.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인식 세계의 전환적 실험적 시도이며, 그것은 당시 차탈회위크인들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삶의 공간과 문화적 양태를 보면 그 사회가 평등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평등하다고 사회가 평화롭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정신활동의 자유는 어느 정도 보장을 받을 수 있다. 왕급의 족장이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사회라면 미래의 역사에서 보듯 왕권과 귀족을 위한 획일적인 문화가 존속했겠지만, 차탈회위크 사회는 평등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양하고 창의적인 문화유산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발가벗고 창이나 활로 수렵만 하던 야만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기원전 7,400년 경 그곳에 정착한 후 마을을 번성시켜 가장 많을 때는 인구가 10,00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빙하기가 끝나고 2,000년이 지난 후였기 때문에 자연환경도 그들에게 훼방을 놓지 않았다. 농경과 동물 사육 그리고 저장이라는 개념을 시도하여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었고, 주거지도 옮기지 않고 출입문을 지붕에 설치하는 놀라운 의식의 전환을 발휘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그 문화 생산품 하나하나의 퀄리티가 높은 것은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볼 때도 한 단계 도약한 인간의 지적 능력과 문화의 현대성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주었다. 적절한 자연환경 조건과 구성원 사이즈가 만 명 단위가 된다면 인간은 다양한 형태의 보다 나은 문화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보여주었다. 만약 그들이 문자를 만들었다면 수메르 문명처럼 선사시대를 뛰어넘는 역사시대를 주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홀연히 떠났다. 삶의 조건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갈등이 내재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어떤 욕망들에 의한 내부적인 갈등들, 타협할 수 없는 외부와의 투쟁들,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악전고투를 했을 것이다. 그런 역경을 극복하며 2,000년 동안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지켰지만 알 수 없는 이유를 남긴 채 그들은 차탈회위크를 버리고 떠났다. 당시 신흥 부족이었던 할라프나 유럽으로 이주하던 부족 등 외부의 침략, 그리고 내부의 정치적인 혼란이나, 청동기 시대의 도래에 따른 타 부족에의 흡수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설에 불과할 뿐 우리는 모른다. 사실 2,000년이란 시간적 크기는, 중국의 경우 한나라가 지배했던 시절로 가는 것만큼 긴 시간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실험은 실패를 했지만 2,000년 동안 자신들의 도시를 지켜냈다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며 무엇보다 진정한 인간성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그들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서 우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며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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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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