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폭력성은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200,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라는 사람종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폭력성은 그들의 DNA에 천착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시절에도 폭력이 존재했을지 모른다. 현생인류는 아니지만, 스페인 시마 데 로스 후에소스( Sima de los Huesos) 동굴에서 발굴된 430,000년 전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의 중간 유전자를 가진 구인류 화석 중에서 폭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두개골에 외부의 강한 타격으로 인한 천공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살인의 단서가 되며 그 피의자는 오른손잡이라고 발굴자는 구체적으로 해석까지 달았다. 그리고 인류 최초의 폭력의 흔적이라고 강조했다. 구석기시대의 유골 화석을 가지고 폭력을 증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인류학적인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보면 폭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감히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폭력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거의 초식만 하다가 육식을 시작한 호모 에렉투스 시절부터 폭력은 시작되었다. 생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자연선택이었을 것이다. 고기에 맛이 들린 고인류는 채식을 하면서도 고기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불에 구워 먹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몸집이 커지고 뇌 용량도 증가하였다. 육식은 그들을 새로운 낙원으로 인도했다. 작은 동물을 잡아먹던 호모 에렉투스는 배를 한껏 채우기 위해 보다 큰 동물을 사냥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사나운 육식 동물로 변해갔다. 맹수 같은 포식자를 사냥할 수는 없었겠지만, 순록이나 들소 정도 되는 동물을 잡기 위해서 보다 큰 완력과 석기로 만든 무기 같은 것이 필요했다. 큰 동물의 숨통을 끊는다는 것은 결코 손쉬운 행위가 아니었을 것이다. 사냥 방법은 진화하여 네안데르탈인은 창을 만들어 사냥을 했고 드디어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하면서 투창기와 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즉 무기가 발명된 것이다. 아마도 불의 발명처럼 무기의 발명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 무기를 사용하여 코끼리보다도 더 큰 매머드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매머드 한 마리면 어마어마한 고기를 얻을 수 있었다. 거대한 매머드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0명이 넘는 인원이 필요하고 화살보다 강한 타격력을 가진 창이 필요했으며, 그 과정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가만히 상상을 해보면 처절한 싸움 장면이 떠오른다. 그들은 영리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전문적인 사냥꾼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은 엄두도 못 낼 능력자였다. 사바나의 제왕인 사자도 코끼리는 잘 건드리지 않는데 호모 사피엔스는 겁도 없이 매머드를 사냥했던 것이다. 무기와 집념이 그것을 성공하게 했다. 그런 생존 방법은 현생인류로 하여금 폭력이라는 본능을 만들게 했는지 모른다. 동물에게 가하던 폭력이 자신 즉 인간에게로 향한 것이다. 욕망은 분노를 잉태하고 그 분노는 폭력이라는 행위로 표현된 것이다. 폭력은 어떠한 형태든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를 뜻한다.

 

인간의 폭력은 이미 구약성서 창세기가 시작하자마자 몇 장면 만에 등장한다. 창세기 4장 8절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라고 적혀있다. 카인은 단지 동생이 하느님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하찮은 질투만으로 자신의 동생을 돌로 쳐서 죽인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아벨의 두개골이 발굴된다면 그곳에 큰 구멍이 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살인 행위가 인간의 2대 조상에서 이미 행해졌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은유로 점철된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담긴 이 사건은 단지 인간의 원죄만을 고찰하게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야훼가 진심으로 인간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폭력이 극대화된 행위는 전쟁이지만 그보다 더 심화된 행위는 학살이다. 전쟁은 자신이 살기 위해 적을 죽이는 정당방위의 개념도 내포하고 있지만 학살은 무방비 상태의 사람을 죽이는 일방적인 집단 살인 행위이다. 특히 노약자를 학살하는 잔혹한 행위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인간의 폭력성의 막장을 보여주는 사이코패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에 인본주의적인 감정이 있지 않았을 것이고 설령 있더라도 그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이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런 학살은 인류 역사이래 수없이 자행되어 왔다.

