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의 신 야훼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점찍고 당신의 선민을 그곳에 안착시켰다. 우르에서 잘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유혹해 수십 년 동안 그를 노마드로 만들었다. 그 후 500년이 넘도록 그의 후손들을 이집트와 시나이 반도를 떠돌아다니게 한 후 드디어 팔레스타인에 정착시켰던 것이다. 구약에 나오듯이 유대민족은 야훼의 뜻에 따라 그곳에 예루살렘 도시를 건설하고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며 1,000년 동안 살았다. 비록 바빌로니아처럼 세계를 호령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섰다.

 

하지만 유대인이 살던 팔레스타인 땅은 애초부터 그들 것이 아니었다. 그곳엔 이미 1백5십만 년 전부터 그 누군가 살았었다.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 에렉투스가 처음 발을 디딘 곳이 팔레스타인 땅이었고, 그 후에도 수많은 호미니드가 뒤를 이었으며, 110,000년 전에는 드디어 호모 사피엔스가 그 땅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 하요님 동굴에서 40,000년 전 것으로 보이는 동물 뼈로 만든 스크레이퍼, 부싯돌, 송곳 같은 기구들과 말 형상이 새겨진 조각이 발굴되었다. 그 유물들은 유럽의 중기 구석기시대인 오리나시안 문화의 출토품과 흡사하다고 하여 레반트 오리나시안 문화권으로 분류한다. 그것은 50,000년 전 그런 문화적 소양을 가지고 아프리카를 탈출한 초기 호모 사피엔스가 살던 지역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은 인류 확산의 길목이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살던 아프리카와 새로운 땅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대게의 호미니드들이 그곳을 지나 근동과 유럽과 그리고 동쪽 아시아로 이동하였고 베링 육교를 건너 대장정을 이어갔다. 후세의 인류는 그곳을 레반트라고 불렀다. 지금의 이집트와 이스라엘과 레바논 그리고 요르단과 시리아 이라크를 연결하는 지역을 레반트라고 명명하였는데 이스라엘과 레바논 일부 지역을 레반트 회랑이라고 세분화했다. 지중해안을 따라 좁게 북쪽으로 이어진 형태여서 회랑이라고 비유했지만 인류학적으로 볼 때도 가장 핵심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했는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20세기 초부터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다량으로 발굴되고 있으며 현재도 정부가 나서서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기엔 종교 탄생의 국가로서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역사의 현장이면서 성지들도 많고, 지중해를 지배했던 고대 로마시대의 건축물들도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며 곳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보다 아득히 먼 구석기시대의 유물들도 많이 발굴되고 있다. 흔히 말하는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길목으로서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잇는 핵심적인 지역이었고, 고인류와 현생인류의 이동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대 유적의 보고가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광야 지역이 많지만 그 옛날에는 사람이 살기에 매우 적합하여 예리코 주거지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하느님의 창조 신화를 믿는 유대 국가인 이스라엘에서 창조와는 동떨어진 인류 진화의 현장을 적극적으로 조사 발굴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들도 배타성을 버리고 인류의 공동체 정신에 동참한 것은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이스라엘 내의 여러 대학이 주도하여 활발하게 선사시대 유적을 발굴하고 있으며 새로운 학설과 고고학 논문들이 속속 발표하고 있다. 21세기 현재 생생한 고고학 현장인 셈이다.

 