 

2021년 3월, 크로아티아 포토차니에서 6,200년 전의 유골이 발굴되었다는 보도가 언론을 통해 나왔는데, 발굴된 41구의 유해를 해부학과 유전자 분석 등을 통해 조사를 한 결과 집단학살 후 묻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돌도끼나 곤봉 같은 둔기에 의한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살해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기사는 추가로 학살은 광적으로 진행되었다고 전하다. 그리고 이런 글로 마무리한다. 노박 박사는 " 인간은 지난 1만 년 간 변하지 않았으며, 변한 것이 있다면 더 악화한 것밖에 없다"라고 했다.

출처:연합뉴스 / 포코차니 유골 발굴 현장

학살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하고 가겠다. 구석기시대의 학살 증거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추정을 해야 하는 유적들이 많지만 신석기시대 이후부터는 많은 유적에서 확실한 물적 증거들이 드러나 살상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신석기시대는 폭력의 시대라고 해도 과하지 않는 표현일 것이다. 공동체 내에서 권력과 그것을 쟁탈하려는 욕망이 솟구칠 시기이고 다른 공동체를 공격하여 식량과 여성과 각종 물품을 획득하는 행위가 삶의 비용이 절감된다는 것을 터득한 시대였다. 같은 종을 살상하여 어떠한 물질적인 이득과 정신적인 엑스타시를 느끼는 것은 결국 인간을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탐욕의 늪에 빠지게 했다. 학살은 그런 과정에서 나오는 여분의 광기이며, 그 광기는 무의식화 되어 인간의 내면에 잠재해 있도록 진화되었다. 인간의 생명은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에 불과했다. 권력과 욕망과 폭력과 학살은 톱니바퀴처럼 형성된 하나의 거대한 메커니즘이었다. 학살이 문자화 되어 역사에 나타난 것을 잠깐 얘기하자면, 기원전 425년에 탈고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기원전 494년 세페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아르고스 시민이 사는 숲에 불을 질러 6,000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425년에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에서 스파르타가 노예 상태에 있던 헬롯인의 인구가 증가하자 위협을 느끼고 봉기를 막기 위한 명목으로 2.000명을 무참하게 학살했다고 전한다.

 

역사에서 기록된 학살 사건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것을 전부 얘기할 수는 없고 사이즈가 큰 것부터 몇 개만을 얘기하고 가겠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란다.

 

기원전 146년, 로마제국이 자신의 속국이었던 그리스의 코린토를 카르타고에서 자행했던 것처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디아 동맹과 전쟁이 벌어지던 혼란한 시기에 로마제국은 마지막 저항을 하던 코린토를 다시는 도발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시민을 전부 학살한 후 소금을 전 도시에 뿌렸다. 그런 몰살 행위를 흔히 불모지화 한다고 말한다. 당시 상당한 규모의 대도시였던 코린토는 그 후 19세기 중엽 그리스가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잊혀진 소도시로 명맥을 유지했다.

 

기원전 88년 당시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로마제국 시절, 속국이었던 아나톨리아 내에서 로마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아나톨리아 지역의 속국 중에 하나인 폰투스의 왕 미트라다데스6세가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페소, 페르가몬, 아드라미티온 도시 등을 포섭하여 자국 내에 거주하던 로마인과 이탈리아 세리 등 150,000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이 사건은 흔히 소아시아의 만종이라고 부른다. 그 학살 사건으로 인해 미트라다데스 전쟁이 벌이지고 아나톨리아의 속국들은 로마제국에 의해 영원히 사라진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도 수많은 학살이 이루어졌다. 학살은 학살을 낳는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기원전 207년, 중국 신안에서 초나라의 항우가 20만 명의 포로를 무차별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진시황제의 붕어 후 진나라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고 그 틈을 노려 초나라의 항우가 봉기를 하여 진나라 본진과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포로로 생포한 진나라 군병들을 모두 학살하고 땅에 묻었다고 여러 역사서는 꼼꼼히 전한다. 후세는 그 사건을 신안의 갱이라고 부른다. 군량미를 포로에게 먹여서 축낼 수 없었다는 설과 항복은 했지만 전향을 하지 않아 놓아주면 다시 적군의 병력이 될 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죽였다는 설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양성, 성양, 함양 등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던 항우는 중국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에서도 광폭한 군주로 불리게 되었으며 학살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물론 히틀러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않지만 말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굵직한 학살을 보면, 십자군 원정 당시 수만은 유대인과 아랍인을 학살한 것은 지울 수 없는 기독교의 오점으로 남아 있고, 1572년 8월에 프랑스 성 바르톨로메오 축제 때 벌어졌던 위그노인 학살사건은 왕족과 귀족의 권력 암투 과정에서 벌어졌던 어처구니없는 민간인 학살사건으로서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3만 명이지만 비공식적으론 1십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마녀사냥이란 종교적 광기로 인해 수많은 선량한 여자들이 억울하게 화형으로 죽었고, 특히 19세기 ~ 20세기 초까지 그리스와 오스만 제국, 아르메니아, 체르케스, 러시아 등 그 주변 국가에서 벌어졌던 독립전쟁과 영토 분쟁에서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고,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유대인을 비룻한 약소 민족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지구의 인류사에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치욕적인 역사였다. 그리스 문명 이후 역사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럽에서 이런 대학살이 벌여졌다는 것에 대해 수많은 석학들이 분석을 하였지만 결론은 알 수 없다이다. 인간은 월래 그렇게 돼먹은 종자이라고 일갈을 해도 어느 누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인의 광기는 그래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유럽을 벗어난 지역에서도 유럽 못지않는 대학살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벌어졌다. 근대 이후 벌어졌던 아프리카 흑인 노예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학살은 또 다른 영역의 학살이었다. 유럽인의 물질적 쾌락과 삶의 향상을 위해 타민족들을 무자비하게 비인도적으로 이용하고 하찮은 동물을 밟아 죽이듯이 도륙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기독교의 유럽에서 이런 비인간적인 살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홀로코스트가 그냥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리라. 홀로코스트의 학문적 근간은 19세기에 횡횡한 우생학이며, 그것은 폭력이 이성과 결합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악한 광기가 잉태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 지구 역사를 학습시켰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도 인간의 잔혹한 폭력을 증거하는 사건들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사이즈도 크다.

 

제노사이드에 대해서 얘기하다 보면 대한민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지만 참고 잠깐만 얘기하고 가겠다. 그래서 세계사적으로 볼 때 조선은 인의예지의 나라답게 인명을 주요시하였으나, 조선시대 말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19세기 100년 동안 공식적으로 124명이 순교를 했다고 가톨릭계에서 확정을 했지만 실제로 주변 사람들까지 합하면 살상을 당한 사람들은 10,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청나라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던 천주교가 조선에서 유독 폭력적인 살상 방법으로 탄압을 했어야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설령 그 탄압이 정당성이 있더라도 무자비하게 도륙을 했다는 것은 홀로코스트를 무색할 정도로 인간성을 상실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벌어졌던 10년간의 이념 전쟁은 단지 정치적인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민간인의 학살을 낳게 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제주 4.3사건이며 그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라는 이유로 재판 없이 죽창과 총알을 맞고 구덩이에 집단으로 매장되었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매몰되면 인간의 광기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들이었다.

 