바로 그 이스라엘 땅에 가르멜 산이 있다. 이스라엘 북부 레바논과 접경지역인 하르파 시 동남쪽에 붉게 빛나는 가르멜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산에 오르면 멀리 지중해가 보이고 가깝게는 하르파 시와 젓꿀이 흐르는 녹색 평원이 손에 잡힐 듯이 장쾌하게 펼쳐져 있다. 유대 광야와는 전혀 다른 초원 평야는 왜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다. 가르멜 산은 지구 상의 어느 산보다도 역사와 종교 유적이 풍부하다. 산 전체가 유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여러 구역에 걸쳐 고인류 유적도 분포되어 있고, 구약성서의 주인공 엘리야가 동굴에 기거하면서 야훼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여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성스러운 산으로 신성시하며, 탁발 수도회로 유명한 가르멜 수도원이 1,000년 동안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산세가 험하고 동굴도 많아 로마제국 시절에는 불순한 자들이 숨어들기도 하고, 권력으로부터 핍박 받은 사람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그리고 로마제국 식민지 시절 훨씬 이전에도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가르멜 산을 성스러운 산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그 신성한 산에 나할 메아롯이라고 불리는 구역에 타분(Tabun), 자말(Jamal), 엘 와디(El wad), 스쿨(Skhul)이라고 명명된 4개의 동굴이 있다. 바로 중기 구석기시대 중에서도 무스테리안 문화기(150,000년 ~ 40,000년)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굴된 동굴들이다. 엘리야가 동굴에 살았던 것처럼 구석기인들도 가르멘산 동굴에서 기거하며 삶을 영위했다.

 

4개의 동굴은 인류의 진화 현장이다. 1930년 영국의 여성 고고학자인 도로시 개로드가 주도하여 본격적으로 발굴이 시작되고부터 90여 년이 넘은 현재까지 50만 년~8천 년 전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굴되어 왔다. 아프리카를 떠난 호모 에렉투스와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들이 이 동굴에 많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진하게 배어있는 곳이다. 그중에 가장 오래된 동굴이 타분 동굴이다. 50만 년의 인류 역사가 25m 높이로 층층이 쌓여 퇴적층을 이루고 있다. 가장 아래층에는 모래로 형성되어 있는데, 3km 떨어진 지중해 해안선이 50만 년 전에는 동굴 바로 앞에 있었고 그 파도에 밀려온 모래와 자갈들이 쌓인 것이라고 한다. 동굴이 해발 45m에 위치해 있는 것을 역으로 과학적 추정을 해보면, 당시 빙하기여서 해수면이 낮았지만, 간빙기 때 일시적인 고온 현상으로 인해 해수면이 5~6m 상승한 상태였고, 비슷한 시기에 지각 변동으로 40m 융기되었다는 지구학 연구가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해변은 멀리 사라지고 다시 인류가 안전하게 그곳에서 살았고 또 다른 인류가 다시 살고 떠났다. 그들이 사용한 다량의 석기와 먹다 남은 동물 뼈들이 그것을 방증하고 있다.

 