그리고 학살에 버금가는 폭력은 순장이라는 장례 풍습이다. 기나긴 석기시대가 끝나고 청동기시대가 돌입하면서 나타난 문화 중에 하나가 순장이다. 농경이 정착되고 공동체의 구성원 수도 늘어나면서 계층화가 형성되었고 부락의 규모는 도시급으로 커졌으며 그에 따라 권력자가 나타났다. 권력에 심취한 공동체의 수장은 공룡처럼 탐욕스러워졌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금속으로 만든 칼은 권력의 상징이며 폭력을 행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권력자는 폭력으로 구성원을 다스렸고, 폭력으로 다른 도시를 약탈을 했고, 폭력으로 죽기도 했다. 권력의 힘이 강해지자 신화를 창작하여 구성원을 그 속에 예속시키고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카르스마를 구축했다. 자신은 신의 아들이며 대리인이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복종을 강요했다. 그런 와중에 순장이라는 해괴망측한 풍습을 만들어냈다. 죽음 이후에도 생전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자신이 사용한 장식품과 애마와 그리고 시종들을 죽여서 함께 묻었다. 기원전 3,000년 경 이집트 선왕조 시대 제1왕조 파라오 호르 아하의 무덤 옆에서 시종 800명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케르마 시대의 파라오 무덤으로 추정되는 묘에서는 400명이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인골이 발굴되었다. 그중에는 후궁, 요리사, 마부, 집사, 말 등이 순장되어 있었다. 많은 피라미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집트의 순장은 사이즈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시절에도 그에 못지않은 순장의 유적들이 즐비하게 남아있다. 기원전 2,500년의 어느 왕묘에서는 시종 59구, 여자 19구가 순장되었고, 수소 6마리, 전차 2대 등도 함께 발굴되었다. 죽음의 구덩이라고 불리는 RT1237 무덤에서는 68구의 여성 인골과 6명의 남성 인골이 발굴되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순장 무덤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곳뿐만 아니라 중국도 만만치 않아서 상나라 시절부터 순장이 만연하여 공자도 순장의 폐해를 일갈하였으며 진시황제의 무덤에서 발굴된 병마용갱의 8,000개 테라코타도 순장을 상징한 것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순장 문화는 명나라까지 이어졌는데, 세종 시절 조선의 여인이 명나라 영락제의 순장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시종들이 죽어서도 황제를 보필했다고 전한다. 이런 순장 문화는 한반도에서도 횡횡하여 고조선을 거쳐 삼국시대에서도 흔하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장례 문화였으며 특히 가야의 순장 풍습은 완고하여 패망하는 마지막까지 순장을 지켰다. 또한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유럽, 중앙아시아, 남아메리카에서도 유행이 불 정도로 순장은 글로벌한 풍습이었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도 기원전 500년 경에 스키타이족의 장례 풍습을 기술하고 있다. 시종 50명, 말 50마리가 왕 옆에 묻혔다.

 

사실 순장은 학살보다 더 잔인한 폭력이었다. 죽어서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산 사람들을 죽여서 보필을 받으려는 권력자의 욕망은 탐욕의 막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살아생전 모시던 권력자를 따라 저승에 가서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넘어간 꽃다운 시종들은 사약으로 목숨을 끊은 후 혹은 참수를 당한 후 땅에 묻혔다. 토기 없는 신석기시대에 평등했던 공동체는 이제 권력자의 폭력 앞에 납작 엎드리는 세상이 되었다. 힘세고 용맹했던 전사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겼지만 이제는 자신들을 보호해주던 그들 앞에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권력자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쳐야 했고 원하면 기꺼이 목숨도 내놓아야 했다. 권력자는 이제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신전의 주인공이 되었다. 순장은 신탁의 이데올로기에 감추어진 탐욕한 권력자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격한 감정을 식히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구석기시대는 폭력이 없는 평화의 시대라고 논하는 전문가들이 많지만, 당시의 동굴 벽화 곳곳에 폭력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화로웠다고 설파하는 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악할 수 없다는 성선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발굴된 유적 곳곳에 그렇지 않다는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어서 구석기시대의 평화는 다시 점검을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인류학적인 잣대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결코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있는 해저동굴로 유명한 코스케 동굴 벽화에 의미심장한 암각화 하나가 있다. 2만 년 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그 그림에는 이미 사망한 듯한 사람이 누워 있다. 그 상체 앞부분을 통해 허리 쪽으로 창이 관통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도 위에서 창을 던져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물 벽화처럼 사실적인 표현이 결여되어 의미심장하지만 그림의 도상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살해라는 추론을 얻을 수 있다. 어떤 목적인지 모르지만 누군가 죽였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은 아닐까. 나에게 대항하는 자는 이렇게 죽을 것이다라는 어느 권력자의 엄포 인지도 모른다.

 

이탈리아 파그리치 동굴에서 발굴된 21,000년 전의 석판 그림에서도 살해 장면을 보여준다. 도상학적으로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얼굴에 창이 관통하고 몸통에는 여러 개의 화살이 꽂혀있는 그림인데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살해 상황을 묘사한 것 같다고 한다. 20,000년 전후의 구석기시대 벽화에서 이런 형태의 벽화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프랑스 로트 지방의 쿠냑 동굴 벽화와 역시 같은 지역의 페슈 메를 동굴벽화에서도 창과 화살에 맞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그 외에도 여러 동굴에 이런 류의 그림이 발견되어 있다. 그중에 도르도뉴 지방에서 발굴된 수 그랑 락 동굴 벽화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등 뒤에  7개, 엉덩이에 1개의 화살이 꽂혀 있고 성기에도 무언가 꽂혀 있는 그림이다. 성기를 절단한 것을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 어떤 사건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한 것을 보면 폭력은 그다지 새로운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왼쪽: 쿠냑 동굴       오른쪽 페쉬 메를 동굴

벽화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람의 몸에 박혀 있는 창과 화살이다. 많은 장면의 주인공들을 보면 여러 개의 화살이 꽂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을 향해 여러 사람이 활을 쏘았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여러 개를 동시에 맞고 죽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죽은 시체한테 확인 사살을 한 것인지 모르지만 우발적은 살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그림으로 기록을 했다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가령 어느 아무개가 망나니짓을 해서 이렇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을 목적으로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폭력은 당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라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폭력을 묘사한 벽화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시칠리아 아다우라 동굴에서 발견된 12,000년 전의 암각화이다. 20명에 가까운 사람과 여러 마리의 사슴과 소들이 어지럽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상부의 그림을 보면 중앙에 의미심장한 포즈를 취한 듯한 사람 2명이 누워 있고 그 둘레에는 8명이 각각 어떤 동작을 행하고 있다. 8명 중에 3명은 중앙의 두 사람을 보고 춤을 추고 있는 것 같고, 두 명은 구경하고, 한 명은 허리를 구부린 자세를 취하고 있고, 외부를 감시하고 있는 듯 등을 돌리고 있는 나머지 두 명 증 한 명은 창을 들고 있다. 각각 독립된 이런 동작들은 스틸 사진처럼 순간을 포착한 듯 생동감이 있다.

출처:위키피아  /  아다우라 동굴 암각화

이제 중앙에 있는 두 사람을 주목해 보자. 이 두 사람은 구석기시대 회화에서 가장 유명한 호모 사피엔스다. 아랫사람은 두 다리와 목이 끈으로 연결되어 허리가 뒤로 저친 채 엎드려 있고, 위에 있는 사람도 똑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는데, 아마도 아랫사람은 죽인 듯한 모습이고 위에 있는 사람은 아직 죽지 않은 듯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 같다. 팽팽한 끈의 장력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남성의 성기 모양을 보란 듯이 그려져 있는 것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이 두 사람은 왜 그런 동작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종의 성인식으로서 혹독한 고통을 경험하게 하는 의식이라는 설과 샤머니즘의 의례로서 사람을 신탁에 바치는 행위의 일종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유력한 설은 어떤 규범을 어긴 범죄자를 고문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고문 방법은 고문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고문의 하나로서, 목과 두 다리를 뒤로 묶어 두면 펴지려는 두 다리의 힘이 끈에 장력을 발생시키고, 그 장력은 목을 조이게 하여 결국 시간이 경과하면 목숨이 끊어지는 고문으로서 중세 때도 이런 고문이 있었다고 한다. 혹은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생포한 적군을 고문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 되었든 사람의 신체에 물리적인 힘을 가해 고통을 주는 행위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이유 없는 폭력은 없기 마련이다. 그 고통을 보고 상대방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않겠다.

 

아프리카의 수단과 이집트 국경 지대에 제벨 사바하(Jebel Sabaha)라는 유적이 있다.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그곳은 한때 상 이집트 문화가 꽃피우던 지역이었다. 1965년 나일강 아스완 하일 댐을 증축하기 전에 수몰 예상지역에 대한 고고학 조사를 벌이던 중 우연히 많은 인간의 유골이 묻혀있는 무덤을 발견했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그곳은 기원전 12,000년 신석기시대에 카란 문화권 사람들이 이용한 공동묘지로 밝혀졌다. 완전한 형태의 유골 61여 구가 넓은 면적에 소규모 그룹을 지어서 분포되어 있는 상태로 발굴되었는데 그 유골 주변에는 창날과 화살촉 같은 무기들도 있었다. 고고학 발굴 역사 이래 이 정도 규모의 매장지는 지구 상에서 발견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61여 구의 유골을 각각 해부학적인 분석을 한 결과 다수의 유골에서 가슴, 허리, 엉덩이, 얼굴 등에 외상을 입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최소 24명은 창과 화살에 의한 타격으로 사망했을 것이란 해부학적 결과가 나왔고, 뼈에는 폭력의 흔적은 없지만 근육이나 장기들이 파열되어 사망한 것도 다수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최소 30여 명은 살해당한 후 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것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집단 학살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제벨 사바하 발굴 장면