무엇보다 타분 동굴이 주목받는 것은 퇴적층 상부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이 발굴된 것이다. 방사선 연대측정을 한 결과 1십만 년 ~ 1십2만 년 전이며, 또한 17살 여자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호모 사피엔스가 유라시아 지역에 진출하기 전 1십5만 년 전~4만 년 전까지 그 지역의 터줏대감이었던 네안데르탈인 문화를 무스테리안 문화라고 칭한다. 그들의 유골이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거의 많은 양이 발굴되었지만 레반트 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타분 동굴이 유일했다. 인류의 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인 레반트 회랑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이 직접적으로 발견된 것은 고고학적으로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고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넘어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류의 대 이동이 단지 분절된 유골만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은 두개골 조각이 그나마 가장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에 고고학자들은 계속 땅을 파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기존의 해부학적인 분석과 분자 생물학, DNA 게놈 분석 그리고 지질학, 기후학 등을 동원하여 다각적으로 분석하기 때문에 과학적 정확성을 담보할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당시 아메리카를 제외 한 지구 상의 구인류 중에 하나였다. 그들의 유골 화석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몇 군데서 발굴되었으며, 레반트 지역을 벗어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테식 타쉬(Teshik Tash) 동굴에서도 어린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더 멀리 시베리아 알타이 산악지역에 살던 데니소바인과 교접을 했다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 분석 결과도 나왔다. 아마도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탈출하기 전까지 그들은 가장 멀리까지 이동을 한 구인류인 것 같다. 호모 데니소바와 호모 솔로엔시스 그리고 호모 플로레시엔스 등의 구인류는 한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반면에 네안데르탈인의 활동 범위는 광범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네안데르탈인에 대해서는 가설이 분분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타분 동굴에서 발견된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을 두고 아프리카 이동설에 대한 근거로 삼지만 그것은 하나의 가설 일뿐 60만 년 전 유럽에 진출한 호모 하인델베겐시스로 부터의 진화된 인류라는 설이 정설이라고 한다. 유럽 지역에 고립되어 진화한 특화된 인류라는 것이다. 그 네안데르탈인이 빙하기의 극심한 기후환경을 피해 동쪽으로 이동을 했고 그 일부가 레반트 지역에 잠시 정착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의 뼈를 두고 벌이는 가설 전쟁은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타분 동굴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발견되기 전에 이미 스쿨 동굴에서 1십1만 년 된 호모 사피엔스 유골 10개가 발굴되었었다. 스쿨 동굴뿐만 아니라 부근에 있는 카르제 동굴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호모 사피엔스 유골이 28개가 발굴되었기 때문에 가르멜 산은 신인류의 주요 거주 지역이었던 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서 네안데르탈인의 등장이 중요한 이유는 비슷한 연대로 보아 그들과 호모 사피엔스가 함께 살았는지에 대한 추정이다. 시차 간격을 두고 거주했을 뿐 두 인류는 같이 살지 않았을 것이란 설과 네안데르탈인의 발견은 어떠한 형태든 함께 살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설이 맞서고 있다. 아마도 함께 살았다면 개체수 적으로나 영리함으로나 구인류가 신인류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란 설이 조금은 유력하다고 한다. 한 두 개의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을 가지고 수십 개가 발굴된 호모 사피엔스와 비교하는 것은 언감생심일지도 모른다. 사실 예를 들어 1천 년이란 시간 간격은 인간의 삶의 시간으로 따지면 아주 먼 시간이다. 타분 동굴의 네안데르탈인과 케바라 동굴에서 찾은 네안데르탈인의 유골의 시차는 6만 년 이상인데 그 격차는 정말 기나긴 시간이며 진화의 과정도 무시 못한다. 사실 처음에는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의 진화된 인종으로 치부하기도 했던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만년 단위의 시간 사이즈였다.

 

어떠한 형태든 함께 생존했느냐 아니냐 하는 두 가지 가설은 유럽에서도 오래 동안 양립해 왔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확립되면서 호모 사피엔스 유전자에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2% 섞여 있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으며 그로 인해 함께 생존했다는 가설에 결정적 물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젠 이 가설이 어느 정도 정립이 되었다. 그러면 네안데르탈인은 왜 멸종되었는지에 대해 인류학자들은 또 다른 의문이 제기하고 있다. 신인류와 구인류의 대립 관계는 아무도 모른다. 게놈이 그 관계까지 밝힐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신인류가 폭력으로 구인류를 멸절시켰든, 아니면 함께 사이좋게 살다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든 상관없이 두 인류 중 적지 않은 수가 교접을 하고 2세를 잉태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1십만 년 전에 레반트 회랑 지역에 살던 신인류는 더 이상 북쪽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기후적인 요소가 가장 클 것으로 추정은 할 수 있지만 당시의 호모 사피엔스는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흔적은 유라시아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 멸종되었거나 아니면 다시 아프리카로 귀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생물학적인 형태는 신인류와 거의 흡사하지만 아직 진화의 단계를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7만 년 ~ 6만 년에 동부 아프리카에서 완벽하게 진화된 호모 사피엔스가 다시 유러시아로 이동하여 정착에 성공한다. 그들의 생물학적 구성이 바로 현생인류와 같다고 한다. 바로 그들이 완벽하게 아프리카를 탈출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순다랜드의 윌리스 라인과 베링 육교를 건너간 신인류이다. 유럽의 중기 구석기시대 오리나시안 문화를 이끈 주역들이 바로 그들이며, 쇼베 동굴벽화를 그린 화가의 조상도 역시 그들이다.