2021년 5월 27일 scientific reports지에 실린 논문에 의하면, 최첨단 법의학과 다양한 인류학 방법을 동원하여 새롭게 분석을 했는데, 61구 유골 중 67%가 무기에 의해 사망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예를 들어 유골 번호 JS31에 대한 법의학적 분석을 보면, 화살촉 같은 돌조각이 일곱 번째 경추와 왼쪽 치골에서 발견, 왼쪽 경갑골 앞쪽 부분 표면에 분쇄와 천공, 뒤쪽 내측에 깊은 V자형 스크래치, 오른쪽 첫 번째 중수골 말단에 자연적으로 치유된 골절, 대퇴골에도 치유된 것으로 보이는 병변 발견 등 구체적인 내용들 실려 있다. 그런 방법으로 하나하나 조사 분석한 결과 61구의 사체는 한 번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거쳐 매장되었으며 그것은 여러 번의 집단적인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사망한 것을 보면 집단 간의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 사건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논문은 인류학적인 분석도 내놓는데, 그 원인은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 자원 경쟁의 일환이라고 추정한다. 식량을 탈취하기 위해 다른 부족을 침략하는 행위가 비일비재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제벨 사하바 매장지 유골이 매장 형식에 따라 묻힌 것이라면, 나타루크 유골은 폭력 사건이 벌이진 후 그대로 보존된 상태로 발굴되었다. 사건 현장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2021년 케냐 투르카나 호수 근처에서 기원전 10,000년에 사망한 27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더 정확하게 구분하면 3세~6세 5구, 12세~15세 1구, 20세~30세 남성 2구, 20세~30세 여성 3구, 30세~45세 남성 5구, 30세~45세 여성 3구, 45세 이상 남성 1구, 45세 이상 여성 1구, 미상자 5구 총 27구다. 그중에는 임신한 여성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발굴 현장은 임시 야영지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유해에 나타난 상처를 분석하면 화살에 의한 타격과 그리고 곤봉 같은 둔기와 창 같은 예리한 무기 등 최소한 3개의 무기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제벨 사하바에서의 유해는 여러 차례의 폭력 사건을 증거 한다면, 이 나타루크 현장은 하나의 집단 학살 사건이 벌어진 장소이다. 호수가라는 환경은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사망한 그들도 그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풍부한 식량을 확보하며 정주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화롭던 그 공간에 어느 수렵 채집인 즉 유목민이 기습 공격하여 원주민을 학살한 후 식량을 약탈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아마도 그 기습에 정주민들은 손쓸 틈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어린이도 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보아 부족 간의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학살자들은 왜 그들을 몰살시켰을까? 10,000년 전은 빙기가 완전히 끝나고 간빙기에 접어든 시기였기 때문에 호수나 강이 있는 곳은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정착 생활을 하는 부족들이 드러나고 농경과 가축에 관심을 가진 부류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수렵 채집에만 의존하는 부족들도 많았다. 그 두 세력 간에 식량과 그리고 여성을 탈취하기 위한 갈등 구조가 형성되었다. 수렵 채집인 즉 유랑인들은 곳곳을 전전하다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할 경우 정착민들을 공격하여 식량 문제를 해소했고,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여성이 필요할 경우도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했을 것이다. 유랑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정주생활로 인한 경제적 이득보다 폭력으로 갈취하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살인강도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토기 없는 신석기시대 즉 중석기시대에서도 신생인류의 폭력은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인도 사라이 나하르 라이 공동묘지 유적에서도 기원전 10,000년 화살이 맞아 죽은 3구의 성인 유해가 발굴되었다. 그리고 그보다 2,000년 ~ 3,000년이 지난 유럽에서는 광범위한 폭력이 난무했던 흔적들이 다량으로 발굴된다. 화살에 피살된 것으로 보이는 유해는 유럽에서만 8군데이고 아프리카와 레반트 지역에 4건이 발견되었다. 당시는 레반트 지역 즉 초승달 지역이라고 불리는 유프라테스 강 북부지역에서 인류의 문명이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그 사람들이 유럽으로 이주하던 시기였다. 신문화 세력이 유럽으로 진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세력 간의 갈등과 투쟁이 유럽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모든 면에서 생존 능력이 부족했던 유럽의 원주민들은 외부인에게 빠르게 흡수되어 갔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설들이 많지만 초승달 지역의 문화가 지배한 것은 확실하다고 한다. 특히 농업과 목축 기술은 압도적으로 외부인이 앞섰기 때문이다.