 

그 밖에도 엘 와드 동굴과 자말 동굴에서도 타분과 스쿨처럼 인류의 유골이 발굴되지 않았지만 동물의 뼈와 진보되어가는 석기들이 많이 발굴되었다. 특히 타분과 엘 와드, 자말은 가깝게 붙어있어서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적 생활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각 동굴에 서로 다른 가족이 살면서 이웃처럼 교분을 했을 수도 있고, 씨족이 모여 살며 각각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동굴을 이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4개의 동굴 중에 타분, 스쿨, 자말은 깊이가 10m 이하로 짧지만, 엘 와드는 깊이가 60m 정도로 깊고 9개의 고고학적 지층이 형성되어 있어서 뼈로 만든 조각품과 골각기 등 나투피안 문화의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계속 땅을 파고 있다고 한다.

 

또한 가르멜 산에는 4개의 동굴 외에도 60,000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두개골 없는 유골이 발견된 케바란(Kebaran) 동굴과 13,000년 전 최초로 맥주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라케펫(Reqefet) 동굴 등이 있으며, 이 모든 동굴 유적들은 50만 년 동안의 인류의 진화를 함축하고 있는 소중한 증거들이다. 가르멜산은 고인류학과 고고학의 보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르멜 산은 호모 에렉투스 이후 인류의 삶의 터전이었다. 이미 수많은 호미니드의 주검과 그들이 사용한 나무, 가죽 등의 기구들이 흙이 되어 사라지고 단지 몇 조각의 뼈와 다량의 석기들만 남아 있지만 한때는 수렵 채집을 하며 지난한 생존을 영위했던 인류의 공간이었다. 호모 에렉투스의 후손인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여정의 발자국 소리가 땅에서 들여온다. 날렵한 카젤을 잡기 위해 초원을 달리는 한 무리의 네안데르탈인의 거친 숨소리와 지축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우리의 가슴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 눈동자가 초롱하게 빛나는 호모 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저 멀리 지중해안을 따라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실루엣은 이 가르멜 산에 드리우면서, 아득히 먼 미래를 염원하듯 일렁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젊은 네안데르탈인 여인은 왜 그 높은 다분 동굴에서 홀로 발견되었을까. 사망 원인은 무엇일까. 병사일까 타살일까. 매장일까 조장의 일종일까. 네안데르탈인에겐 매장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더라도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엘 와드 동굴이 아니라 굳이 경사가 심하고 가장 높은 타분 동굴에 묻었다는 것은 납득할 수가 없다. 그런 매장에 대한 가설이 있지만 개연성은 부족하다. 시신을 짊어지고 그곳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그 죽음이 그만큼 엄중하다는 것인데, 그런 추론은 타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럼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시신은 옮겨지지 않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죽었을 것이란 게 합리적 추론이다. 그럼 그녀에게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혹시 무리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닐까. 기후가 급변하고 삶의 조건이 악화되자 씨족의 무리는 떠나기로 결정을 한다. 하지만 자식을 낳다 모진 병에 걸린 여인이 있었는데 무리는 그녀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사자 무리처럼 약한 개체와 함께 이동하지 않는 것은 생존의 법칙 중에 하나였다. 그리하여 무리의 수장은 그녀를 그곳에 놓아두고 떠나기로 작정한다. 사실 그녀는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홀로 남은 그녀도 그들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녀의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으로 안았다. 이제 그녀는 홀로 되었다. 동굴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리는 산을 내려가 초원 멀리 총총히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의 마지막 눈빛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태양은 여러 번 지중해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는 마지막 안간힘을 쓰며 몸을 반쯤 일으켜 바다로 시선을 주었다. 지중해 수평선 너머에 걸려 있는 석양은 유독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 붉은 노을이 그녀를 집어삼키듯 가르멜 산으로 밀려왔다. 그렇게 그녀는 붉은 노을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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