 

기원전 6,000년 ~ 기원전 5,000년 본격적인 신석기시대에 접어들자 지구는 대혁명의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 안정된 지구 환경은 인간에게 농경과 목축을 하게 했고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도록 했다. 신석기시대는 단지 석기의 발달이 아니라 농경과 목축이 완전히 정착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수렵 채집의 시간은 사라지고 삶의 질은 향상되었으며 부족의 구성원 수도 빠르게 증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므로 해서 집단 사이에 정치라는 것이 나타나고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등장하게 된다. 사회의 계층화가 시작된 것이다. 권력은 인간의 욕망을 증폭시켰다.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그들은 그 권력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었고 그 수단은 바로 폭력이었다.

 

신석기시대의 폭력 사건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여기서 다 논할 수는 없다. 물론 그 후의 시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사건 하나만 잠깐 얘기하고 가겠다. 독일의 탈하임이라는 도시에 '탈하임 죽음의 구덩이'라는 집단 매장지가 1983년에 발굴되었다. 기원전 5,000년 경으로 밝혀진 유골 34개가 발굴되었는데, 어린이 16구, 성인 남성 9구, 성인 여성 6구 성별 불확실 2구가 한 구덩이에 무질서하게 묻혀 있었다. 한 부족을 몰살한 후 구덩이를 파고 전부 매장한 것이었다. 물론 각종 무기로 타격한 흔적이 명확했다. 발굴자들은 유해를 각각 분석한 결과 폭력의 이유까지 설명했다. 남성으로만 구성된 그룹이 여성이 있는 그룹을 집단적으로 살상한 후 그 시신을 구덩이에 유기했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 유적은 당시 유럽에 충격을 주는 고고학적 사건이었다. 7,000년 전에 인간의 잔혹한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의 슐레츠, 독일에 있는 헤르스하임, 역시 독일의 쇠네크 등 수백 명의 시신이 묻힌 매장지에서도 살인과 고문 등 폭력의 흔적들이 드러났다. 신석기시대에 발생한 인간의 폭력에 대한 연구 논문은 수십 편이 발표되어 있다.

탈하임 죽음의 구덩이

당시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폭발하던 시기였다. 불투명한 미래와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샤머니즘의 환각 세계에 빠져들었고, 약육강식이 난무하는 힘의 논리와 여성을 성적인 도구로 전락시킨 수컷의 성욕과 부족 세계를 좌지우지하며 영웅이기를 자처하는 권력욕과 그리고 원한과 복수가 반복되는 혼돈의 세계가 지구 곳곳에서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었다. 인간의 숨기고 싶은 이런 욕망들이 집단 무의식화 되어 때론 도덕과 윤리와 종교로 포장되기도 하면서 장구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인류세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 정신세계를 파다 보면 ‘탈하임 죽음의 구덩이’처럼 폭력의 사이트가 발굴될 것이다.   

 

토기 없는 석기시대에 상대방을 살상할 정도의 폭력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던 요인은 동물을 사냥할 때 사용한 창과 화살을 무기화했기 때문이다. 부족이나 씨족 간에 혹은 사람과 사람 간에 어떤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 싸우는 경우 돌도끼 같은 석기나 맨몸으로 상대방을 살상하기 위해서는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야 한다. 하지만 창과 화살은 상대방을 제압하고 살상하는 데 매우 용이했다. 그것을 인식한 신생인류는 몸싸움을 피하고 가능하면 창과 화살을 이용해 전쟁도 벌이고, 약탈도 하고, 살상도 거릴 것 없이 자행했다. 특히 활의 발달은 그런 전쟁을 확산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구석기시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동굴벽화나 암각화에는 활을 사용하는 인간의 그림이 다량으로 그려져 있다. 궁사들끼리 전쟁을 하는 장면과 동물을 사냥하는 장면들이 동굴 벽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그만큼 당시에는 활의 용도가 다양했다 것을 의미한다.

 

구석기시대 대부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종속된 상태를 넘어서지 못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이 베풀어주는 대자연의 변화에 맞추어 궁박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멸종했던 수많은 종처럼 그들도 지구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을 극복하며 생존해왔다. 빙기 때는 동굴에서 살았고 어떤 씨족들은 얼음이 덮인 산야에서 매머드를 사냥하며 생존했으며 간빙기 때는 움막을 짓고 동물들을 사냥하며 살았다. 그런 가운데서 수많은 인명이 대자연의 폭력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고 사라져 갔다. 네안데르탈인처럼 개체수가 적었다면 아무리 영민한 호모 사피엔스라도 생존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자연의 변화는 절대적이었다. 더구나 혹독했던 빙하기 때 살아남은 것은 물론이고 진화까지 했다는 것은 우주적 대사건이었다. 인류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의 생존율이 호모 사피엔스보다 2%만 높았다면 아마도 현재 네안데르탈인이 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고 전한다. 역으로 설명하면 호모 사피엔스가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것은 그만큼 대단한 그 무엇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무엇을 찾고자 인류학자들이 수많은 학설을 내놓고 있다.  

 

그런 가혹한 세계에서 생존했기 때문에 동족에 대한 폭력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인류학자들은 설파했다. 일상 자체가 생존이라는 카테고리에 갇혀 있는 현실에서 다른 이에게 다툼과 폭력을 행사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생존하는 데는 고단하지만 공동체 내에서의 인간관계는 고단하지 않고 평화로웠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대단히 인간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 설이 구석기시대에 폭력이 없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생존 본능은 그렇게 나이브하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를 아프리카에서 탈출하게 만들었던 원동력은 바로 보다 나은 삶의 질을 향한 욕망이었으며, 그 위대한 욕망은 생존에 대한 본능을 증폭시켰다. 그에 더하여 수컷의 성욕은 프로이트가 설파한 리비도처럼 생존 본능의 원초적인 에너지였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망도 생존 본능을 형태적으로 강화시켰다. 힘 있는 능력자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란 믿음이 공동체를 지배했다. 이런 생존 본능은 폭력성을 기반하지 않으면 성과를 낼 수 없었다. 도발적인 주장인지 모르지만 온순하고 이타적인 유전자는 결코 생존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다. 현재 인간이 지구에서 최상위 포식자로서 군림할 수 있었던 원인 중에 가장 큰 요인이 바로 폭력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폭력성은 수천 년 전에 갑자기 인간의 유전자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이미 6만 년 전 생존에 대한 강한 열망이 충만해 있던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탈출할 때부터 폭력성은 필요불가결한 조건이었다. 광활한 미지의 세계인 유라시아로 진출하여 기존의 구인류와 경쟁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강한 욕망과 폭력이 뒷받침되어야 만 했다. 경쟁자가 없었던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솔로엔시스와 데니소바인 등 구인류는 호모 사피엔스의 폭력성 앞에 굴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매머드와 동굴 사자와 코뿔소 등 대형동물들을 거침없이 사냥할 정도로 극도의 호전성을 보이기도 했다. 욕망과 폭력성은 호모 사피엔스의 생존의 원천이었다. 그 에너지는 빙하기가 완전히 종식을 한 기원전 1만 년 경 이미 자연선택적 변이가 완료된 상태로 인간의 유전자에 천착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지구 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로 군림하였고 자신들끼리 대수롭지 않게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종으로 진화하였다. 역설적으로 놀라운 것은 인간의 폭력성은 문명을 파괴하기도 했지만 짧은 시간 안에 보다 더 진화된 문명을 만들기도 했다는 것이다. 지난 1만 년 동안 도대체 지구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졌길래 이토록 놀라운 문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일까?

Posted by 안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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